‘마탄의 사수’의 막스와 카스파르

용서받지 못한 악인의 기준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4년 5월 1일 12:00 오전

사격대회에서 날아가는 흰 비둘기를 맞춰야 할 막스의 마지막 탄환은 악마의 뜻에 따라 카스파르의 심장에 박힌다. 마탄을 함께 만들고 함께 사용했는데 왜 카스파르는 지옥에 떨어지고 막스는 용서받은 것일까


▲ 일러스트 박기종

슈베르트 연가곡 ‘아름다운 물방앗간 아가씨’에서 물방앗간 도제는 사랑하는 처녀를 사냥꾼에게 빼앗긴다. 물방앗간에서 일을 배워 방앗간지기가 되려고 했던 젊은이가 주인집 딸에게 마음을 빼앗겨 결혼까지 생각하며 희망에 부풀었다가, 사냥꾼이라는 당대 일등 신랑감이 라이벌로 등장하자 대적도 못해보고 아프게 돌아서는 이야기다.
관현악곡 ‘무도회에의 초대’로 유명한 카를 마리아 폰 베버(1786~1826)의 오페라 ‘마탄의 사수(Der Freischütz)’는 19세기 독일에서 농부와 사냥꾼의 사회적 지위가 어떻게 달랐는가를 시종 보여준다. 마을 예비 사격대회에서 컨디션 난조로 과녁을 전혀 맞히지 못한 젊은 사냥꾼 막스는 농부 킬리안이 우승을 거머쥐자 화가 나서 혼자 외친다. “운이 농부에게 돌아가다니!” 농부인 킬리안 자신도 산림감독관 쿠노에게 말한다. “농부가 사냥꾼을 이겼으니 당연히 화가 나겠죠.”
사냥꾼은 총 쏘는 일이 생계와 직결된 일인데, 그저 취미로 사격을 하는 농부에게 졌으니 수치스러운 것도 당연하다는 뜻으로 들린다. 그러나 온 마을 사람들이 하나가 되어 킬리안의 승리를 축하하고 막스를 조롱하는 모습을 보면 사냥꾼에 대한 농부들의 반감이 은근히 컸음을 짐작할 수 있다.
유럽인들에게는 언제나 육류가 주식이었던 것 같지만, 평범한 사람들이 거의 매일 고기를 먹게 된 것은 서구에서도 사실 그리 오래지 않다. 일요일에나 고기를 먹을 수 있으면 다행이었다. 날마다 곡류와 감자만 먹고 사는 농촌 사람들에게 자주 들짐승을 잡아다가 고기를 제공하는 사냥꾼 남편이나 사윗감은 매력적인 존재가 아닐 수 없었다. 마을의 아름다운 부잣집 딸을 차지하는 젊고 솜씨 좋은 사냥꾼은 수많은 농부들에겐 질투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뛰어난 사냥꾼에게도 슬럼프는 있다. 산림감독관의 딸 아가테를 사랑하는 막스는 사격대회에서 1등을 해야만 아가테와 결혼할 수 있다는 압박감 때문에 사격 성적이 형편없이 나빠진다. 시험공부를 충분히 못한 채 인생의 가장 중요한 시험을 앞둔 수험생처럼 막스는 답안지를 미리 빼내고 싶은 유혹에 빠지고, 악마의 하수인인 사냥꾼 카스파르는 이런 막스의 사정을 이용해 그를 악마에게 팔아넘기려 한다. 악마와 계약을 맺고 마탄을 사용해온 카스파르가 계약 기간이 끝나 지옥에 떨어지게 되자 자기 대신 지옥에 갈 희생제물을 찾아낸 것.
카스파르는 유령들이 출몰하는 늑대 골짜기로 막스를 불러내고, 둘은 함께 악마의 힘을 빌어 마탄을 제조한다. 마탄 덕분에 다시 명사수로 돌아온 막스가 사격대회에서 거의 우승에 이르렀을 때, 날아가는 흰 비둘기를 맞춰야 할 그의 마지막 탄환은 악마의 뜻에 따라 카스파르의 심장에 박힌다. 이 일로 마탄 제조 사실이 밝혀지지만 은둔 수도자가 나서서 영주와 마을 사람들을 설득하니 막스는 용서를 받게 된다. 마탄을 함께 만들고 함께 사용했는데 왜 카스파르는 지옥에 떨어지고 막스는 궁극의 행복을 얻는 걸까?
‘사람이 얼마나 죄를 지으면 지옥에 가게 될까’ 하는 문제는 중세부터 기독교 세계의 끊임없는 화두였다. 성직자로서 이런 질문을 자주 받았던 스페인 작가 티르소 데 몰리나는 그 답을 주려는 시도로 ‘돈 후안’을 썼고, 이 작품은 모차르트 오페라 ‘돈 조반니’의 원작이 되었다.
결론은 이렇다. 언제나 선의를 지닌 채 고지식하게 노력하며 살아온 사람의 미끄러짐은 용서가 되지만, 반복적으로 악행을 저질러 마치 악마처럼 악이 체질화되면 우주의 용서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사고는 ‘마탄의 사수’와 비슷한 시대 작품인 괴테의 ‘파우스트’에도 반영된다.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는 법”이라는 유명한 구절로 괴테는 파우스트의 구원을 변호했다.
‘마탄의 사수’의 사냥꾼 예찬은 3막에서 절정에 달한다. “사냥은 사나이다운 욕망이며 사지를 강건하게 하고 식욕을 돋운다”라고 외치는 유명한 ‘사냥꾼의 합창’에서다. 육체노동을 하지 않는 유럽 귀족과 상류사회 남성들이 체력 단련을 위해 장려했던 취미가 바로 사냥이었음을 비웃듯 연출가 페터 콘비츠니는 이 씩씩한 사냥꾼의 합창을 우스꽝스럽게 희화화했다. ‘사냥꾼의 합창’이 울려 퍼지는 동안 진짜 사냥꾼들 대신 흰 셔츠에 넥타이를 맨 늑대 한 마리가 여자들의 잠자리를 부지런히 기웃거리게 하는 세련된 재치를 보여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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