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얼터너티브 국악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20년 9월 21일 9:00 오전

SPECIAL

 

 

 

 

국악의 관습적 사운드를 거부하다

21세기 얼터너티브 국악

21세기 초에는 ‘퓨전’이라는 용어가 음악사를 읽는 중요한 단서였습니다. 국악 역시 다양한 음악 장르와 융합을 시도했고, ‘퓨전 국악’이라는 명칭이 탄생합니다. 국어사전에 ‘퓨전 국악(fusion國樂)’은 ‘국악기와 양악기를 모두 사용하여 연주하는 전통 음악’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동시대 아티스트들은 자신들의 음악이 단순히 ‘퓨전 국악’으로 정의되는 것에 거부감을 보입니다. 마침내 그들만의 장르를 주체적으로 주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내세우는 말들이 참 새롭습니다. 포스트록, 코리안 샤머닉 펑크, 접신 록, 얼터너티브 팝밴드, 코리안 사이키델릭, 얼터너티브 블랙뮤직, 펑쿳…. 새롭게 태어나는 국악 앞에 붙는 이 장르명들은 통상적으로 쓰이는 용어들은 아닙니다.

그들은 이러한 수사학을 통해 자신들만의 음악을 더욱 돋보이게 하고, 세상에 둘도 없는 음악임을 선언합니다. 그리고 이 말들을 사용함으로써 현재 주류 음악과는 다른 ‘대안적(alternative)’ 성격을 지닌 음악임을 선언합니다.

예컨대 잠비나이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음악적 실험 정신을 ‘포스트록’이란 그릇에 담았습니다. 굿음악을 이야기하는 악단광칠은 환각적인 사운드의 사이키델릭에 착안해 ‘코리안 사이키델릭’이라 불리고 싶답니다. 주류 국악도 아니고, 주류 팝도 아닌 음악을 들고 나온 이날치는 스스로를 ‘얼터너티브 팝밴드’라 부르고요. 무속음악의 펑키한 무드를 전달하고 싶다는 추다혜차지스는 ‘펑쿳(funk+굿)’을 주창합니다.

이번 특집에선 주류 국악의 관습적 사운드를 거부하는 작업들을 ‘얼터너티브 국악’이라 명명하였습니다. 지금 가장 뜨거운 얼터너티브 국악 밴드, 잠비나이·악단광칠·이날치·추다혜차지스를 만나 진솔한 대화를 나눴습니다. 이소영 음악평론가는 한국 음악의 외래 음악 수용사를, 김학선 대중음악평론가는 얼터너티브 국악 밴드의 지속적인 발전을 위한 의견을 더해주었습니다.

혹시 이러한 현상으로 전통 국악이 사망 선고를 받았다고 생각하나요? 그럴 리가요. 음악의 혼용과 변용은 반듯한 원형을 토대로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얼터너티브 국악’은 국악이 여전히 건재하다는 방증이겠지요.

글 장혜선 기자

 

 

INTERVIEW

 

#포스트록 #잠비나이의 음악

잠비나이 2009~

포스트-룰, 규정에서 벗어나기

이일우 피리/태평소/생황/기타/작곡

영국 멜트다운 페스티벌

이일우 ©SIYOUNG SONG

찢어질 듯 날카로운 일렉트릭 기타, 격렬한 드럼, 으르렁거리는 보컬까지. 익히 알려진 ‘록(Rock)’ 음악의 일면이다. 뿌연 연기 속을 헤매듯 시작해 이내 사납게 터져버리는, ‘응축-폭발’의 전개는 록 형식과 맞닿아 있다. 하지만 잠비나이를 ‘록’의 울타리 안에서만 바라보기엔 괜히 아쉽다. 이토록 강렬한 사운드를 완성하는 것이 국악기인 까닭이다.

잠비나이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동문인 이일우(피리·태평소·생황), 심은용(거문고), 김보미(해금)가 결성했다. 2015년 베이시스트 병구와 드러머 최재혁이 합류하면서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갖추었다. 멤버 과반수가 국악기 전공자이지만 잠비나이는 스스로 ‘포스트록’ 범주에 들어가길 원했다. 1990년대 중반부터 등장한 포스트록은 록·헤비메탈·펑크·재즈·클래식 음악 등 여러 장르 음악에서 영향 받아 다양한 사운드 실험을 감행하는 음악적 흐름을 일컫는다. ‘포스트’를 ‘탈피’의 의미로 보면 과거에 정립된 록 음악의 틀에서 벗어난다는 뜻도 함의한다. 이 용어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잠비나이의 실험 정신을 담기에 적당한 그릇이었다.

잠비나이가 탈피하고자 했던 것이 음악의 형식만은 아니다. 고정된 국악기의 역할을 부숴보고자 했다. 자연 그대로의 음향을 지향하는 국악기에 전자음향을 연결했다.

그러니 피리와 해금, 거문고의 음색은 더 날카로워졌다. 오랜 기간 ‘신선한 음향’에 목말라있던 전 세계 록 마니아들은 잠비나이에게 열광했다. 잠비나이에서 작곡을 담당하는, 아울러 피리와 태평소, 생황을 부는, 때로는 기타를 치거나 보컬로도 활약하는 이일우에게 잠비나이의 음악 세계에 관해 물었다.

‘포스트록’, 스스로 붙인 이름인가?

우리가 표방하기도 했고, 포스트록에 대한 이해도가 있는 평단과 대중이 포착하기도 했다. 포스트록은 그 범위가 굉장히 넓어서 우리가 어떤 실험을 하든 포괄할 수 있는 용어다. 앞으로도 포스트록 밴드로 불리면 좋겠다. 물론 최고의 명칭은 ‘잠비나이의 음악’이지만.

잠비나이의 음악 세계는 그간의 수상 이력으로도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대중음악· 국악·록까지, 다분야에서 인정받았는데.

2013년에는 제10회 한국대중음악상 크로스오버 음반상을 받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국악과 타 장르의 크로스오버, 즉 ‘퓨전 국악’은 대중에 친숙한 선율을 연주하는 경향이 강했다. 잠비나이는 대중과 거리가 먼 음악을 만들고 있었는데 대중음악상이라 불리는 상을 받아 감회가 남달랐다. 2016년 KBS국악대상(단체부문)과 대한민국 국회대상(올해의 국악인)도 수상했다. 잠비나이의 음악에 대한 반감이 가장 심했던 국악계로부터 인정받았다는 데 의의가 있었다.

최근에는 3집 음반 ‘온다(ONDA)’로 제17회 한국대중음악상 록음반상도 수상했다.

전혀 다른 장르에서 ‘국악기’의 연주를 높이 평가해주었다는 것이 뿌듯했다. 우리는 늘 ‘국악’과 ‘국악기’를 가두고 있는 틀에서 탈피하고자 노력한다. 이 명칭은 사실 서양과 일본의 제국주의 문화가 유입되면서 성립되지 않았나. 그저 ‘악기’이고 ‘음악’이었던 것이 ‘국악기’와 ‘국악’으로 한정된 것이다.

그럼에도 잠비나이 음악에서 ‘국악’의 특성이 묻어나오는 지점이 있다면?

잠비나이의 음악은 80% 정도가 작곡으로, 20%가 연주자의 시김새, 즉 즉흥연주로 구성된다. 시김새를 처리할 때 국악에서 약속된 규칙을 따르기도 한다. 국악기가 가장 편하게 소리를 낼 수 있는 테크닉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꼭 그 안에서 머무르려고 하지는 않는다. 악기가 편안하게 낼 수 있는 소리를 최대한 활용해 새로운 선율을 쓴다.

국악기로 머릿속에 그려진 음악을 구현하는 데 어려움은 없는가?

떠오르는 선율을 자유롭게 쓰는 편인데, 이걸 실현할 때 연주자들이 어려움을 겪곤 한다. 악기와 마이크를 직접 연결하기 어려우니 음향감독의 높은 역량도 필요하다. 멤버들이 고생하는 모습을 보다 보니 작곡할 때의 상상력이 제한되는 것 같기도 하다. 전에는 자유롭게 펼쳐놨다면 이제는 ‘이렇게 하면 공연 사운드 체크할 때 힘들겠지’하고 자기검열을 하게 되더라.

지금까지 세 장의 정규 앨범을 발매했는데, 그간의 변화를 꼽자면?

1집(2012)과 2집(2016)에서는 국악기에 대한 편견을 깨기 위해 더 강한 음악을 선보였다. 그때까지 다녔던 회사에서 받은 스트레스가 음악에 녹아들기도 했다. 헤비메탈의 이름을 딴 ‘국악메탈’이라는 평도 받았다. 퇴사하고 만든 3집(2019)에서는 그 감정이 좀 누그러졌다.(웃음) 대신 현대인을 위로하는 메시지를 직접적으로 전달하고자 보컬을 넣었다. 국내 청중에겐 메시지로, 해외 청중에게는 한국어 가사가 새로운 사운드로 다가갈 수 있도록 했다.

잠비나이는 현재 해외에서 더 큰 인기를 누리고 있다. 해외에서의 인지도를 높인 수단으로 유튜브가 언급되던데.

10여 년 전, 어느 해외 에이전시가 유튜브에서 잠비나이의 뮤직비디오를 보고 연락을 해왔다. 해외 진출의 길이 열린 계기다. 2013년에는 유럽 최대 월드뮤직 마켓인 ‘워멕스(WOMEX)’의 쇼케이스 무대에 섭외돼 40분간 공연했다. 그날 명함을 수두룩하게 받았다. 월드뮤직 페스티벌이지만 EDM·헤비메탈·재즈 등 여러 장르 관계자들이 함께하는 자리였다. 덕분에 다양한 자리에 초청받으며 일 년에 2~3개월씩 해외에서 지내는 운명이 됐다.

영국 레이블 벨라 유니온에서 음반을 발매하고 있다. 세계 인디음악신에서 독보적인 입지의 음반사와 연을 맺었다.

이전엔 해외 팬들이 잠비나이의 음반을 구매하는 게 쉽지 않았다. 해외 유통망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을 시기에, 마침 영국 인디레이블 벨라 유니온(Bella Union)의 대표인 사이먼 레이먼드가 잠비나이에 관한 입소문을 듣고 영국 공연에 찾아왔다. 그 인연을 계기로 계약서에 사인했고 지금까지 함께 작업하고 있다.

해외에서 인정받고 나서 잠비나이의 행보에 대한 국악계의 반응이 많이 달라졌다고.

처음엔 안 좋은 얘기를 많이 들었다. 오히려 기뻤다. 우리가 새로운 것을 하고 있다는 증거였으니까. 전통음악을 하는 젊은이들이 갈 곳을 잃은 시대다. 국악기를 가지고 살아남으려면 자기의 음악을 해야 한다. 최근 들어서야 국악계에서 이를 점차 인지하고 있다. 이제 나이 지긋하신 선생님들도 잠비나이의 행보를 긍정적으로 평가해주신다.

최근 국악계 연구에서 잠비나이는 긍정적 사례로 자주 등장한다. 잠비나이의 음악을 여러 관점에서 해석하던데, 당사자로서 그 내용에 공감하는지 궁금하다.

사실 여러 논문에 적힌 내용이 우리가 의도했던 것과는 다른 경우가 많다. 하지만 내가 음악을 이렇게 만들었으니 무조건 그렇게 들으라고 할 수는 없다고 본다. 우리의 의도를 곧이곧대로 받아주지 않아도 상관없다. 학자든, 평론가든, 일반 대중이든 각자 다양한 해석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국악 평론의 필요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평소 느낀 점은? 국악계 평론들은 좀 단편적으로 느껴지곤 했다. 비판의 지점도 ‘전통에서 얼마큼 벗어나있냐’는 데 한정돼 있고, 음악가와 음악을 깊숙이 살피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깊은 평론을 할 수 있을 만큼 고민이 들어간 작품이 적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최근 젊은 음악가들의 행보는 주목할 만하다. 음악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태도가 보인다. 평론계에서 젊은이들이 가진 음악과 삶에 대한 고민을 포착해, 오늘날의 국악에 대한 담론을 형성해 가주길 바란다. 연주자들도 자극을 받아 좋은 음악을 만들어 가고, 이 신(scene)도 점차 탄탄해질 것이다.

앞으로 국악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한다면?

국악에 대한 국가 지원은 충분히 이뤄지고 있다. 여러 경연대회를 통해 상금을 탈 기회도 많다. 그런데 이런 환경이 음악가들을 종종 안일하게 만드는 것 같다. 상금을 목적으로 하면 심사위원의 취향에 맞는 음악을 만드는 데 치중하게 된다. 단발성으로 팀이 결성됐다가 해체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진지하고 치열하게 자신의 음악을 고민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글 박찬미 기자 사진 더텔테일하트

 

 

 

#코리안 샤머닉 펑크 #접신 록 #K-포크팝 #코리안 사이키델릭

악단광칠 2015~

전통 갖고 전략적으로 놀기

김현수 대금 & 방초롱 보컬

 

선글라스에 한복. 범상치 않다. 여기에 진지한 표정과 상반된 해학적인 몸짓까지. 예스러운 창법에 가사는 또 오늘날의 말이다. 국악기를 연주하는 건 맞는데 어라, 좌식이 아닌 입식에 눕혀놓은 징을 치는 품새는 꼭 드러머의 그것 같다. 이렇듯 악단광칠의 음악은 낯선데 익숙한 것들로 가득하다. 전통의 요소를 재미나게 모아 벌이는 놀이 한판이 그리 흥겹다.

악단광칠은 2015년, ‘광’복 ‘70주년’에 결성됐다고 해서 지은 이름이다. 전통음악의 새로운 시도로 주목받았던 정가악회 소속 연주자 몇몇이 모여 밴드를 꾸렸다. 멤버는 총 9명으로, 김현수(대금)·이향희(피리·생황)·박혜림(아쟁)·원먼동마루(가야금)·전현준(타악)·선우진영(타악)과 방초롱·왕희림·안민영(노래)으로 구성된다. 이들이 음악적 정체성을 내세운 것은 황해도 굿음악과 서도소리. 그리하여 ‘1940년대 해방공간을 유랑하는 조선악극단’이라는 콘셉트가 탄생했다.

온라인에서 인기를 끈 정규 1집의 ‘영정거리’는 황해도 굿거리 중 하나를 원문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 온갖 곳에 있는 신(영정)들을 부르는 음악인데, 듣다 보면 묘하게 흥이 오른다. 그게 한국인만의 흥인 줄 알았는데, 2019년 세계 최대의 월드뮤직 페스티벌인 워멕스에까지 초청되는 것을 보면 흥은 만국 공통인가 보다. 최근에는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제작비를 모금한 정규 2집 ‘인생 꽃 같네’(비스킷 사운드)를 발매했다. 여전히 흥겨운데, 이들의 음악적 고민과 변화 또한 느껴진다. 전통음악으로 진지하게 놀고 있는 악단광칠의 김현수와 방초롱을 만나러 용산구의 정가악회 사무실을 찾았다.

국악 단체로서 전통적인 ‘놀이패’가 아닌 ‘악단’으로 이름 지었다.

김현수 국악으로 뭔가 다른 것을 한다는 느낌을 주고 싶었다. 쉽고 직관적인 전통음악을 추구한다.

방초롱 모단체인 정가악회는 전통음악과 다양한 공연예술 장르를 결합해 접점을 넓혔다. 악단광칠은 이제 어떻게 ‘음악적’으로 대중에게 다가갈 것인가라는 고민에서 출발했다.

노래 3명, 현악기 2명, 관악기 2명, 타악기 2명으로 구성된다. 이러한 편성은 어떻게 정해졌나?

김현수 먼저 팀을 꾸렸고, 편성에 대한 고민은 나중이었다. 그동안 같이 해와서 각자 어떤 사운드를 내는지 알고 있었다.

방초롱 전통악기가 가지는 음색의 한계에 대해서는 계속 고민 중이다. 원래는 콘서트홀이 아니라, 한옥에서 연주되기 위한 악기들이다. 이펙터를 사용하는 등 전자음악적인 시도도 해보고 있다.

대중적인 전통음악을 지향하면서, 우리에게 낯선 이북의 황해도 굿음악과 서도민요를 소재로 삼았다.

방초롱 지금 멤버들과 정가악회 음악극 ‘말과 음악’(2007)을 준비하며 황해도 음악을 깊이 공부했다. 창단 당시 황해도 굿음악과 서도민요를 하는 팀이 드물어서 경쟁력이 있겠다 싶었다.

김현수 확실히 서도소리는 국악하는 사람들에게도 어색하게 느껴진다. 경기민요나 판소리와 음계 차이가 있고, 시김새도 달라서다. 논문·기록물을 찾아가며 공부했다.

해방공간의 유랑악단이라는 콘셉트는 그 이후에 마련된 소통 전략인 셈인가?

방초롱 이 음악으로 세상과 소통하려면 공감대가 필요했다. 황해도 음악이 가진 역사적 맥락을 이야기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퍼포먼스 요소들은 1950~60년대 초기 가요의 김시스터즈·이시스터즈 등에서 모티브를 얻었다. 음악이 변화하는 과정에 있었던 그네들에게 동질감이 느껴졌다. 우리 음악 역시 대중음악과 전통음악 사이에 있는 무언가였으니까.

코믹하고도 독특한 의상과 안무 덕에 한 외신은 “아찔한 쇼밴드”라고 평하기도 했다.

방초롱 우리 음악을 즉각적이고 감각적으로 전하기 위해서다. 의상에는 이북 전통 굿의 중성적인 요소와 원색의 강렬한 색감을 적용했다. 전통춤을 소재로 직접 안무를 짜기도 한다. 음악적인 방향성도 점차 춤출 수 있는 음악으로 가고 있다.

반복적인 가사와 선율, 흥겨운 춤사위, 강렬한 퍼포먼스로 악단광칠의 음악은 ‘코리안 샤머닉 펑크’ ‘접신 록’ ‘K-포크팝’이라는 장르로 불린다. 이러한 명칭에 동의하는가?

김현수 마음에 든다. 우리가 어떤 음악을 하는 팀인지 사람들이 바로 알 수 있을 것 같다. 같은 이유로 ‘퓨전 국악’이나 ‘크로스오버 국악’이라는 개념에는 아쉬움이 있다. 각기 다른 음악적 특색을 뭉개버리는 말이다.

직접 악단광칠의 장르를 명명한다면?

김현수 ‘코리안 사이키델릭’이 좋겠다. 사이키델릭은 몽롱하고 환각적인 사운드를 말한다. 굿음악을 이야기하는 우리 또한 실연할 때 강력한 사운드에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주려고 한다.

방초롱 위트 있는 음악에 멤버들의 성향에서 우러나오는 유머와 강렬함이 우리의 특성이다. 이것을 한마디로 규정짓기는 어렵다. 누군가는 ‘축제용’이라고 낮잡아보기도 한다. 이러한 편견을 깨고 싶다.

2019년 워멕스, 2020년 글로벌페스트에서 쇼케이스 무대를 가지며 해외 진출에 성공했다. 국내외 반응에는 어떤 차이가 있나?

김현수 오히려 관객의 반응이 똑같아서 놀라고는 한다. 우리 음악으로 만들어내고 싶은 움직임이 있는데, 이에 맞춰 한국인과 외국인이 몸을 움직이고 뛰노는 과정이 닮아있다.

방초롱 국내 반응에는 세대 차이가 있다. 나이 든 분들이 ‘내가 아는 음악이 이렇게 다르면서도 나를 신나게 하네’라면, 젊은 분들은 ‘전혀 모르는데 신나네’다. 외국 분들은 젊은 세대가 우리를 바라보는 느낌에 가깝다.

여우락페스티벌 ©국립극장

창단 4년 차였던 2019년 네이버 온스테이지에 출연해 젊은 세대에게 인지도를 높였다. 신생 밴드가 아니었기에 감회가 남달랐겠다.

방초롱 신기했고, 더 솔직히는 당혹스러웠다. 우리는 그동안 해오던 것을 똑같이 했을 뿐인데 무엇이 우리를 힙(hip)하게 만든 것인지 분석해봤다. 달라진 건 우리가 소개된 채널이었다. 주로 대중음악을 듣는 사람들에게 우리 음악이 소개됐고 받아들여진 것이다. 그동안 우리 음악의 장르를 넓혀봤자 월드뮤직이었다. 이를 계기로 우리 음악이 대중음악신에 같이 놓일 수 있겠다는 확신을 갖게 됐다.

김현수 비주얼은 그 영상에서 굉장히 중요했다. 팀의 캐릭터와 외적인 모습을 잡는 데 도움이 됐다. 해외에 우리 팀을 소개할 때도 그 영상이 효과적이었다.

정규 2집 ‘인생 꽃 같네’ 제작을 위한 크라우드 펀딩에 목표 금액 이상이 모였다. 그래서일까. 1집 ‘악단광칠’(2017/악당이반)보다 훨씬 대중적이고 창작의 요소가 많아진 느낌이다.

김현수 ‘영정거리’가 수록된 1집부터 직접 가사를 쓰고 싶었다. 1집의 소리는 이미 우리 안에 고착됐다고 생각한다. 그 농도를 변화시킬 뿐이다. 전통음악의 요소를 중심으로 가져갈지, 음악에 녹여낼지는 그때그때 다르다. 예컨대 2집의 ‘노자노자’는 서도민요 ‘영변가’에서 모티브를 얻었고, ‘와대버’는 경기민요 ‘는실타령’의 가사를 가져왔다. 눈치채지 못할 만큼이라도 전통의 요소를 녹여내려는 시도가 중요하다.

방초롱 굿은 단순한 음악을 넘어 공동체의 안녕을 비는 제의적인 기능을 가진다. 굳이 굿음악이 아니더라도 관객과 마음을 나누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더 넓은 지점을 상상하는 과정에 있다. 2집의 ‘이노래’는 완전한 창작곡이다. 멤버들과 영화 ‘김복동’(2019)을 본 뒤 그 감상을 즉흥연주로 표현한 것을 노래로 만들었다.

전곡의 작사·작곡 크레딧을 ‘악단광칠’로 표기한다. 공동 작업은 어떻게 이뤄지나?

방초롱 우리는 아홉 명이 아홉 명의 목소리를 내는 팀이다. 누군가 소재를 가져오면, 다른 누군가가 가사에 담을 의미를 말하고, 음악적인 방향을 제시하기도 한다.

지속가능한 활동을 위해 고민하는 지점은?

방초롱 지금은 우리 팀을 새롭다고들 하지만, 우리가 많이 소비되면 언젠가는 그 새로움을 잃게 될 것이다. 새로움이 주는 호기심 말고, 진짜 음악적으로 사람들을 뛰게 하기 위해 고민하고 있다.

김현수 국악이라는 정체성이 아니라, 우리의 정체성 안에서 국악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보려고 한다. 그리고 우리 음악을 어떤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은지, 그러려면 우리가 무엇을 명확하게 표현해야 하는지를.

글 박서정 기자 사진 악단광칠

 

 

 

#얼터너티브 팝밴드 #조선의 클럽에 온 것을 환영한다

이날치 2019~

우리 음악의 퓨처리즘

안이호 보컬 & 정중엽 베이스

 

조선에 클럽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북과 장구는 장단을 주도하고, 소리꾼은 앞에 나와 창(唱)을 불렀겠다. 조선의 춤꾼들은 장단을 타며 몸을 율동적으로 흔들었겠지. 이러한 장면을 실제로 보고 싶다면 유튜브에 이날치의 ‘범 내려온다’를 검색해보길. ‘범 내려온다’ 네이버 온스테이지 영상은 유튜브 조회수 220만 회를 기록했다. 이날치의 밴드 구성은 좀 독특하다. 두 대의 베이스와 한 대의 드럼은 리듬을 주거니 받거니, 소리꾼 출신의 보컬들은 앞에 나와 떼창을 한다. 앰비규어스댄스컴퍼니 무용수들은 박자를 타며 무대를 누비고, 보랏빛 조명까지 더해지니 몽환적이기도 하다. 이 영상을 보고 누구는 “국악이 이렇게 힙(hip) 하냐”며 놀라워했고, 누구는 “국악의 라임이 장난이 아니다”고 평했다. 이들의 음악이 얼마나 ‘국악적’인지는, 국악을 잘 모르더라도 금세 눈치챌 수 있다.
그런데 이들은 스스로를 ‘얼터너티브 팝밴드’라고 명명한다. 구성원의 이력은 참으로 상이하다. 보컬 안이호는 서울대 국악과를 졸업, 정광수제 ‘수궁가’를 완창한 소리꾼이다. 반면 베이시스트 정중엽은 대학에서 기타와 작곡을 전공했고, 10년 동안 밴드 장기하와얼굴들에서 활동한 바 있다. 이날치는 토대가 다른, 그렇지만 음악 밖에 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모여 그저 지금을 즐기고 있다. 그런 이들에게 ‘이날치의 음악적 토대’를 묻는 건 그야말로 어불성설이지 않을까. 합정역에 위치한 한 카페에서 안이호와 정중엽을 만났다.

두 사람 모두 음악가로서 다음 스텝에 대한 고민이 있을 때 이날치에 합류했다. 밴드 결성 전후로 고민이 좀 달라졌나? 
정중엽 크게 본다면 ‘연주자 정중엽’에서 ‘곡 쓰는 정중엽’으로 바뀌었다. 사실 이전까지는 음악에 대한 관심사가 밴드 형태로만 있었다. 내가 너무 밴드 음악만 하고 있는지 고민하던 시점에 장영규 형을 소개받았다.
안이호 나는 항상 판소리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이날치의 작업 역시 판소리 하는 사람으로서 하고 있다.
이날치는 짧은 기간 동안 대중에게 인지도를 확보했다.  
정중엽 공식 데뷔 전 ‘채널1969’ 클럽에서 ‘수궁가 프로젝트’를 선보였다. 당시 많은 공연 관계자가 우리의 공연을 보러 왔다. 이 공연 이후 2019년 현대카드 언더스테이지 ‘들썩들썩 수궁가’ 공연이 잡혔다. 밴드를 하는 입장에서 현대카드 언더스테이지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데, 아직 앨범도 발매 안 된 팀에게 공연 제안이 와서 놀라웠다.
이후 온스테이지 영상으로 다시금 화제를 모았다. 21세기 음악은 온라인 세계에서 젊은 세대와 직접적으로 소통하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인상 깊었던 댓글이 있다면? 
안이호 ‘조선의 클럽에 온 것을 환영한다’는 댓글이 인상 깊었다. 만약 일제강점기가 없어서 조선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면 분명 조선의 클럽에는 우리 같은 사람이 있었을 테다.
이날치는 현재 미디어에서 ‘얼터너티브 팝밴드’라고 불리고 있다. 멤버 장영규가 이날치를 두고 처음 그 단어를 사용한 걸로 알고 있는데, 이날치의 음악이 특정 용어로 정의되는 것에 대한 생각이 궁금하다. 
정중엽 우리 음악을 국악 카테고리로 한정시키고 싶진 않았다. 그렇다고 주류 팝도 아니기 때문에 ‘대인적인 팝’을 제시하는 팀이라고 생각한다.
안이호 이전부터 많이 사용해오던 ‘퓨전 국악’이라는 단어는 사회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거나, 혹은 장르를 규정하거나, 음악의 성격을 나타내지는 않는다. ‘퓨전 국악’이라는 말은 국악에 대한 편견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음악을 분류하는 어떤 용어를 정하는 게 실은 대중에게 쉽게 다가가기 위해서다. 그런데 이제는 그러한 용어가 오히려 대중에게 어렵게 다가가는 것 같다. 그렇다면 음악에 있어서 이러한 구분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걸까?
정중엽 ‘월드뮤직’이라는 단어도 다시 생각해봐야 된다. 그냥 부르기 편하고자 정해진 명칭인 것 같다. 그 안에 얼마나 다양한 음악이 존재하는데….
그렇다면 이날치의 음악에 관한 이야기를 해볼까. ‘대안적인 팝’을 제시하는 밴드인데 국악의 음악적 특징을 올곧게 가져와 인상 깊다.  
정중엽 판소리는 한 명의 소리꾼이 고수의 북 장단에 맞추어 노래한다. 고수의 역할과 비슷하게 하기 위해 이날치는 베이스 두 대와 드럼 한 대라는 기악으로 구성했다. 처음에 장영규 형에게 기타를 연주할지 베이스를 연주할지 물었는데, 베이스 두 대가 괜찮을 것 같다고 하더라. 악기 구성에 대한 고민은 있었는데, 막상 하다 보니 자연스레 작업이 이루어졌다.
리듬 중심, 그러니까 장단 중심의 악기 구성이 소리꾼에겐 실제로 더 편한가. 
안이호 기타와 함께해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다(웃음). 다만 베이스 두 대가 음악을 주고받는 구성이 듣는 사람 입장에선 참 재밌다. 이날치 음악은 미술관 같은 느낌이 있다. 미술관 안에는 각 작품이 개별로 존재하지만, 하나의 미술관으로 받아들여진다. 우리도 소리꾼 네 명의 소리가 다 다르고, 두 명의 베이시스트 연주 스타일도 상이하다. 서로 어울리려고 애쓰기보다는 각자 잘할 수 있는 걸 잘하고자 한다.
현재 보컬은 한 명의 남성 소리꾼을 비롯한 세 명의 여성 소리꾼(권송희·이나래·신유진)이 함께하고 있다.  
안이호 판소리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하나씩 쌓여 가면 어떤 느낌일지, 그런 덩어리가 모이면 어떤 소리가 될지 궁금했다. 처음에는 남성 소리꾼이 두 명이었는데 한 명이 탈퇴하면서 현재는 여성 소리꾼들이 떼창하는 형식으로 된 것 같다.
정중엽 베이시스트는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2020)’ 음악감독으로 참여해 소리꾼 이희문과 협업하기도 했다. 국악에 대한 관심은 언제부터 시작된 건가? 
정중엽 이전에 혼자 발리에 놀러 간 적 있다. 해변가에서 기타를 들고 한참을 오랫동안 걷다가 현지 청년들을 만났다. 그들이 나에게 “한국의 음악은 어떤 게 있냐”고 묻더라. 아무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때부터 조금씩 한국 음악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 같다.
이제 막 시작점에 선 이날치. 앞으로 지속 가능한 활동을 위해 무엇이 필요할까? 
정중엽 우리는 앞으로도 잘 할 자신이 있다. 다만 대중이 관건이라고 생각한다. 대중의 관심이 공연 관람과 음반 구매로 이어져야지만 예술가들이 먹고 살아갈 수 있다. 온라인 매체를 통해 이날치를 접한 대중이 공연 관객으로도 이어지기를 바란다.
소위 말하는 ‘국악 현대화’에서 가장 중요한 지점은? 
안이호 ‘국악 현대화’라니! 이 말은 허상이다. 예컨대 ‘베토벤의 현대화’라는 말은 안 쓴다. 베토벤의 작품은 이전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으니까. 국악 역시 예전부터 존재했던 것이 오늘까지도 존재하는 것이다. 그것을 ‘현대화’라고 표현하는 것은 과거와 현재가 단절됐다고 생각하는 걸까? 국악은 지금도 여전히 지속되고 있으니 그건 과거가 아니다. 나는 이날치가 국악이란 범주 안에 들어가는지 잘 모르겠고, 왜 자꾸 과거와 현재를 나누려고 하는지도 잘 모르겠다.
글 장혜선 기자 사진 우상희스튜디오·LG아트센터

이날치 ‘수궁가’ with 앰비규어스댄스컴퍼니 ©LG아트센터

 

 

 

 

 

 

 

 

#얼터너티브 블랙뮤직 #코리안 펑키 샤머니즘 뮤직 #추다혜식 무가(巫歌) #펑쿳(펑크와 굿) #사이키델릭 샤머닉 펑크
추다혜차지스 2020~

현대판 샤먼의 등장!

추다혜 보컬

 

추다혜

 

 

 

 

 

굿판이 펼쳐지면 무당은 리드미컬한 장단에 맞춰 까탈 부리는 혼령을 혼낸다. 화려한 예복을 입은 무당은 악사의 연주에 맞춰 춤추고 노래한다. 숨 가쁘게 돌아가는 굿판을 보고 있자면 새삼 무당이 종합 예능인이라는 생각이 든다. 신성한 주술의 언어가 오락적 성격을 지녔다는 점이 요상할 수도 있겠지만, 무속에서 부르는 무가(巫歌)의 예술성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무당이 ‘신과 인간의 매개자’라면, 여기 ‘무당과 인간의 매개자’를 자청한 사람들이 있다. 2020년 5월, 첫 정규앨범을 발매한 추다혜차지스다.
우선 보컬 추다혜를 주목하자. 씽씽 밴드의 바로 그 홍일점 소리꾼이다. 씽씽 활동 중단 이후 모두가 추다혜의 행보를 주목할 때 홀연히 무대를 떠났다. 2년간 숨 고르는 시간을 가진 후 마침내 자신의 이름을 내건 팀 추다혜차지스(CHUDAHYE CHAGIS)의 리더로 모습을 드러냈다. 멤버는 네 명. 보컬 추다혜, 기타리스트 이시문, 베이시스트 김재호, 드러머 김다빈으로 구성되어 있다.
야심찬 신보 ‘오늘밤 당산나무 아래서’는 앨범명부터 오묘하다. 마을의 수호수인 당산나무는 굿판을 연상시킨다. 앨범에 수록된 총 아홉 곡은 일종의 ‘추다혜식 무가’이다. 평안도·제주도·황해도 굿에서 쓰이는 무가를 펑크와 힙합 사운드에 엮어 재해석한 것. 감각적인 사운드로 무장된 이 앨범을 처음 주목한 건 힙합계였다. 앨범에 대한 첫 평론 역시 힙합 매거진에 올라왔고 이후 여러 대중음악지에서 극찬을 쏟아내고 있다.
무당에게 필요한 재능은 여러 가지다. 노래와 춤은 물론 연기력, 무대 장악력도 필수일 터. 서도민요를 공부하고, 서울예대 국악과에서 수학한 후, 중앙대 음악극과에 입학해 연기를 공부, 이후 씽씽 활동으로 무대에서 노는 법을 습득한 이 사람. 이렇게 ‘21세기 현대판 샤먼’이 우리에게 왔다.

 

 

 

 

 

 

추다혜차지스의 음악을 지칭하는 다양한 용어들이 재밌다. 현재 언론 보도만 보더라도 ‘얼터너티브 블랙뮤직’ ‘코리안 펑키 샤머니즘 뮤직’ 등의 오묘한 수사어들이 흥미를 끈다.
이런 명칭은 팀 내에서 스스로 짓는 게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나 역시 처음에 우리 음악을 어떤 장르로 분류해야 할지 고민이 많았다. 우리가 스스로 새로운 장르를 정하지 않으면, 음악 색깔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상태로, 편의에 따라 ‘퓨전 국악 밴드’라고 불릴 것만 같았다.
추다혜차지스에서 스스로 내건 장르 명칭은 ‘펑쿳(펑크와 굿)’과 ‘사이키델릭 샤머닉 펑크’이다. 공통적으로 ‘펑크(Funk)’를 붙인 이유는? 
음악적 구성보다는 무속음악의 펑키(Funky)한 무드를 전달하고 싶었다. 추다혜차지스의 음악 안에는 힙합·재즈·댄스·록·사이키델릭·펑크·레게·덥 등 다양한 음악이 녹아있다. 하지만 음원 사이트에는 음악 분류를 주류 음악 위주로 카테고리화한다. 선택지가 한정되어서 음원 사이트에는 우리 음악을 힙합·댄스·록으로 분류해 놨다. 이러한 분류 때문인지 추다혜차지스에 대한 첫 평론이 힙합 매거진에서 나왔다.
특히 블랙뮤직 애호가들이 추다혜차지스에 열광하고 있다. 그 이유를 스스로 분석하자면?  
굿은 즉흥성이 강하고 리드미컬해서 멤버들과 함께 곡을 만들 때부터 블랙뮤직과 비슷한 부분이 많다고 느꼈다. 첫 앨범인 ‘오늘밤 당산나무 아래서’는 무가와 밴드음악의 결합을 시도한 것이다.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음악이라고 생각했는데, 여러 장르에서 호평을 받아서 어색하기도 신기하기도 했다.
대중은 추다혜를 ‘민요 록 밴드’라고 불리던 씽씽의 멤버로 기억하고 있다. 씽씽 활동을 하며 잃은 것과 얻은 것은? 
씽씽은 내가 소속감을 가져본 첫 팀이다. 개인적 성향이 강한 내가 팀원으로서 무언가를 늘 함께하는 건 쉽지 않았다. 하지만 잃은 것보단 얻은 것이 더 많다. 특히 매번 ‘살아있는 무대’를 할 수 있었던 건 멤버들의 도움이 컸다. 씽씽을 향해 얻은 것은 크게 두 가지다. 무대를 휘젓고 다닐 수 있는 내 안에 숨어있던 ‘자유로움’을 깨달았고, 창작자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얻었다.
씽씽의 경우는 민요의 음악성을 살리려고 노력했고, 추다혜차지스 역시 무가 그대로를 담기 위해 고민이 많았다. 전통음악을 소재로 한 음악 작업에서 그 ‘고유성’을 최대한 고수해야 된다는 입장인가? 
고유성을 살리고자 하는 것은 내가 그 부분에 매력을 느껴서다. 전통을 이어가려는 의도는 전혀 아니다. 전통음악을 소재로 하는 것도 내가 좋아하기 때문이지, 국악의 대중화를 위해 애쓴 것은 아니다. 씽씽이나 추다혜차지스의 시발점은 늘 나 자신에게 있었다.
씽씽은 파격적인 무대 연출과 의상으로 주목을 받았다. 추다혜차지스도 감각적인 음반 사진이 눈길을 끈다.  
비주얼에 대해 많이 고민하는 편이다. 이번 앨범은 무당의 모습을 현대적으로 표현하고 싶었다. 무당이 ‘신과 인간의 매개체’라면, 나는 음악으로 ‘무당과 인간의 매개체’ 역할을 해보고 싶었다. 비주얼 또한 예술을 표현하는 수단이자 공연의 일부분이다. 그래서 음악을 만드는 만큼 의상에도 많은 시간을 쏟고 있다. 매번 같은 의상을 입는 것은 피하고, 감각적인 의상을 많이 구입한다. 거의 다 사비로 사기 때문에 정해진 예산 안에서 많은 노력을 한다.
직접 굿이 펼쳐지는 현장을 돌아다니며 굿을 익혔다고 들었는데.  
지인 중에 굿을 정말 잘하는 무당이 있다. 그 무당에게 평안도·황해도 무가를 배웠고, 직접 사설풀이도 들었다. 리서치 과정 중 제주도 무가 음원을 듣고 너무 좋아서 무턱대고 제주도에 내려가 칠머리당영등굿 전수소를 찾았다. 제주도는 방언이 심하고 원형이 많이 남아있어서 직접 보지 않으면 모르고 지나칠 것들이 많을 것 같았다. 하지만 내가 굿을 익혔다고 하기엔 무리다. 무가 중심으로 배운 것이기에 내가 아는 건 빙산의 일각 정도로 작은 분량이다.
굿의 사설을 참고해 직접 가사를 썼다. 창작의 고통이 심했을 것 같다. 무엇이 가장 힘들었나?  
‘사는새’ ‘리츄얼댄스’ 가사를 쓸 땐 어감이 좋거나 방언이 마음에 들면 그대로 가져와 재배열했다. ‘오늘날에야’ ‘에허리쑹거야’는 원래 있던 가사에 내 생각을 덧댔다. ‘차지S차지’는 후렴구 외에는 다 새롭게 썼다. 대중이 가사를 어디까지 공감할 수 있을지 지속적으로 고민됐다. 앞으로는 내가 하고 싶은 말 위주의 가사가 될지도 모르겠다. 모쪼록 앞으로도 밸런스를 잘 맞춰가며 작업해 나갈 예정이다.

지난 3월에는 ‘몽금포’, 7월에는 ‘싸름’이라는 서도민요 싱글앨범을 발표했다. 서도민요와 무가를 대하는 마음의 자세가 좀 다른가?  
무가나 민요는 모두 사람의 마음을 만지는 소리다. 그런데 무가는 신에게 빌어서 인간의 마음을 풀어주는 특징이 있다. 누구나 부르는 노래가 아닌, 무당이라는 직업을 가진 이들의 노래여서 정해진 절차나 형식이 있다. 그에 비해 민요는 캐주얼하다. 현재 서도민요 프로젝트는 ‘추다혜’로, 무가 프로젝트는 ‘추다혜차지스’로 활동하고 있다. 서도민요 싱글앨범은 계절별로 민요를 구성해 제작했고, 올 10월에도 한 곡 더 발표할 예정이다.
21세기 아티스트에게 가장 필요한 기량은 무엇일까? 
개성, 즉 ‘자기다움’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곧 ‘매력’이다. 사람은 다 다르기 때문에 분명 자신만의 매력이 있다. 결국 그것이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예술로 표출된다.
현재는 여러 가지 이유로 국악밴드가 다양하게 혹은 무분별하게 많이 배출되고 있다. 주류 음악시장으로 진입하기 위해선 무엇을 갖춰야 한다고 보는지? 
이런 질문은 어렵다. 사실 나는 주류 음악시장에 진출하고자 음악을 시작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선 본인이 원하는 것이 정말 무엇인지를 깨닫는 것이 중요할 듯하다. 나는 개인적 성취가 있어야 대외적 성취도 기쁜 사람이기에 여태 내가 좋아하는 것을 쫓으며 살아왔다. 유행처럼 번지는 것에 편승하지 않고, 좋아하는 것에 확신을 가지면 좋겠다. 그런 확고함은 무대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장혜선 기자 사진 추다혜차지스

 

 

 

 

 

 

 

 

 

 

 

 

 

 

 

 

 

 

 

 

DISCUSSION

국악,
그 혼종의 역사

이소영 음악평론가를 통해 국악의 변천사를 살펴본다

 

21세기에 들어서면서 ‘퓨전’이란 용어가 당대 문화를 읽어내는 중요한 단서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최근에는 ‘컬래버레이션’이 더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지난 20~30년 동안 ‘크로스오버(crossover)’ ‘퓨전(fusion)’ ‘하이브리드(hybrid)’ ‘컬래버레이션(collaboration)’ 등 다양한 표현이 사용되어 왔는데, 본질적으로는 이질적인 두 요소의 결합 혹은 만남이란 의미에서 같은 현상을 지칭한다.

서로 다른 문명의 요소들이 상호 작용하는 현상은 퓨전이나 컬래버레이션이란 용어가 본격화되기 훨씬 전부터 일어난 현상이다. 한국 음악의 예만 보더라도 조선시대 궁중 연례악 중 향악기와 당악기의 혼합 편성인 ‘향당교주(鄕唐交奏)’가 있었으며, 고대에도 서역악기 및 중국악기의 수용에 따르는 음악 변화가 있었다. 해금·장고·양금 등이 당시에는 서역과 중국에서 수입된 외래 악기였으나 시간이 지나며 토착화됐다. ‘보허자’ ‘낙양춘’과 같은 악곡에서 읽혀지는 당악의 향악화 역시 넓게는 음악의 혼종화(hybridization)의 맥락 속에서 조명될 수 있기에 한국 음악 역사는 외래 음악 수용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20세기 초, ‘선양합주’와 ‘신민요’의 탄생

근현대 음악사에서 나타나는 퓨전 현상은 20세기 초반부터 찾을 수 있다. 당시 서양 선교사를 통해 찬송가나 일본 창가가 유입되면서 서양음악·일본음악이 한국 전통음악과 섞이는 현상이 시작됐다.

20세기 초반 전통음악(鮮)과 외래음악(洋)의 대표적인 컬래버레이션은 ‘선양합주(鮮洋合奏)’를 들 수 있다. 1930년대 중반의 유성기 음반 중에는 지금의 시선에서 바라보아도 매우 혁신적인 컬래버레이션 작업의 결과물들이 상당수 발견된다. ‘계락’ ‘환계락’ ‘편수대엽’과 같은 전통 가곡을 단소와 첼로 합주 위에서 노래하거나, ‘노랫가락’ ‘도라지타령’ ‘양산도’ 등의 경기민요를 클라리넷·탬버린·바이올린 등의 기악 반주 위에서 경기민요 가창자들이 노래하는 시도들이 바로 그것이다. 당시 ‘가야금+바이올린’ ‘단소+바이올린’ ‘단소+기타+첼로’ 등 2~3개의 양·국악기의 합주로 된 선양합주는 1934년 동아일보(4월 20일자)에 의하면 “조선 고악을 신시대에 적합하도록 편곡화”하려는 시도였다. 이를 통하여 전통의 현대화 관점에서 전통음악을 서양 악기로 편곡하려는 음악하기(musicking)가 일제강점기에도 현저했음을 알 수 있다.

그중 김갑자·김갑순이 한 팀이 되어 가야금과 바이올린 2중주로 편곡한 전통 성악곡을 들어보면 김갑자의 가야금 병창과 김갑순의 바이올린, 한성준(1874~1942)의 장고 반주 형태로 되어있음이 확인된다.

선양합주를 선도했던 전통음악가 중 가장 활발했던 명인은 이병우(1908~1971)였다. 그는 단소 연주로 바이올린·기타·첼로 등과 소규모 실내악 합주에서 협업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음반 산업이 발전했던 1930년대 중반에는 오케선양교향악단(오케레코드)의 전속으로 신민요의 선양합주에서 피리 연주 대부분을 도맡았다. 이왕직아악부 양성소 1기생이었던 이병우는 피리 외에도 양금·단소·태평소 등 전통악기는 물론 클라리넷·색소폰·플루트 연주 솜씨도 일품이었다고 전해진다. 태평관현악단에는 피리 주자로 고재덕(1889~1950)이 참여했다. 이렇듯 각 음반사는 콜럼비아선양합주단·오케선양교향악단·포리도루조화악단 등 다소 큰 규모의 실내악단 속에 피리·단소·가야금 등 전통 선율악기와 화성·리듬을 담당하던 양악기군을 혼합 편성해 신민요 반주에 애용됐다. 해방 후 남한의 한양합주(선양합주의 후신)와 북한의 배합관현악단의 초기 모델은 일제강점기 시절에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다.

‘노들강변’(신불출 작사·문호월 작곡)의 히트 이후 수많은 인기곡을 낳은 ‘신민요’는 1930년대 유행하던 민요풍의 대중가요다. 당시 유행가(=트로트)와 함께 쌍벽을 이룬 대중가요의 주류 장르였다. 지난 100여 년 동안 민요풍의 음악 양식으로 된 장르 중 그 어떤 시도도 당시 신민요만큼 대중매체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한 예는 없었다. 이러한 인기는 소위 ‘기생가수’로 불리는 일군의 신민요 스타들의 부상에 힘입었다. 박부용(1901~?)·왕수복(1917~2003)·선우일선(1918~1990)·이은파(?~1939)·이화자(1918~1950)·김복희(1918~?)·장일타홍(1936~1944) 등 권번 출신 기생들은 음반사와 전속 계약을 맺고 레코드 가수로 활동했다. 이들은 경서도소리의 시김새와 토리를 바탕으로 혼종적 대중가요풍 민요를 불렀기에 양악과 국악의 결합에 있어 전통적 질감을 유지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원이 됐다. 1930년대 기생가수들이 발산하는 목소리의 전통성 및 토리적 고유성은 21세기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는 이희문을 비롯한 창자 중심의 컬래버레이션 특징과 본질적으로 맞닿아 있다.

해방 이후 신민요는 대중가요계와 국악계로 이분되어 1960~1970년대까지 양산됐다. 먼저 대중가요계를 보면, 황정자를 비롯한 신민요 대중가수들은 1930년대 신민요를 리바이벌하거나 ‘아리랑맘보’ 등과 같은 새로운 신민요를 불렀다. 나아가 김세레나(1947~)의 ‘남원산성’처럼 통속민요를 한양합주(선양합주의 후신) 반주 편성 위에 혼종화 하는 방식으로 존속됐다.

국악계에서는 문호월(1908~1952) 작곡의 ‘노들강변’과 ‘관서천리’, 정사인(1881~1958) 작곡의 ‘태평가’, 이면상(1908〜1989) 작곡의 ‘울산아가씨’, 김교성(1904~1961) 작곡의 ‘궁초댕기’ 등 경서토리 특성이 잘 살아있는 신민요를 경기명창들이 전승하거나 ‘성주푸리’ ‘강강수월래’ 등의 통속민요를 한양합주 반주 위에 혼종화시켜 내는 방식으로 신민요를 재생산했다. 1930년대 신민요가 경서도창 중심으로 이루어진 데 비해 1960년대 신민요는 남도창이 가세했다는 차이점이 있으나, 기악 반주 스타일면에서는 선양합주가 한양합주로 이름만 바뀌었을 뿐 본질적 속성은 비슷하게 유지됐다.

신생 장르 ‘국악가요’의 등장

1970년대 이후 한양합주에 의한 신민요 유행은 쇠퇴하고 대중음악계에서는 전통 재료를 소재로 하는 움직임은 더 이상 큰 흐름을 형성하지 못했다. 국악계는 소규모 실내악단 반주와 함께 창작된 노래가 새롭게 나타나는데 ‘국악가요’라는 신생 장르가 바로 그것이다.

국악가요의 시발은 김영동(1951~)의 노래 작업으로 이루어졌다. 원래 대금연주가였던 김영동은 1978년 12월 국립극장에서 ‘누나의 얼굴’ ‘개구리 소리’ 등을 발표하는데 이 노래들은 1980년대 민중가요로도 수용됐다. 영화음악 주제가 ‘어디로 갈꺼나’, 연극음악 ‘한네의 이별’, TV 드라마 주제가 ‘삼포 가는 길’ 등이 인기를 끌면서 김영동 작업은 1980년대의 국악가요와 실내악단의 퓨전 양식을 선도하게 된다.

1980년대 중반부터 국악실내악단 슬기둥도 개인의 실험에 그치지 않고 국악계의 새로운 트렌드를 만드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채치성(1953~) 작곡의 ‘꽃분네야’ ‘산도깨비’ ‘소금장수’ 등의 히트곡을 내는데 특히 ‘꽃분네야’는 음악교과서에도 실릴 만큼 당시 국악가요의 인지도를 높였다. 슬기둥의 악기 편성은 피리·해금·소금·기타·신디사이저 등으로 이루어지는데 이는 서양의 3화음 체제 위에 국악적인 선율이 얹어지는 형태로서 양·국악 혼용의 선조였던 1930년대 선양합주 및 1960~1970년대의 한양합주와 일정한 연계성을 갖는다. 한편 1990년대 이후 더욱 광범해지는 퓨전 국악 밴드의 기본적 꼴을 제시하고 있기에 국악가요 반주 편성은 1990년대의 퓨전 국악의 원조에 해당한다.

슬기둥에 이어 실내악단 어울림도 ‘검정고무신’ 등의 인기곡을 내면서 기타 반주의 단순한 3화음과 가야금, 대금이 주선율을 맡는 기악 편성이 국악실내악의 새로운 전범으로 자리를 잡게 되는데 일조했다.

국악가요는 흔히 민요풍의 가요나 노래로 정의되는데 음악적 측면에서는 느린 템포의 중모리장단 위에서 메나리토리나 단조 5음음계(라-도-레-미-솔)의 선법으로 선율이 전개되어 밝고 흥겨움에 기반한 1930년대 신민요와 구별됐다.

민요 리바이벌의 본격적 시작

1990년대 들어서도 황의종(1952~)의 작곡집, 김영동의 명상음악 등이 꾸준히 발매됐으나 초기 히트곡을 넘어선 인기를 얻지는 못했다.

1990년대 후반 국악가요를 대체하는 새로운 노래 작업의 시작은 소리꾼 김용우(1968~)에서 비롯되었다. 김용우는 정가와 민요를 두루 전수받은 뒤 1집 ‘지게소리’ 이후 수많은 정규 음반을 내면서 민요 이수자를 넘어서 새로운 개념의 소리꾼으로 입지를 세웠다. 그는 1집에서 피아노·바이올린·신디사이저 등 양악기와 단소·해금 등 전통악기를 함께 편성하고 산뜻한 감각의 아카펠라 중창단이나 합창단이 뒷소리를 받게 하는 등 새로운 시도를 했다. 이러한 시도는 창작민요가 아닌 기존에 존재하던 향토민요를 현대적인 감각으로 재구성하여 도시 대중에게 알렸다는 데서 주목을 받았다. 재즈와 민요를 섞는 작업, 현악 4중주와의 만남, ‘어부사’ ‘유산가’ 등 가사나 잡가, 향토민요 등의 전통 성악 전반을 아우르며 퓨전 기악 반주로 재구성한 사례는 1930년대 신속요에서 극히 일부 시도되었다 중단되었던 음악하기였다. 그러므로 김용우의 이러한 작업은 이후 국악아카펠라 토리스·이희문과 놈놈·이날치·악단 광칠 등의 전통성악 리바이벌을 20년 정도 앞서 예비한 시발점이라 할 수 있다.

국악가요가 단순한 5음음계와 화성, 표피적인 시골 이미지의 단순 복제로 인하여 초기 히트곡 이후 매너리즘에 빠진 것과는 달리 기존 전통 소리를 발굴해서 이를 외래적 요소로 음악적 각색을 이루는 작업은 소리꾼의 몸과 목소리에 저장된 전통의 유산을 직접 활용한다는 측면에서 음악적인 설득력과 높은 예술성을 담보하고 있기에 지속 가능한 작업으로 여겨진다.

국악과 재즈의 만남

1980년대 이후 국악의 새로운 흐름은 ‘국악+재즈’에서 발견된다. 대표적인 시도는 김덕수(1952~)·이광수(1952~)·안숙선(1949~)·김석출(1922~2005)과 같은 민속악 계통의 명인들과 재즈 그룹 레드선의 볼프강 푸쉬닉(1956~), 린다 샤록(1947~), 일본 재즈 뮤지션 사이토 데츠(1955~), 이타바시 후미오(1949~) 등의 협업이 그것이다.

이들의 융합은 창작보다는 기존의 전통 재료를 새롭게 각색해 제3의 연주를 만들어내는데 주력했고 악보에 의존한 작·편곡을 하지 않은 채 현장성과 가변성을 바탕으로 한 즉흥연주로 전통 악곡을 새롭게 재구성하는 특징을 보였다. 특히 앨범 ‘난장 뉴호라이즌’에서는 김덕수패 사물놀이와 레드선의 공동작업에 구준엽의 랩, 안숙선의 판소리, 강권순의 정가 구음이 가세한다. 전통장단을 바탕으로 판소리와 정가가 재즈와 만나는 작업은 21세기 이날치 같은 밴드들이 시도하는 흐름을 매우 높은 완성도와 함께 선도적으로 보여준 시도라 할 수 있다.

국악과 재즈의 만남은 크게 두 개의 흐름으로 분화됐는데 하나는 좀 더 아방가르드 한 작업으로서 프리뮤직 계열의 즉흥성과 우연성을 최대한 살리면서 명인 개개인의 비르투오소적인 특성에 초점을 맞추는 작업이다. 다른 하나는 형태가 분명한 노래나 형식에 기초하여 보다 대중적인 작업을 시도한 것이다. 전통노래와 장단이 재즈 화성과 선율로 덧입혀지는 방식을 의미한다.

전자의 대표적인 시도는 강태환(1944~)·김대환(1933~2004)·강은일(1967~)·유경화(1967~)·허윤정(1968~)·원일(1967~) 등이 중심이 되어 프리뮤직 혹은 프리재즈 필드에서 컬래버레이션을 이룬 작업으로 조성에서는 무조적이고, 리듬 면에서는 불규칙한 프리리듬이 특징을 이루는데 현대음악적인 협업 작업은 최근에는 거의 흐름이 끊겼다고 볼 수 있다. 후자들은 재즈에 국한되지 않고 다양한 외래적 요소, 특히 대중음악 어법을 주로 사용하면서 21세기에 우후죽순처럼 증가한 퓨전 밴드들이 여기에 속한다.

최근의 트렌드는 어떨까?

최근 20년 동안 국악계 생태계의 가장 큰 특징은 ‘컬래버레이션’이라는 이름으로 퓨전을 시도하는 개인이나 밴드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급성장했다는 점이다. 강은일 해금플러스, 뉴에이지그룹 그림, 월드뮤직그룹 공명, 바이날로그, 스톤재즈, 놀이터, 상상, 바람곶 등이 퓨전음악을 대중화하거나 반대로 고급화하는데 일조했던 그룹으로 꼽힌다.

현재는 월드뮤직 시장과 국악의 세계화를 이끄는 선두그룹으로 이희문과 놈놈, 블랙스트링, 잠비나이, 이날치 등이 주목받고 있다.

그중 이희문(1976~)의 음악은 경기소리(잡가와 민요)의 원형을 훼손하지 않는 토리와 시김새를 최대한 계승하면서도 이를 전달하는 연행 방식에서는 클럽 문화의 제반 전략을 재치 있게 접목하고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최근 급부상하고 있는 그룹 이날치 역시 경서도 잡가나 민요, 판소리 등 전통성악 원형을 살리면서도 리듬과 춤을 재구성하여 비트감을 살린다. 그 위에 스탠딩 방식의 클럽 문화가 갖는 유흥적·놀이적 특성을 도시적이면서 유쾌 발랄한 무드로 더해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양·국악 혼합 편성은 아니지만 악단광칠의 경우에도 경서도소리나 남도의 판소리 가창 방식으로 잘 훈련된 보컬리스트의 음악적 질감 위에서 특정 악구가 짧은 단위로 반복되는 후크송의 중독성, 경쾌한 리듬과 가수들의 춤이 유기적으로 잘 결합된 것이 성공의 요소로 여겨진다.

이희문과 이날치 등 전통 성악을 재구성하는 이러한 움직임이 새로운 주류 장르로 정착되기 위해서는 더 많은 노래가 생산되어 대중에게 인기를 얻어야 할 것이다.

글 이소영(음악평론가)

 

국악,
대중음악의 소재가 되다

김학선 대중음악평론가를 통해 대중음악에서 활용된 국악의 흐름을 살펴본다

“우리의 것은 소중한 것이여” 박동진 명창이 한 광고에서 한 이 말은 오래도록 대중의 기억에 남았다. 우리의 것이 소중하다는 걸 모르는 채 살았기 때문에 그 말이 더 깊게 다가온 건지도 모르겠다. 광고가 처음 방송된 해는 1992년, 이듬해인 1993년 가요계에선 한 곡의 노래가 나라를 또 한 번 흔든다. 그룹 ‘서태지와 아이들’이 2집을 들고 ‘컴백’한 것이다.

서태지와 아이들, 국악을 대중에게 환기시키다

서태지와 아이들

 

 

 

 

 

 

 

 

 

 

 

 

 

 

1992년 서태지(1972~)와 아이들의 등장 이후 가요계는 시스템 자체가 바뀌어 버렸다. ‘혁명’이라는 표현을 써도 될 정도다. 서태지와 아이들은 1집의 엄청난 성공 이후 새 앨범 준비를 위해 휴식기를 갖겠다고 선언했다. 이는 그간 가요계에선 상상도 못했던 일이다. ‘가왕’ 조용필(1950~)도 그러진 못했다. 1980년대의 조용필은 너무 바빴지만 휴식 같은 건 엄두를 못 내고 그저 한 장의 앨범을 자신이 주도해서 만들면 그 다음 앨범은 기성 작곡가에게 많은 곡을 받는 걸로 스케줄을 관리했다. 지금은 너무나 당연한 것처럼 인식되고 있는 ‘컴백’ 시스템을 처음 도입해 1집 이후 첫 번째 컴백을 한 것이다.

컴백이란 방식도 놀라웠지만 서태지와 아이들이 들고 나온 음악은 더 놀라웠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1집에서 들려준 랩 댄스 음악은 더욱 확장된 형태로 발전했다. ‘난 알아요’나 ‘환상 속의 그대’와는 또 다른 음악이었다. 새 앨범 준비를 위한 휴식기 동안 서태지는 계속해서 고민했다. 그렇게 탄생한 음악이 ‘하여가’였다. “우리 것은 소중한 것이여”라는 1년 전 박동진 명창의 말은 ‘하여가’를 통해 현실화되었다. 이방원의 시조 제목에서 따온 ‘하여가’라는 제목부터 ‘우리 것’에서 가져왔지만 음악은 더 구체적이었다. 서태지는 1집에서 들려준 랩 댄스 음악에 스래쉬 메탈을 적극적으로 차용했고, 여기에 강렬한 태평소 소리를 삽입했다. 태평소를 연주해 준 이는 김덕수 명인이었다. 큰 사명감은 아니었다. 서태지는 그저 ‘우리 것(악기)’을 자신의 음악에 넣어보고 싶었다.

처음부터 태평소는 아니었다. 그는 다양한 국악기를 얹어보았다. 징·꽹과리·태평소 등을 만든 음악에 대입시켜보았고, 신디사이저 소리와 태평소 소리의 주파수 대역이 맞는다는 판단으로 태평소를 선택했다. 사운드를 주도하는 스래쉬 메탈은 헤비메탈 음악 가운데 가장 극단적인 형태의 음악이다. 태평소 또한 소리의 강렬함으로는 어떤 악기에도 뒤지지 않는다. 이런 강렬한 두 사운드를 가지고 서태지는 새로운 형태의 록 음악을 만들었다. 말하자면 그는 일찌감치 ‘얼터너티브 국악’을 만든 것이다.

돌이켜 생각해봐도 ‘하여가’가 그처럼 대중적인 인기를 얻고 가요 순위 프로그램 1위까지 차지한 건 놀라운 일이다. 단언컨대 ‘하여가’는 절대 대중적인 음악이 아니다. 충분히 난해하고 충분히 실험적인 음악이었다. 대신에 신선했다. 한국 대중음악에서 한동안 잊혔던 우리 악기를 꺼내들고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하여가’가 그만큼 큰 인기를 얻었던 건 서태지와 아이들이라는 이름값이 주는 기대가 가장 크게 작용했겠지만, 신선함과 함께 서태지가 치열하게 고민한 조화로움 때문이기도 했다. 서태지는 ‘국악’ 혹은 ‘국악기’를 대중에게 환기시켰다.

그 이전의 구도자들

서태지와 아이들 이전에 이런 ‘국악가요’가 없었던 건 아니다. 대표적으로 1970년대부터 활동해온 김태곤(1950~)이 있다. 그는 1977년 발표한 첫 앨범에서부터 ‘송학사’나 ‘망부석’ 같은, 제목에서부터 음악을 짐작할 수 있는 노래로 큰 사랑을 받았다. 어릴 때부터 기타와 장구를 같이 배운 그에게 양악과 국악은 자연스레 함께 갈 수 있는 것이었다. ‘하루 이틀 사흘’ 같은 포크 스타일의 곡에서도 그는 억양과 정서만으로도 서양의 음악과는 다른 무드를 만들어냈고, 1981년 발표한 앨범 ‘바람 속에 님의 숨결이…’에선 독특한 국악 스타일을 담고 있는 아트록 음악처럼 들리게 했다. 음악을 넘어 도포를 입고 삿갓을 쓰고 다니며 그는 ‘삿갓가수’라는 캐릭터까지 만들어냈다.

그는 자신의 곡을 다른 가수에게 주기도 했는데, 송골매(1979년 결성)는 그가 만든 ‘바람’을 다시 부르며 일종의 ‘건전가요’처럼 활용했다. 배철수(1953~)가 부른 노래는 마치 맞춤한 것처럼 잘 어울렸는데, 이는 배철수가 송골매의 전신인 활주로 시절부터 ‘한국적인’ 록 음악을 만들어왔기 때문이다. 아직까지도 한국적인 록 음악을 찾는 이들이 있지만, 나는 활주로/송골매 시절에 이미 한국적인 록 음악은 완성됐다고 생각한다. 당시는 이른바 ‘미제(국주의)’에 맞서 한국의 전통을 지켜야 한다는 의식이 대학생들 중심으로 널리 퍼져있었고, 활주로는 비록 미제의 록 음악을 하고 있었지만 이런 인식에서 어느 정도는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또한 활주로에는 고등학생 때부터 ‘청구영언’ 같은 시집을 읽던 독특한 청년들이 있었다. 그런 여러 상황이 더해져 ‘탈춤’ ‘세상만사’ ‘승무(살풀이)’ 같은 노래가 만들어졌다.

같은 대학생 캠퍼스 밴드 출신으론 작은거인의 김수철(1957~)도 있었다. 송골매의 명발라드 ‘모두 다 사랑하리’를 만들어주기도 한 김수철은 자신의 밴드인 작은거인 2집의 첫 곡을 국악발라드 ‘별리’로 장식한다. 이 절절한 이별곡은 서양 악기인 기타 반주가 깔리는 곡이지만 마치 창을 하듯 노래하는 김수철의 보컬이 이 노래를 국악과 양악 어디쯤에 자리하게 만든다. 작은거인 2집을 통해 하드록의 끝을 보여줬던 김수철은 이후 ‘서편제’ ‘태백산맥’ ‘노는 계집 창’ 등의 영화음악 작업과 ‘황천길’ ‘팔만대장경’ 같은 앨범을 만들며 ‘접목’이란 표현이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일가를 이룬다.

이런 시도는 197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꾸준히 있어왔다. 신중현과 엽전들(1974년 결성)의 ‘미인’ 기타 리프가 가야금의 농현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는 건 유명한 사실이다. 그보단 덜 알려졌지만 같은 앨범에 수록된 ‘나는 너를 사랑해’는 우리의 상여소리에서 따온 노래다. 비슷한 느낌을 가진 산울림(1977년 결성)의 ‘떠나는 우리 님’ 역시 상여소리에서 아이디어를 가져왔고, 그보다 먼저 발표한 ‘청자(아리랑)’은 아리랑 멜로디에 사이키델릭 사운드를 입힌 신선한 시도였다. 신중현과 산울림의 음악이 외국 음반 수집가들의 표적이 되는 건 이런 독창성과 신선함 때문이다.

기타리스트 김도균(1964~) 역시 빼놓을 수 없는 국악의 구도자이다. 그는 1988년 발표한 솔로 앨범 ‘Center Of The Universe’에서 ‘쾌지나 칭칭나네’를 록 스타일로 편곡해 실었고, ‘아리랑’ ‘밀양아리랑과 새타령’에선 기타를 가지고 실제 가야금처럼 연주한다. 그는 오래전부터 헤비메탈의 리듬이 국악과 닮아있다는 생각을 하며 오랜 시간 연구했고, 2002년 김도균그룹 이름으로 발표한 ‘정중동(靜中動)’은 그 연구의 완성형이었다. 김도균 뿐 아니라 헤비메탈 신(scene)에서도 국악에 대한 고민은 계속 이어졌다. 블랙 메탈 밴드인 새드 레전드와 오딘은 적극적으로 국악기를 사용하고, 음악 특성에 맞게 ‘한(恨)’의 정서를 음악에 녹여냈다.

월드뮤직, 새로운 영감이 되다

이런 다양한 시도는 1990년대에 접어들며 점점 활력을 잃는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하여가’가 신선하게 받아들여졌던 건 그만큼 그런 시도가 드물었기 때문이다. 또한 1990년대는 한국 대중음악의 황금기라 불리던 시대였다. 서태지와 아이들을 비롯해 신해철(넥스트)·듀스·윤상·015B·유희열(토이) 등 신세대 아티스트가 대거 등장하던 때였다. 이들의 목표는 자신들이 듣고 자란 팝 음악을 수준 높게 재현하는 데 있었다. 우리 것이 좋은 건 알고 있었지만, 굳이 그걸 할 이유가 없었고 더 솔직히는 우리 것보단 서양의 것이 더 좋게 느껴지던 시절이었다. 1990년대에도 국악은 월드뮤직으로 분류되곤 했지만, 이현도(듀스)에게 월드뮤직은 자메이카 음악이 더 친숙했고, 윤상에겐 브라질 음악이 더 친숙했다.

송창식(1947~)은 젊은 시절 음악을 하며 두 번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한 번은 전주대사습놀이를 보다가, 또 한 번은 AFKN 방송을 보다 흑인 병사가 노래하는 모습을 보다가 충격을 받았다. 국악에 대한 충격이 한 번 큰 자극을 주었다면, 흑인 병사의 노래를 들은 뒤론 아마추어보다도 노래를 못한단 생각에 그때부터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음악을 파기 시작했다. 그게 지금 국악과 트로트와 양악이 한데 섞여있는 음악이다. 이를 위해 엄청난 공부가 필요했다.

하지만 시대는 변했고 동경하는 대상도 바뀌었다. 비록 아마추어 흑인 병사보다 노래를 못할지라도 그가 부른 노래와 같은 수준의 음악을 만드는 걸로 충분했다. 부쩍 ‘레퍼런스’란 말이 자주 들리기 시작한 게 1990년대 중반 이후부터였다. 그런 시절에도 이상은(1970~)의 ‘공무도하가’(1995)나 장사익의 ‘하늘 가는 길’(1995) 같은 국악이 배경이 되는 수준 높은 앨범이 간헐적으로 발표됐다. 그 뒤로 가야금으로 연주하는 ‘사계’ 같은 이른바 ‘크로스오버’가 2000년대 등장했지만, 감히 말하자면 그건 ‘퇴행’이었다.

앞서 ‘간헐적’이란 표현을 썼지만 난 한국 대중음악 역사는 아쉽게도 단절의 역사라고 생각한다. 국악을 배경으로 만든 음악들 역시 단절의 연속이다. 지금껏 열거한 아티스트의 작업물은 모두 개인의 탐구심과 치열한 연구를 통해 탄생한 작품이다. 누군가의 영향을 받았다거나 어떤 흐름이 이어졌다거나 하는 건 없다. 말하자면 이건 ‘신(scene)’이라고 부를 만한 것도 아니고, 유행이라고 할 만한 것도 아니다. 원고에서 언급하지 않은 많은 아티스트가 있겠지만 그들의 이름이 추가된다 해도 끊어져 있는 흐름이 이어지진 않을 것이다.

그래도 하나의 ‘움직임’이라고 부를 수 있는 현상이 만들어진 건 비교적 최근이라 할 수 있다. 과거와는 달리 국악을 전공한 아티스트가 멤버로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서구의 대중음악과 결합하며 월드뮤직으로 분류되는 음악이 완성된다. ‘하여가’가 신선했던 것처럼 이제 ‘얼터너티브 국악’에 세계인이 신선해한다. 온라인 시대에 외국과의 접점은 더 용이해졌다. 9년 전 잠비나이의 네이버 온스테이지 영상을 보며 신선해하던 외국인의 수보단 작년 이날치의 온스테이지 영상을 보면 신선해하는 외국인의 수가 훨씬 더 늘은 건 자명하다.

얼터너티브 국악, 상업성을 확보하려면?

씽씽

 

 

 

 

 

 

 

 

 

 

몇몇의 음악 페스티벌과 전국투어로 6개 도시를 돌면 끝이 나는 한국 음악시장보다 광대한 외국 음악시장이 더 끌리는 건 당연한 일이다. 매해 해외 투어를 하는 잠비나이나 ECM과 계약한 니어 이스트 쿼텟(NEQ)을 보며 자극을 받은 이들도 생겨났을 것이다. 해외 활동에서 중요한 건 당연하게도 에이전트의 역할이다. 잠비나이가 지금처럼 성공적인 투어를 벌일 수 있었던 배경에는 해외 투어 에이전시를 맡은 네덜란드 회사 ‘어스 비트’의 제롬 윌리엄스 대표가 있었다. 제롬 윌리엄스는 잠비나이의 음악적 특성을 파악하고 잠비나이에게 어울리는 페스티벌 무대를 연결하는 것에 많은 공을 들였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국악을 기반으로 하는 팀은 아니지만, 해외 활동을 활발히 하고 있는 부산의 서프 록 밴드 세이수미 역시 해외 프로모션을 할 땐 국내 레이블과는 다른 유럽 부킹 에이전시와 함께 일한다. 영미권에 맞는 홍보 방식을 정하고 프로모션을 준비한다. 엘튼 존과 조 엘리엇(데프 레파드)이 자신의 채널에서 세이수미의 음악을 소개한 건 이런 준비가 있어서였다. 씽씽에 이어 이날치를 홍보하고 있는 잔다리컬처컴퍼니는 오랜 시간 홍대에서 ‘잔다리 페스타’을 개최하며 해외의 많은 음악관계자와 교류해왔다. 씽씽이 ‘NPR 타이니 데스크 콘서트’에 출연할 수 있었던 건 이런 배경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아티스트의 음악을 잘 이해하고, 이를 실현시킬 수 있는 에이전트의 존재 유무는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만큼 중요하다.

물론 가장 중요한 건 음악이다. 3년 전 인터뷰를 위해 만났던 장영규(이날치)의 말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다. “신기하다고 봐주는 건 일회성이라며 그들이 평소에 듣던 음악처럼 만들어야 한다”는 취지의 말이었다. 생각해보면 지금 해외에서 좋은 반응을 얻고 있는 음악은 장영규의 말과 같다. 잠비나이의 음악은 포스트록이나 익스페리멘탈로 인식된다. ECM에서 아르메니아의 전통음악을 전달하는 피아니스트 티그란 하마시안(1987~)처럼 NEQ는 국악이 더해진 새로운 재즈 음악을 ECM 애호가들에게 알리고 있다. 이날치에서 소리꾼의 소리를 뺀다면 음악은 그루브가 넘실대는 영락없는 팝 사운드이다. 오랜 단절의 시간을 지나 이제야 하나의 흐름이 만들어지고 있다. 좋은 음악, 대안으로서의 가능성, 실질적인 해외 진출 의지, 그리고 원고에서 가장 많이 언급했을 신선함, 이 모든 것이 더해질 때 얼터너티브 국악은 오랜 시간 머물러있던 한국을 벗어나 그 영토를 더 넓힐 수 있을 것이다. 우리 것은 과연 좋은 것인가. 분명한 건, 우리의 것을 찾는 이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글 김학선(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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