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소 비르살라제 피아노 독주회

거장의 시간과 함께 흐르는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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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8년 12월 31일 12:00 오전

REVIEW  ‘객석’ 필자들이 꼽은 화제의 무대

2018년 11월 29일 금호아트홀

인생은 짧고 예술은 영원하다는 말에 누구나 익숙하고, 또 그리 되길 바랄 것이다. 하지만 시간예술인 음악을 ‘영원성’ 이라는 이상 속에 가두는 일이 진정 바람직할까. 결국 음악하는 사람도 멋지게 나이들고, 시간 속에 흐르는 음악도 매 순간 그것을 창조한 사람과의 잊지 못할 기억들을 남기며 곁을 따라오게 마련이라는 느낌이다. 일 년 만에 이루어진 엘리소 비르살라제의 두 번째 내한 독주회를 감상하며, 그녀의 피아니즘은 참으로 적절하고 매력적인 모습과 속도로 음악가의 인생과 발을 맞추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르살라제의 건반 위 풍모는 일체의 가식이나 트릭 없이 그녀가 가꿔 온 음악을 최상의 모습으로 드러냈다. 철저한 자기관리로 갈고 닦은 기량을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무대에 풀어 놓는 자신감은 여전히 날선 모습으로 듣는 사람을 긴장시켰으며, 76세의 경험치 역시 꾸미지 않은 자연스런 결과로 나타났다.
비르살라제가 연주하는 슈만의 권위는 결코 그 젊음의 매력을 잃지 않으리라 확신한다. 그녀의 해석은 은유적 서정보다 직접적인 서사를 앞세운다. 악상이 매우 복잡하게 움직이며 결코 단순화시켜 표현하지 않음에도 언뜻 들으면 무뚝뚝하거나 강성의 터치로 다가오는 것은 그녀의 어법이 산문적이어서다. 첫 무대였던 6개의 간주곡 Op.4에서는 뚜렷한 선으로 또박또박 써내려가는 젊은 슈만의 문학적 아이디어가 언어적 구체성을 띈 채 들려왔다. 서두르지 않는 템포로 외유내강의 느낌을 준 스케르초 풍의 2번, 기복이 심한 악상과 사색이 두드러진 4번, 슈만 특유의 절뚝이는 리듬을 과도하지 않게 그린 5번 등이 호연이었다. 이어진 ‘다비드 동맹 무곡집’은 캐릭터에 대한 독득한 시각이 인상적이었다. 외향적인 플로레스탄과 온화한 오이제비우스의 기질을 다루는 비르살라제의 연출은 그다지 많은 대비를 두지 않는데, 오히려 두 개의 상성은 곡이 열기를 더해가며 새로운 스토리가 탄생하는 후반부에서 보색대비를 이루며 강렬하게 대립하는 모습이었다. 슈만의 크고 작은 음악적 단상이 모여 맛있는 요리로 변했지만, 각각의 요소들이 저마다의 신선함과 본래의 가치를 잃지 않도록 조절한 요리사 비르살라제의 모습은 흉내내기 어려운 오리지널리티임에 분명했다.
전반의 슈만이 살아있는 현역 피아니스트의 역량과 날카로운 해석력에 대해서였다면, 후반부의 쇼팽 프로그램은 비르투오소의 노년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모범사례를 보는 듯 했다. 단단한 구성 감각과 엄격한 통제가 숨어있는 선율선의 표현, 교묘하게 어긋나 있는 듯하면서도 균형을 잃지 않는 루바토 등은 비르살라제의 고유한 스타일이지만, 화사한 톤과 부드러운 쿠션이 느껴지는 음상은 70대에 들어선 여유로움이자 시간이 허락한 홀가분함으로 다가왔다. 거침없이 질주하는 모습에서 묘한 통일성이 느껴진 발라드 2번으로 시작한 무대는 달달한 선율미를 서슴없이 드러낸 왈츠 Op.34-2, 녹턴 Op.15-1 등을 거치며 달아올랐다. 특유의 제어 감각이 돋보인 A♭장조의 왈츠 두 곡도 오래 회자될 해석이었지만, 이 날의 하이라이트는 템페라멘트와 청중과의 교감, 연주자의 상상력과 홀의 음향감각이 극적으로 맞아떨어진 Op.27의 녹턴 두 곡이었다. 카리스마와 범접하기 힘든 존재감으로 일관하던 비르살라제가 무대에서 자주 미소짓는 모습을 보인 것 자체가 내겐 놀라움이었고, 그녀의 웃음과 함께 달콤함과 애교로 변모된 쇼팽의 세계는 인생 전체를 치열함과 자기희생으로 살아 온 음악가만이 보일 수 있는 행복감으로 다가왔다.

글 김주영(피아니스트) 사진 금호아시아나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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