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공연계를 움직이는 TOP 매니지먼트 CEO 14인
팬데믹 후 우리가 꿈꾸는 부활
이번 기획은 국내 클래식 음악 산업에 대한 궁금증에서부터 시작됐다. 클래식 음악 산업을 위한 제대로 된 법 하나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이야기에, 우리보다 먼저 이 길을 걸어온 해외 매니지먼트계의 상황은 어떤지 궁금해졌다. 코로나의 여파로 휘청이는 국내 기획사들을 보며, 우리가 가야 할 방향성을 오랜 역사와 더 큰 시장 속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기획사들과 이메일을 주고받던 중, 90여 년 역사의 미국 컬럼비아 아티스트 매니지먼트가 문을 닫았다는 소식이 들렸다. 이 소식은 코로나로 힘든 시기를 버텨내고 있는 전 세계 에이전시와 아티스트에게 커다란 충격이었다. 다시 그들에게 이메일을 보내 물었다. “당신의 회사는 안녕한가요?”
글 이미라 기자
KD Schmid · since 1959
독일 · KD 슈미트
코닐리아 슈미트 Managing Director
미래를 향한 열쇠
| 주요 아티스트 |
조성진(피아노), 카티아 부니아티슈빌리(피아노),
요요 마(첼로), 안드리스 넬손스(지휘),
발레리 소콜로프(피아노), 우치다 미츠코(피아노)
KD 슈미트(Konzertdirektion Schmid)의 역사는 195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회사의 창립자인 한스 울리히 슈미트는 피아니스트를 꿈꾸던 청년이었다. 공부를 마친 그는 우연한 기회로 독일 함부르크의 스타인웨이(Steinway & Sons)에서 일하게 된다. 매장 지하에서 작은 콘서트를 개최하며 피아니스트 칼 엥겔 같은 연주자들과 친분을 쌓았다. 그러면서 연주자들의 고충을 그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지켜보기도 했다.
그러던 중 그는 마침내 자신의 회사를 설립하기로 마음먹는다. 대표의 교감 능력 덕인지 KD 슈미트는 초창기부터 피아니스트 알프레드 브렌델, 소프라노 헬렌 도나트, 작곡가 피에르 불레즈, 지휘자 존 바비롤리와 게오르그 솔티, 크리스토프 에셴바흐 등과 계약할 수 있었다.
60년이 흐른 지금, KD 슈미트는 그의 딸인 코닐리아 슈미트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 학업을 마친 코닐리아는 런던의 해럴드 홀트(Harold Holt)와 암스테르담의 인터래티스츠(Interartists)에서 실무 경험을 쌓은 후, 1986년부터 KD 슈미트에 합류했다.
KD 슈미트는 가족 기업의 좋은 예로 자주 언급되던데.
우리 회사는 다른 주주를 두지 않고 지금까지 가족 사업으로 이어가고 있다. 나는 아버지 덕에 클래식 음악을 늘 가까이하며 성장했다. KD 슈미트의 유산을 이어가기 위해 독일과 영국 문화에 숙달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30년 동안 여러 도전으로 경험을 쌓은 뒤, 1994년 경영을 이어받았다.
어린 시절, 당신이 지켜본 아버지는 어떤 사람이었나?
아버지는 자수성가형으로, 새로운 아티스트 발굴에 사명감을 갖고 일하였다. 회사 초창기부터 주요 음악가들을 설득하는 탁월한 능력을 보였고, 음악에 대한 깊은 지식까지 겸비하였다. 지금보다는 수직적인 구조로 회사를 운영했지만, 실험적인 혁신을 즐거워하셨다.
아버지 대에서부터 이어가고 있는 회사의 유산은?
아버지는 나에게 회사가 쌓아온 유산을 꼭 지켜야 된다는 메시지를 남겼다. 우리는 신뢰와 정직을 기반으로 예술가들에게 헌신하고자 한다. 아티스트 모두에게 충분한 관심을 갖기 위해 부티크(Boutique) 스타일을 지향하고 있다. 회사 규모에 비해 적은 수의 소속 아티스트를 둔 편이다.
KD슈미트는 SNS와 홈페이지를 통해 소속 아티스트의 다양한 활동을 전하고 있다.
KD 슈미트의 주요 업무는 소속 아티스트와 오케스트라의 경력을 관리하는 것. 아울러 홍보는 물론 소셜 미디어 활동까지 적극적으로 권장한다. KD 슈미트는 1968년부터 사내 잡지까지 발행하고 있어 흥미롭다. 창간호에는 소속 아티스트 에셴바흐의 미국 데뷔에 대한 기록이 담겨 있다.
현재는 하노버와 런던, 베를린 등 세 개의 사무실에서 35명의 직원이 의욕적으로 일하는 중이다. 회사를 이루는 네 개의 줄기는 아티스트 관리 부서, 오케스트라 투어 부서, 홍보 부서, 특별 프로젝트 부서이다. 본사인 하노버에서는 주로 오케스트라 투어와 홍보가 이루어지고 있다. 1998년에 설립된 런던 사무실은 활기찬 웨스트엔드 중심부에 위치해 있는데, 이곳에서는 맞춤형 아티스트 관리(부티크 스타일)를 진행한다. 2016년에 설립된 베를린 사무실에선 주로 젊은 아티스트 개발에 초점을 두고 있다.
회사에 한국인 직원도 있는가?
아직까지 한국인 직원은 없다.
회사에서 선호하는 인재상이 궁금한데.
음악 전공자이면 도움이 될 순 있겠지만, 채용할 때 꼭 필요한 기준은 아니다. 이미 우리 회사에는 음악에 대해 충분한 지식을 가진 직원이 많다. 대신 이 일을 사랑할 수 있는지, 예술가와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 조직 생활에 잘 적응할 수 있는지가 중요하다. 그리고 외국어 실력도 필수.
하노버는 KD 슈미트가 시작된 곳이다. 이후 베를린과 런던에 사무실을 둔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
런던에는 유럽 주요 음악 기획사가 위치해있다. 또한 선도적인 오케스트라 협회들의 본거지이기도 하다. 국제 네트워크를 강화하고 아시아 시장에 대한 접근을 위해 런던 사무실을 만들었다. 베를린은 독일 통일 이후 클래식 음악과 미디어의 중심지가 되었다. 베를린을 선택한 건 자연스러웠다.
KD 슈미트의 특이점은 오케스트라 투어를 관리하는 부서가 체계적으로 조직되어 있다는 점이다. 회사는 1971년부터 보스턴 심포니와 시카고 심포니의 유럽 투어를 주관했다. 이후 미국 주요 오케스트라들이 KD 슈미트와 협력해 유럽 진출에 성공하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로린 마젤/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 피에르 불레즈/뉴욕 필, 앙드레 프레빈/피츠버그 심포니 등이다.
아쉽게도 올해는 안정적으로 운영되던 주요 사업들이 대부분 중단됐다. 코로나19 여파로 그 어느 때보다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다.
코로나19로 인해 상반기 주요 프로젝트가 대부분 취소됐다.
계획했던 오케스트라 투어 프로젝트 중 25%만 실현됐다. 공연장이 지금처럼 계속 멈춰있으면 오래전부터 기획했던 일들을 진행하지 못할 것 같다. 갑작스레 다수 공연이 취소되었고, 우리 아티스트들의 금전적 보상을 위해 싸우고 있다. 현재 소속 음악가들과 더 친밀함을 유지하며 지속적으로 연락을 취하는 중이다.
얼마 전, 미국의 대형 기획사인 컬럼비아 아티스트 매니지먼트(CAMI)가 문을 닫았다는 소식이 들렸다. 코로나가 이유라고 보는가?
충격적이었다. 너무 비극적인 소식이다. CAMI의 사업 배경을 잘 모르기 때문에 코로나19가 유일한 이유였는지는 확답하기 어렵다
. 현재 모든 기획사가 매우 위급한 상황이다. 정부에서는 우리의 문제에 귀 기울여주지 않는다. 기획사들이 뭉쳐서 서로를 지지하지 않으면 우리들은 조용히 죽어갈 것이다.
지속 가능한 회사 운영을 위해 무엇을 염두에 두어야 할지 다들 고민하더라.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에 맞춰 매우 민첩해야 한다. 임대료와 인건비가 실질적으로 가장 큰 고민이다. 특히 뉴욕이나 런던과 같은 대도시에서는 임대료가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아티스트와 매니저 비율을 효율적으로 배치하고, 각 기업마다 주요 역점을 두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을 테다. 무엇보다 안정적인 수입을 보장할 수 있는 아티스트와 프로젝트를 꼭 보유하길 권한다.
2019년, KD 슈미트는 창립60주년을 맞았다. 60주년을 기리며 소속 아티스트인 안드리스 넬손스의 지휘로 하노버에서 콘서트를 개최했다. 2018년은 런던
사무실 창립 20주년이기도 했다. 코닐리아 슈미트는 “그동안 이룬 성과가 자랑스럽다”고 소감을 밝혔다. 60주년 행사를 통해 “회사의 과거를 돌아보는 건 고무적이면서도, 미래를 향해 나아갈 원동력이 되었다”고 한다.
앞으로 KD 슈미트의 목표는 전 세계에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것이다. 코닐리아 슈미트 대표는 “자연재해가 앞으로 클래식 음악 산업에 많은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는 예견을 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이러한 상황을 고려한 프로젝트를 모색하겠다”는 의지를 다졌다. 60년의 역사를 품고, 이제 그는 미래를 향한 열쇠를 찾고 있다.
글 장혜선 기자 사진 KD 슈미트
HarrisonParrott · since 1969
영국 · 해리슨패럿
제스퍼 패럿 Executive Chairman
오랜 역사의 자부심
| 주요 아티스트 |
블라디미르 아슈케나지(지휘·피아노),
파보 예르비(지휘), 장한나(지휘·첼로), 탄둔(작곡),
페테르 외트뵈시(작곡·지휘), 켄트 나가노(지휘)
빠르게 변하는 시대 속에서도 오랜 역사가 주는 무게는 변하지 않는다. 영국 런던에 본사를 둔 해리슨패럿이 가지는 자부심도 50년이란 오랜 역사를 근간으로 한다.
해리슨패럿은 1969년 10월, 제스퍼 패럿과 테리 해리슨이 영국 런던에 설립한 클래식 음악 매니지먼트다. ‘세계적인 수준의 연주자들을 위해 새로운 스타일의 경영을 창출’하고자 만들어진 이곳은 50여 년의 세월을 거치면서 국제적으로 다각화된 공연예술 매니지먼트로 성장했다. 2008년과 2018년에는 뮌헨과 파리에 지사를 설립하며 성공궤도를 이어갔고, 지난해에는 해리슨패럿 재단도 설립했다. 소속된 아티스트만 해도 250여 명, 신예부터 거장까지 말 그대로 핫한 이름을 모두 여기서 찾을 수 있다.
얼마 전 미국의 대형 기획사 CAMI가 무너지고, 많은 클래식 음악 매니지먼트들이 덩치를 줄여가는 가운데, 해리슨패럿은 흔들림 없이 견고한 자세를 유지 중이다. ‘혁신과 전문성, 그리고 대응성’이란 오랜 가치가 그들을 단단하게 받쳐주고 있기 때문이다. 설립부터 지금까지, 그 역사의 증인이 되어온 제스퍼 패럿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50년 역사에 걸쳐 꾸준히 성장해왔다. 빠르게 변화하는 음악 업계에서 여러 매니지먼트가 피고 지는 가운데, 이처럼 오랫동안 명성을 유지하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
회사 초기에 도입했던 경영 원칙 중 상당수가 현재 전 세계적으로 통용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항상 현장의 선봉에서 업계의 발전 과정에 참여하려 노력한다. 교육, 트레이닝, 홍보 마케팅 등에 있어 새로운 기술력을 갖추고, 기존의 방식을 검토하며, 고객의 이익을 위해 계속해서 변화를 추구한다. 오케스트라·오페라단·극장의 해외 투어와 프로젝트 매니지먼트, 프로모션 및 컨설팅 등 서비스 제공의 범위를 계속해서 넓혀온 것도 그 이유에서다.
뮌헨과 파리에 차례로 지사를 설립한 것도 해리슨패럿의 성장 근거일 것이다. 특별히 두 도시를 선택한 이유가 있는가?
더 많은 도시에서 치열하게 활동하기 위해서다. 음악과 예술은 지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분리될 수 없다, 하지만, 지역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사람과 함께 일하는 것이 아티스트와 스태프 모두에게 이익이 될 거라 생각했다. 처음 시작한 뮌헨 지사가 성공적인 궤도로 성장하는 것을 보며 파리에도 사무실을 열기로 했다. 두 곳 모두 경영상의 전략이나 사내 문화에서는 런던의 본사와 다를 바 없지만, 각 지역에 대한 정보와 네트워크에 대한 이점은 확실히 지니고 있다. 현재 지사를 더 추가하는 것도 고려 중이다.
클래식 음악에 대한 나라의 지원이나 후원 없이는 회사를 유지하기 어려웠을 텐데.
런던은 클래식 음악 매니지먼트의 중심지이다. 하지만 영국의 음악 시장은 그다지 강하지 않고, 정부의 지원도 매우 약하다. 그동안 선보인 국가 지원 정책은 실제 운영에 대한 이해도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비판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 내 에이전시 간 경쟁이 아주 치열한데, 이런 분위기가 몇몇 매니지먼트들이 국제적인 영향력을 가지는 데 일조했다. 런던의 음악계는 훌륭한 비평가들과 함께 성장했다. 그러나 현재 많은 인쇄 매체가 생존의 어려움을 겪으며 음악계의 상황도 덩달아 악화됐다.
지난 8월, 90년 역사의 미국 컬럼비아 아티스트 매니지먼트(CAMI)가 문을 닫았다. 세계 클래식 음악계에 닥친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업계의 여론은 ‘대형 에이전시의 시대는 끝났다’는 데로 모이고 있다. 하지만 패럿의 생각은 다르다. 오히려 지금과 같은 시기에 대형 매니지먼트만이 할 수 있는 역할이 있다고 자부한다. 200여 명의 아티스와 함께하는 또 하나의 대형 매니지먼트사인 해리슨패럿과 이를 이끄는 제스퍼 패럿. 이들이 그리는 음악 산업의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같은 대형 매니지먼트로서 CAMI의 폐업이 더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 같다.
CAMI는 지난 90년간 북미 클래식 음악 시장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던 곳이다. 물론 코로나19의 여파가 클래식 음악 사업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CAMI가 문을 닫게 된 것은 아마도 과도한 비용 기반과 시대에 뒤처진 업무 스타일 등이 오랜 시간 쌓여왔기 때문일 것이다.
이번 사건이 클래식 음악계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미국과 캐나다는 인재 양성에 있어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두 나라의 기획자와 음악학자, 축제 등도 세계 음악 시장에서 큰 부분을 차지해왔고. 지금 미국 음악계가 겪고 있는 피해는 곧 새로운 인재 육성과 예술가들의 지속적인 커리어 개발 측면에서 큰 반향을 일으킬 것이다.
많은 공연이 취소되며 공연 수수료에 기반한 기획사의 재정에도 심각한 손실이 있었을 것 같다.
지난 6개월 동안 수입이 약 90% 정도 줄었다. 엄격한 비용 절감과 더불어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도하며 아티스트와 직원을 보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현재는 보건 당국이 제시하는 틀 안에서 아티스트들의 활동을 재개하고 있다. 디지털 미디어를 활용한 프로젝트 개발에도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고 있는데, 곧 새로운 프로젝트를 선보일 수 있을 것 같다.
대형 매니지먼트의 운영 방식에 대한 여러 문제점이 지적되고 있는데.
규모가 큰 기업은 비교적 여러 부서를 두고, 광범위한 서비스를 제공한다. 현재 격변하는 상황 속에서 예술가의 창작 활동을 보호할 수 있는 곳은 다양한 기반을 갖춘 대기업이라고 생각한다. 가장 안정적이고 생산적인 조직 모델이랄까.
제스퍼 패럿은 “예술적 가치를 단기적인 사업 이익 위에 두는 것”을 경영자의 의무로 꼽는다. 이러한 가치관이 멀리 보았을 때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온다고 믿기 때문이다. 스물한 살의 나이에 음악 산업에 뛰어들어, 유럽 최고 규모의 매니지먼트를 만들기까지 패럿의 경영 철학은 확고했다.
캠브리지 대학에서 역사를 전공한 역사학도가 돌연 클래식 음악 매니지먼트 사업에 뛰어들었다. 무엇이 계기였나?
워낙 어릴 적부터 클래식 음악을 좋아했다. 잘하진 못했지만, 오보에와 리코더도 연주했고. 외교관이자 아마추어 피아니스트로 활동했던 아버지 덕분에 브뤼셀, 모스크바, 프라하 등 유럽의 여러 도시를 다니며 훌륭한 예술가들과 만날 수 있었다. 음악 분야에서 일하기로 결심한 때는 캠브리지 대학 졸업을 앞둔 때였다. 스물한 살에 당시 런던의 주요 에이전시 중 하나였던 ‘이브스 앤 틸렛(Ibbs and Tillett)’에서 일을 시작했다. 이후 4년 동안 이곳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이브스 앤 틸렛’은 1900년대 전반에 걸쳐 런던의 음악계를 이끌었던 곳이다. 이곳을 떠나 본인의 회사를 설립하게 이유는 무엇이었나?
내 마지막 파트너였던 테렌스 해리슨과 함께 회사에서 해고당한 후, 우리만의 에이전시를 만들기로 결심했다. 뛰어난 예술가들이 커리어를 쌓고, 기회를 만들어가는 것을 돕고 싶었다. 예술가의 관점에서 보고 그들의 최대 관심사에 맞추어 헌신하는, 새로운 매니지먼트의 모델을 만들고자 했다.
해리슨 패럿은 현재 75명의 직원이 함께한다. 이스탄불, 함부르크, 리가, 보르도, 암스테르담, 오슬로 등 20여 개국 출신의 직원과 15개 이상의 언어가 조화를 이룬다.
여러 분야에서 헌신적으로 재능을 발휘할 수 있는 창의적인 인재를 찾고 있다. 문화적 측면에서의 국제적인 안목과 다양한 배경, 기술을 중요하게 본다. 현재 한국인 직원은 없지만, 한국의 재능 있는 젊은이들에게도 언제나 문은 열려있다.
오랜 시간 업계에 몸담으며 느낀 필수 역량은 무엇인가?
클래식 음악을 비롯한 여러 예술 장르에 대한 지식과 호기심, 좋은 글쓰기와 말하는 기술, 디지털 세계에 대한 관심과 개방적 시각, 충성심과 헌신, 그리고 열정이다.
2019년 10월, 블라디미르 아슈케나지(1937~)부터 제스 길럼(1998~)까지, 무려 4세대를 아우르는 클래식 음악계 대표 아티스트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해리슨패럿의 창립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서였다. 해리슨패럿은 ‘50 Years in a Day’란 제목으로 10월 6일 하루 동안 3개의 시리즈를 선보였다. 그중 ‘사랑과 우정’을 주제로 펼쳐진 마지막 무대는 해리슨패럿이 지켜온 오랜 가치와 앞으로의 비전을 모두 제시하는 자리였다. 아슈케나지와 파보 예르비, 산투 마티아스 루발리, 엘림 찬까지, 세대를 대표하는 네 명의 지휘자가 한 날, 한 무대 위에서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를 지휘했다.
지난해 선보인 해리슨패럿의 창립 50주년 기념 공연이 참 인상적이었다. 다양한 세대와 배경, 장르를 아우르는 연주자들이 한자리에 모인 것을 보며 해리슨패럿의 가치관을 엿볼 수 있었다.
우리는 약 250여 명의 아티스트를 대표하고 있으며, 그중 62명이 성악가다. 특히 지휘와 바이올린, 피아노 부문에서 강세를 보이지만, 특정 분야의 아티스트를 선호하는 것은 아니다. 50여 년의 세월 동안 수많은 예술가와 함께 잊지 못할 순간들을 경험했다. 그중에서도 아슈케나지와 함께한 55년의 세월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것 같다.
해리슨패럿은 영국 오케스트라 협회가 선정한 2015년 ‘올해의 아티스트 매니저’에 선정되기도 했다. 에이전시와 아티스트의 이상적인 관계는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서로 간의 신뢰가 오랜 파트너십을 이어가기 위해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클래식 음악 시장의 트렌드가 빠르게 변하고 있다. CD보다는 디지털 음원 소비가 늘었고, 홍보의 거점도 인쇄물에서 소셜 미디어로 확대됐다. 관객층의 변화도 빼놓을 수 없다. 본토인 유럽에선 관객의 고령화 문제가 대두되었고, 상대적으로 젊은 관객층을 보유한 한국 시장과 거대한 자본력을 지닌 중국 시장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
한국은 다수의 콩쿠르 수상자를 배출하고 있고, 중국도 클래식 음악 교육 시장을 넓혀가고 있다. 덩달아 아시아 시장에 대한 관심이 늘고 있는데.
현재 아시아가 가장 중요한 클래식 음악 시장 중 하나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특히 음악 활동에서는 한국의 성장이 두드러진다. 시장 개척을 위해 중국을 처음 방문했던 것이 1979년인데, 이곳 역시 이후 기하급수적인 성장을 보였다. 정치적인 상황만 허용된다면, 중국은 향후 수십 년 동안 가장 중요한 시장이 될 것이다.
장한나(지휘)와 에스더 유(바이올린)도 해리슨패럿과 함께하고 있다. 한국 음악계와 아티스트에 대한 관심도 계속됐을 것 같은데.
한국 클래식 음악 시장의 주요 수요층이 20~40대 여성이라는 소리를 듣고, 참 이례적인 현상이라 생각했다. 1970~80년대의 일본 시장도 이와 비슷했던 것 같은데, 이후 어느 정도 평준화되었다. 한국도 마찬가지의 변화를 보이지 않을까 기대한다.
제스퍼 패럿이 처음 한국을 방문한 것은 1975년이다. 대중적으로는 아직 클래식 음악이 낯선 예술이었지만, 한편에선 정경화 등의 음악가가 그 길을 개척하고 있을 때였다. 그때부터 패럿은 한국의 클래식 음악계와 함께했다. 그리고 2020년 현재, 그는 짧은 시간 내 기하급수적인 성장을 이룬 한국 클래식 음악계에 “감탄할 만한 일이다!”며 존경을 표했다. 앞으로 한국 음악계가 국제적으로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란 확신과 함께.
글 이미라 기자 사진 해리슨패럿
IbermÚsica · since 1970
스페인 · 이베르무시카
요렌츠 카바예로 Direcci?n General
이베리아반도를 넘어서
| 주요 아티스트 |
벨체아 콰르텟, 루카스 마시아스 나바로(오보에),
에스더 유(바이올린), 트룰스 뫼르크(첼로),
니콜라이 데미덴코(피아노), 예브게니 키신(피아노)
2019년은 요렌츠 카바예로에게 조금 미묘한 해였다. 그가 운영을 맡고 있는 카다케스 오케스트라(Cadaqués Orchestra)가 뜻하지 않은 안식을, 이베르무시카는 창립 50주년을 준비하는 시기였기 때문이다.
스페인과 네덜란드에서 음악을 공부한 요렌츠 카바예로는 1988년 카다케스 오케스트라를 설립했다. 이후 카다케스 오케스트라는 스페인 음악계에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2년마다 카다케스 오케스트라 지휘 콩쿠르를 주최해 젊은 지휘자를 발굴했는데, 이 콩쿠르에서 우승한 잔안드레아 노세다는 1994년 카다케스 오케스트라 수석지휘자로 임명된 바 있다.
30년간 개인 후원자들의 도움으로 악단을 운영했지만, 더 이상 민간 오케스트라를 끌고 가기에는 힘든 재정적 한계에 부딪혔다. 작년 요렌츠 카바예로는 스페인 언론을 통해 카다케스 오케스트라가 “안식년의 시간을 갖는다”고 발표했다.
악단의 ‘해체’가 아닌 ‘안식년’이란 표현을 썼다.
잠시 멈춰서 성찰하는 시간을 갖고자 한다. 운영이 완전히 악화되고 나서 성찰기를 갖는다면, 아마 다시는 돌아올 수 없을 테다. 숨 고르는 시간이라고 해야 할까.
다시 돌아온다면 더욱 견고한 구조를 갖춰야 할 텐데.
몇 년 안에 어떠한 가능성과 성과를 보일 것인지 세세한 계획이 필요하다.
카다케스 오케스트라를 30년간 이끌며 가장 힘들었던 점은?
불확실성. 악단 보조금이 늘지 않으면 운영비용을 티켓 판매에만 의존해야 한다. 수익성을 확보하고자 많은 수의 공연을 소화해야만 했다. 안식년을 기회로 악단이 앞으로 무엇에 집중해야 할지 고민해야 한다.
민간 오케스트라를 운영하며 다양한 경험을 쌓은 요렌츠 카바예로. 그는 5년 전부터 스페인 이베르무시카의 경영을 이어가고 있다.
스페인 마드리드에 위치한 이베르무시카는 올해 50주년을 맞았다. 1970년 알폰소 아히혼에 의해 설립된 이베르무시카는 ‘신뢰’가 ‘차이’를 만든다는 신념으로 아티스트와의 소통에 많은 힘을 쏟고 있다.
현재 회사는 클래식 음악 공연을 주최하는 ‘이베르무시카’와 소속 아티스트의 음악적 커리어를 보조하는 ‘이베르무시카 아티스트’로 팀을 나눠 운영한다.
이베르무시카의 설립자인 알폰소 아히혼과 오랜 친구 사이라고.
알폰소 아히혼과는 1991년에 처음 만났다. 처음 봤을 때부터 마음이 통하는 친구였다. 그는 2001년에 나에게 이베르무시카에 합류해달라고 요청했다. 당시 제안을 거절했지만 이후 이베르무시카의 운영에 대한 관심이 깊어졌다. 2015년에 알폰소 아히혼이 은퇴를 하겠다고 얘기했고, 30년을 지켜본 이베르무시카의 역사를 이제는 내가 이어가야 할 시기라는 확신이 들었다.
이베르무시카와 카다케스 오케스트라는 그간 협력 관계였는데.
이베르무시카는 카다케스 오케스트라 지휘 콩쿠르의 컨설턴트 역할을 해왔다. 이 콩쿠르를 통해 오늘날 주요 공연장에서 활약하는 유명한 젊은 지휘자들을 발굴할 수 있었다.
‘이베르무시카’와 ‘이베르무시카 아티스트’의 궁극적인 차이는?
같은 회사다. ‘이베르무시카’는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에서 진행하는 공연 시리즈를 기획하고 있다. ‘이베르무시카 아티스트’는 소속 음악가들의 스페인이나 포르투갈, 남미 지역 투어를 맡는다. 스페인 내에서만 진행되던 사업들이 점점 국제 시장으로 넓혀졌고, 마침내 스페인 음악가들을 전 세계에 소개하기에 이르렀다.
선호하는 음악가 유형이 있는지?
특별히 장르를 구분하진 않는다. 하지만 우리 회사를 대표하는 아티스트는 대부분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비롯한 남미인이다. 이외에도 회사 설립 이래 다니엘 바렌보임, 주빈 메타, 유리 테미르카노프와 같은 아티스트와 함께하게 된 걸 자랑스럽게 여긴다. 1994년 카다케스 오케스트라 지휘 콩쿠르의 우승자인 잔안드레아 노세다와도 계약을 맺었다.
매니지먼트와 아티스트 간의 가장 이상적인 관계는?
상호 신뢰.
이베르무시카는 50주년을 기리며 2019/2020년 시즌, 2020/2021년 시즌에 50회 이상의 공연을 기획하고 있었다. 스페인 악단은 물론 빈과 베를린, 이스라엘, 런던에서 활약하는 오케스트라를 대거 초청할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닥쳐온 코로나19 때문에 지난 5개월간의 모든 공연이 취소된 상황이다.
코로나19 이후 정부의 도움이 있었나? 스페인은 고용주가 코로나19 사태를 이유로 근로자를 해고하지 않게끔 보호하는 ERTE(Expediente de regulación deempleo) 시스템을 도입했다. 이는 우리 회사에도 비용 측면에서 큰 도움이 됐다. 앞으로 상황이 어떻게 전개될지 지켜봐야 할 것 같다.
CAMI가 문을 닫은 이유가 전염병 때문이라는 여론이 있다.
의심할 여지없이 코로나19가 중요한 요인이 됐을 것이다.
이처럼 어려운 상황에서 회사를 안정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은?
그저 열심히. 그리고 행운이 깃들길.
인터뷰 말미, 요렌츠 카바예로는 “이베르무시카가 좀 더 국제적인 역할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밝혔다. 이베르무시카가 쌓은 50년의 유산은 스페인 피아니스트 하비에르 페리아네스를 비롯한 남미 아티스트를 국민에게 알린 것이다. 이제는 “소속 아티스트를 전 세계에 소개할 시기”라고 한다. 자국 아티스트에 대한 무한한 신뢰가 느껴졌다.
그는 한국에 대한 호기심도 비쳤다. “스페인에서 점점 많은 아시아 예술가들이 활동하고 있다”며, “한국의 음악가와 오케스트라를 알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좋겠고, 앞으로 그들을 스페인으로 데려오기를 희망하고 있다”고 한다.
사실 2020년은 한국과 스페인이 수교 70주년이다. 양국은 2020~2021년을 ‘한국-스페인 상호 방문의 해’로 지정했으나 코로나19 영향으로 잠시 멈춰있는 상태. 그 역시 “양국의 관심이 단발성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래도록 유지되기를 원한다”는 바람을 전했다.
글 장혜선 기자 사진 이베르무시카
Japan Arts Corporation · since 1976
일본 · 재팬 아츠
준이치 니헤이 President & CEO
베스트셀러와 스테디셀러 모두
| 주요 아티스트 |
크리스티안 지메르만(피아노),
예브게니 키신(피아노),
미하일 플레트뇨프(지휘·피아노),
앨리스 사라 오트(피아노),
마린스키 발레, 메트 오페라,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
한국과 재팬 아츠의 인연은 역사적 사건 속에서 찾을 수 있다. 한국과 러시아(소련)의 국교가 없었던 1988년, 재팬 아츠가 두 나라 간에 징검다리 역할을 했고, 이로 인해 서울올림픽 문화예술축전의 일환으로 볼쇼이 발레가 내한할 수 있었다. 같은 해 일본에서는 재팬 아츠의 초청으로 매트로폴리탄 오페라의 첫 공연이 펼쳐졌다. 역사의 흐름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본래 한 뉴스통신사의 문화사업부서로 시작된 재팬 아츠는 1976년에 독립해 지금의 모습을 갖췄다. 초기에는 유럽을 중심으로 한 해외 단체(극장·오케스트라·연주자·발레단 등) 초청을 주요 사업으로 했으나, 이후 일본 아티스트 매니지먼트 사업을 더하며 두 갈래의 중심을 잡았다.
설립 초창기부터 해외 초청 사업에 주력하고 있다. 그만큼 직원들에게 다양한 능력이 요구될 것 같다.
우리 회사에서는 채용 시 학력이나 경력을 묻지 않는다. 직원 50명(한국인 1명 포함) 중 음악 전공자도 30% 정도에 불과하다. 음악적 배경보다는 오히려 사무 능력과 어학, 상상력과 업무 사이에서의 균형 등을 더 필수적으로 본다. 그중에서도 상대방을 파악하고 그보다 앞서나가는 상상력을 중시한다.
클래식 음악을 중심으로 오페라, 발레 등 다양한 장르를 다루고 있다.
다방면에 걸쳐 있지만, 각각의 예술에 정통한 지식을 보유한 것과 그것을 일로 하는 것은 별개다. 발레에 대한 지식이 공연의 흥행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예술경영은 아티스트와 그의 예술성을 존중하면서도 이익을 추구해야 하는 섬세한 작업이다. 경제적 이익만 생각해선 예술과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없고, 아티스트와 함께 꿈을 좇는 것만으로는 체계적인 비즈니스가 성립되지 않는다. 그래서 항상 ‘예술적 가치’와 ‘경영상의 이익’을 함께 이루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예술적 가치와 경영상 이익. 두 가지가 충돌하는 순간은 없었나?
이건 업계의 최대 논제이다. 경영자로서 수익이 없는 프로젝트를 진행해서는 안 되지만, 때로는 선행투자라고 생각하며 수익을 포기하고 예술성을 우선시할 때도 있다. 그 판단에 대한 결과는 몇 년이 지나 봐야 알 수 있고. 이런 결정을 내릴 때면, 생전에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곧 내 시대가 올 것이다’라고 말했던 말러가 생각난다.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준이치 니헤이는 졸업 후 지휘자 겸 오케스트라 에이전트로 일했다. 재팬 아츠와 첫 인연을 맺은 것은 2001년. 입사 후 빈 심포니,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 마린스키 오페라·발레 등 세계적인 예술가들의 초청 무대를 진행했다. 십여 년간 성실히 경험을 쌓은 그는 2014년 매니징 디렉터(managing director) 자리에 올랐고, 4년 뒤에는 재팬 아츠의 대표로 선임됐다. 현재 일본 파데레프스키 협회(책임 프로듀서)와 아시아문화진흥연맹(부회장) 등 여러 직책도 겸하고 있다.
재팬 아츠 외에도 일본 내의 문화예술을 유지·활성화하는 대외적인 업무도 겸직하고 있다.
연륜이 쌓여도 성장을 필요로 하는 게 사람인지, 새로운 경험을 할 때마다 내 부족함에 대한 반성과 함께 배움에 대한 욕심이 생긴다. 예술을 추구하다 보면 자칫 내면의 세계에 갇혀버릴 수 있다. 클래식 음악을 더 많은 사람에게 알리려면, 아티스트뿐만 아니라 매니저도 의식적으로 바깥 세계와 접점을 늘리려고 노력해야 한다.
많은 사람과 만나다 보면, 새로운 트렌드에 민감해질 수밖에 없을 듯하다.
현대의 미디어는 텔레비전·신문과 같은 큰 규모에서 개인이 스마트폰으로 하는 가볍고 유연한 스타일로 변하고 있다. 공연 홍보의 주된 매체도 신문이나 방송에서 본인의 SNS 채널로 확대되고 있는 것을 생각한다면, 이제는 아티스트나 에이전트가 이러한 역할을 더욱 장려하고 도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젊은 감각으로 어떻게 세상에 클래식 음악을 전달하느냐, 현시대의 중요한 과제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변화에 어떻게 대응해나아가야 할까?
요즘은 매니저보다 팬들이 아티스트에 대해 더 많은 정보를 갖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즉, 정보를 팔던 시대는 끝났고, 이제는 범람하는 정보 속에서 아티스트의 가치를 어떻게 잘 선별하여 다루느냐가 업무의 중심이 되었다. ‘브랜딩’이란 말이 유행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 증거다. 그러나 이 안에서도 아티스트만의 진정한 예술성은 지켜져야 한다. 정성을 쏟지 않은 연주임에도 불구하고 유명세에만 매달리던 청중은 점차 사라지고 있다.
일본은 그간 아시아 최대 클래식 음악 시장으로 손꼽혀 왔다. 해외 유명 단체의 아시아 투어에서도 언제나 일본이 중심에 있었다. 그러나 2012년 일본 문화청이 발표한 ‘문화데이터집’에 따르면 일본 정부가 제시한 문화부 예산은 총예산의 0.11%밖에 되지 않았다. 같은 해 한국은 0.87%였다. 국가의 예산 지원 부족에 대한 대책으로 일본 문화계는 최근 크라우드 펀딩이나 후루사토 납세제도(태어난 고향이나 응원하고 싶은 지자체에 기부할 수 있는 제도) 등 비교적 쉬운 형태의 기부제도를 마련하며 성장을 기대하고 있다. 하지만 이 또한 쉽지 않다. 준이치 니헤이는 “서구식 후원 문화가 없는 일본은 ‘개인 기부’에 대한 인식이 낮은 데다, 기업 또한 ‘기부’를 ‘투자’로 혼동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이유로 밝혔다.
이번 코로나 사태로 인해 공익성을 추구하는 한국의 교향악단들이 큰 타격을 입었다. 일본은 어떤가?
일본의 프로 오케스트라 대부분은 공익재단 형태로 운영된다. 쉽게 말하자면 ‘이익을 취해서는 안 되는’ 조직 형태로, 문화청이나 지자체의 재정 지원에 크게 의존한다. 이번 코로나 영향으로 경제적 잉여금(내부유보)이 거의 없는 오케스트라들이 순식간에 경영난에 빠지고 말았다. 우리 회사와 같은 사업자나 연주 단체, 아티스트에 대해 국가의 보조금이나 조성금이 설정되어 있긴 하지만, 손해 규모가 워낙 크기 때문에 많은 연주 단체와 기획사가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다.
재팬 아츠가 찾은 돌파구가 있다면.
사회적 거리두기를 유지하면서 가능한 활동들을 선보이고 있다. 또한 소극적 활동을 보안하기 위해 ‘온라인 사업’도 병행하고 있다. 라이브 공연의 유료 방송 외에도 딜레이 라이브(일종의 재방송)나 아카이브 방송 등을 통해 팬들에게 공연을 즐기는 여러 가지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코로나가 종식된 후에도 라이브 연주와 병행하며, 혼합된 형태의 새로운 공연 모델을 선보일 것이다.
한국 클래식 음악 시장의 주요 고객은 20~40대 여성이다. 그래서 여성 아티스트보다 남성 아티스트 위주의 기획이 많고, 한국 음악가의 공연보다 해외 음악가의 공연이 많이 선호되는 편이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 “다른 나라에서는 볼 수 없었던 모습이다”라고 밝힌 준이치 니헤이는 “처음 예술의전당에 방문했을 때, 객석에 젊은 여성이 많이 앉아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 장래성을 생각하면 매우 부러운 일이다”라고 전했다.
일본 관객이 특별히 선호하는 공연예술 장르나 프로그램이 있는가.
일본 전통예술인 ‘가부키’는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인기를 유지하고 있다. 무대 위 배우들이 TV 등에도 출연해 대중적인 유명세도 얻고 있고. 뮤지컬 장르도 큰 인기를 끌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일본 최대 규모의 ‘극단 사계’와 전원 여성으로 구성된 극단인 ‘다카라즈카’가 가장 유명하다. 특히 다카라즈카 가극단은 열광적인 팬층을 가지고 있으며 청중의 거의 100%가 여성이다. 이 외에도 오페라, 발레, 연극 등 모든 장르가 매일 상연되고 있다.
현재 재팬 아츠에는 240여 명의 아티스트가 있다. 크리스티안 지메르만·엘리소 비르사라제·미하일 프레트뇨프·예브게니 키신(피아노), 발레리 게르기예프·유리 바슈메트(지휘) 등 창업 초기부터 오랜 신뢰 관계를 쌓아온 거장부터 앨리스 사라 오트, 조성진, 윤디 리 등의 젊은 스타들까지 나이도, 장르도, 배경도 다양하다.
수많은 아티스트 중에서도 특별히 기억되는 만남이 있을 것 같다.
일본 피아노계의 대모로 국제적인 명성을 떨친 나카무라 히로코(1944~2016). 그는 예술가로서도, 한 인간으로서도 존경할 만한 존재였다. 넓고 다양한 시각과 경험이 뒷받침된 명확한 의사결정, 여기에 따뜻함까지 갖춘 큰 인물이었다. 후진 양성에도 힘썼던 그는 하마마쓰 콩쿠르 심사위원장을 비롯해 쇼팽 콩쿠르, 차이콥스키 콩쿠르 등 수많은 국제 콩쿠르의 심사위원을 역임했다. 조성진의 재능을 일찌감치 알아본 것으로도 유명하다.
재팬 아츠에는 조성진을 비롯해, 임지영, 김다미, 김한 등 다수의 한국 음악가와 함께한다. 앞으로 더 많은 교류를 기대해볼 수 있을까.
한국의 아티스트를 만날 때면 개방적인 마인드와 더불어 특히 영어와 독일어에 능통하다는 사실에 감탄한다. 언어가 약한 일본 아티스트들이 본받았으면 한다. 이웃나라로서 앞으로 교류가 더 늘어날 것으로 기대한다. 좋은 의미로 절차탁마하여 서로를 통해 성장해 나갔으면 한다.
아시아의 클래식 음악 시장을 어떻게 전망하나?
세계 최대의 성장 마켓이라 본다. 1988년 서울 올림픽과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그리고 코로나로 인해 2021년에 개최 예정인 도쿄 올림픽과 함께 각 나라는 경제발전을 이루었고, 이와 함께 문화적인 수준도 한 단계 높아졌다. 해외로 진출하는 훌륭한 음악가들도 계속 배출하고 있고. 그러나 일본은 한편으로 수급 불균형의 문제에 직면해 왔다. 좋은 아티스트는 많은데, 그들이 연주할 자리는 늘 부족하다. 이 문제는 곧 한국과 중국에서도 나타날 수 있다.
준이치 니헤이는 ‘베스트셀러보다 스테디셀러를 선택하라’는 말을 좋아한다. 오랫동안 사랑받는 클래식 음악이 바로 이 ‘스테디셀러’에 해당한다. 그가 ‘온라인’이라는 현재의 베스트셀러를 주목하면서도 흔들림 없이 나아갈 수 있는 이유는 바로 변하지 않는 가치를 지닌 스테디셀러, 클래식 음악에 대한 믿음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글 이미라 기자 사진 재팬 아츠
IMG Artists · since 1984
미국 · 한국 · IMG 아티스트
뉴욕 기획부장 존 에번스 Chief Operating Officer
& 서울 지사장 최성아 Executive Vice President
전설의 또 다른 도약
| 주요 아티스트 |
르네 플레밍(소프라노), 다니엘 뮐러 쇼트(첼로),
예브게니 키신(피아노), 힐러리 한(바이올린),
정경화(바이올린), 손열음(피아노)
IMG의 ‘간판스타’라고 하면 타이거 우즈와 박세리가 먼저 언급되던 시절이 있었다. 스포츠 스타를 거느리는 매니지먼트사로 출발해 세계적 명성을 얻은 터였다. 그러던 어느 날, 창업주 마크 매코맥은 친구인 소프라노 키리 테 카나와와 골프를 치며 시간을 보내고 있던 중이었다. 카나와가 매코맥에게 이런 말을 했다. “예술이 뭔지 알려주지. 스포츠에 ‘하프타임’이 있다면, 우리에겐 ‘인터미션’이 있어.”
매코맥은 타고난 사업가였다. 그녀의 말에 번뜩,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스포츠 선수와 마찬가지로 음악가에게도 전문 매니지먼트가 필요하지 않겠는가!’
스포츠 매니지먼트로 시작한 회사가 클래식 음악으로 영역을 넓혔다. 음악에 대한 전문 지식이 필요했을 텐데.
존 마침 뉴욕의 작은 클래식 음악 매니지먼트사였던 아믈랭란다우가 투자사를 찾고 있었다. 이들이 합류해 음악에 관한 전문성을 더했다. 그렇게 1984년 IMG 아티스트가 문을 열었다.
그간 쌓은 국제 네트워크 덕분이었을까. 이후 빠르게 세계 곳곳으로뻗어 나갔다.
존 1991년에는 런던 본부를 설립해 유럽 대륙으로 나아갔다. 현재 뉴욕·LA·파리·하노버, 그리고 서울 등에서 지사가 운영되고 있다. 세 개 대륙을 아우르는 거다.
각국에 위치한 지부별 특징이 있나?
존 각 지역의 시장 동향을 반영해 고유의 정체성을 확립해 나간다. 런던은 음악과 무용에, 뉴욕은 현대음악과 월드뮤직, 퍼포먼스 쇼에 집중한다. 올해는 서울 지사도 발족해 시장을 파악 중이다.
IMG 아티스트(이하 IMG)는 지난해부터 서울 지사 출범을 계획하기 시작했다. 또 다른 도약을 위한 준비는 한국에서도 일어났다. 국내에선 최성아 지사장의 진두지휘로 진행됐다. 그는 아리랑 TV, 코리아 헤럴드 정치사회부 등에서 기자를 거쳐 외교부와 UN에서 활약한 바 있다.
IMG 서울은 아직 발굴되지 않은 국내 아티스트에게 세계로 향하는 발판을 마련해주고자 한다. 이를 위해 최성아 지사장은 그간 언론과 정부 기관, 국제기구 등에서 쌓은 노하우를 십분 활용할 준비가 돼 있다.
출범 첫해라 포부가 남달랐을 것 같다.
최성아 이를 기념하며 기업, 언론사, 정부 공공기관 등과 협업해 여러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코로나19의 여파로 모두 취소돼 아쉬울 따름이다.
아직 운영 규모가 크지는 않을 것 같다. 국내에 많은 클래식 매니지먼트는 직원 채용 시 음악전공자를 선호하던데, IMG 서울은 어떤가?
최성아 현재 팀원은 8명이다. 음악 전공자는 아직 없지만 기획이나 티켓 대행, 방송, 대중음악, 홍보 등의 분야에 종사했던 전문가들이다. IMG 서울을 이끌어나갈 머리와 팔다리가 다 있는 셈이다. 콘텐츠 기획에 있어서도 다방면 전문가가 모여 있어서인지 확실히 신선하다. 필요에 따라 전문가를 자문위원으로 초빙하고 있다. 현재 코로나 사태로 추가 채용이 늦어지고 있지만, 조만간 음악 전공자를 영입할 생각이다. 전공과 상관없이 가장 중요한 것은 새로운 아이디어와 비판적 사고력, 그리고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자세다.
IMG는 지난 40여 년간 유망한 아티스트를 발굴하고, 명성 있는 음악가들을 지지하며 이 시장의 글로벌 리더로 성장했다. 현재 르네 플레밍(소프라노), 조슈아 벨과 정경화(바이올린), 안토니오 파파노(지휘), 손열음(피아노) 등 400여 명의 아티스트가 IMG와 함께하고 있다.
아티스트 매니지먼트는 저마다의 색깔을 지닌다. IMG의 특성을 물으니 ‘다양성’이란 답이 돌아온다. 브라질·멕시코·일본·한국·파나마 등 다양한 출신 배경을 가진 아티스트들이 개성 있는 음악을 선보이고 있는 것이다.
각각의 개성으로 무장한 수많은 아티스트를 관리하려면 체계도 보다 효율적이어야 할 것 같다. IMG 해외 지사에는 아티스트 계약 등과 관련한 시스템이 갖추어져 있나? 국내에는 계약과 관련한 기준이 마련되어 있지 않아, 혼선을 빚을 때가 종종 있다던데.
최성아 사실 해외에서도 회사마다, 아티스트마다 계약 조건이 매우 다르다. 아티스트마다 요구가 다르기 때문에 계약서 형식과 내용을 다를 수밖에 없다. 중요한 것은 법률 검토인데, 국내에서는 이 과정을 제대로 거치지 않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회사와 아티스트를 모두 보호하기 위해서는 계약서 내용에 대한 법률 자문을 받는 것이 이상적이라고 생각한다.
클래식 음악 매니지먼트의 운영 방식에 다변화가 이루어지고 있다. 몇몇 아티스트는 대형 기획사보다 긴밀하게 소통하는 부티크 에이전시를 주목하고 있다.
존 각 아티스트와 프로젝트에 최소 1~2명의 전담 매니저를 둔다. 그렇기 때문에 각각에 대한 집중도와 통찰력은 부티크 에이전시가 제공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더 나아가 IMG는 오랜 역사를 바탕으로 세계적인 자원도 갖췄다. 업계의 최신 동향을 발 빠르게 파악해 아티스트의 미래를 위한 전략을 짜는 데에 능하다.
코로나19로 브레이크가 걸렸지만, IMG는 낙관적으로 다음을 준비 중이다. 여러 제약 조건들 속에도 공연을 재개하기 시작했고, 9월 말에는 ‘MyLIVE’라는 이름의 라이브 스트리밍 서비스를 출시했다. 파트너십을 맺고 있는 공연장이나 공연기획사들이 새로운 시즌을 시작할 때, 홍보를 돕기 위한 플랫폼이다. 런던과 뉴욕 본부가 공동으로 주관했다. 존 에번스는 “다시 큰 위험에 직면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늘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 이를 상황에 민첩하게 적용하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번 사태가 남긴 교훈이다.
온라인 스트리밍 공연이 이 시기 가장 실효성 있는 대안으로 떠올랐다. IMG도 발 빠르게 이 흐름에 합류한 편인데.
최성아 상황이 심각해지기 시작한 지난 3월부터 IMG 아카이브 영상 자료들을 온라인에 풀기 시작했다. 사실 몇 개월이면 이 사태가 끝날 줄 알고 시작한 프로젝트였다. 사태가 장기화되면서 많은 매니지먼트가 펀드 레이징으로 방향을 틀었다.
펀드 레이징의 사례를 제시한다면?
최성아 최근 IMG의 멕시코계 미국인 지휘자인 알론드라 데 라 파라(1980~)가 자신의 악단과 온라인 공연을 제작했다. 알론드라는 영상 플랫폼을 통해 단원들과 만나 연주를 진행하고, 각 영상을 하나로 모아 선보였다. 지휘자가 프로듀서의 역할까지 겸하게 됐다는 시대의 변화를 보여주었다. 새로운 프로젝트를 진행하려는 아티스트가 있을 때, 지원금이 들어올 수 있도록 판을 깔아주는 것이 이 시대의 매니지먼트사에 주어진 새로운 역할일 것이다.
특별히 IMG 서울이 추진하고자 하는 새로운 프로젝트가 있나.
최성아 우리의 중요한 목표 중 하나는 새로운 관중을 음악계로 유인하는 것이다. 새 관객을 영입하지 않으면 폭이 늘어나지 않는다. 이전까지 많은 클래식 아티스트가 크로스오버에 발들이기를 두려워했다. 다시 정통 클래식 음악계로 돌아오기 어려울 것이라는 우려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요마, 최나경, 조수미 등 대단한 음악성을 갖춘 아티스트들이 가곡이나 대중음악, 크로스오버 등에 관심을 보이며 활동하고 있다.
새로운 관중을 영입하기 위한 IMG 서울의 시선은 케이팝으로까지 가닿았다. 방탄소년단이 미국 빌보드 메인 차트 1위에 오르는 등 케이팝에 대한 전 세계의 관심이 뜨거운 이 시점, 글로벌 팬덤에 클래식 음악의 저력을 보여줄 절호의 기회란다. 최성아 지사장은 “현재 IMG 아티스트와 케이팝의 컬래버레이션을 준비 중”이라며 “새로운 관중에게 직접 다가갈 예정”이라고 밝혔다.
글 박찬미 기자 사진 IMG 아티스트
Impresariat Simmenauer · since 1989
독일 · 지멘아우어
소니아 지멘아우어 CEO
현악 4중주의 전진 기지
| 주요 아티스트 |
아르디티 콰르텟, 벨체아 콰르텟, 노부스 콰르텟,
에벤 콰르텟, 이자벨 파우스트(바이올린),
기돈 크레머(바이올린)
소니아 지멘아우어의 주변에는 항상 음악이 있었다. 첼로를 연주한 아버지 덕분에 집에선 종종 현악 4중주 연주가 흘러나왔다. 4명의 연주자가 만드는 호흡, 그리고 연주하는 가운데 일어나는 호흡이 너무나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어쩌면 지금 그가 빼어난 현악 4중단이 포진한 지멘아우어(Impresariat Simmenauer)를 이끌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소니아 지멘아우어 대표는 KD 슈미트의 실내악 파트에서 6년 반의 경력을 쌓았다. 둘째 아이를 가지면서 엄마의 삶에 집중하고자 회사를 그만두었지만, 그와 함께 일했던 현악 4중주단 모두가 그를 따라나섰다. 1989년, 결국 퇴사한 지 몇 주 만에 자신의 이름을 딴 새로운 매니지먼트, ‘지멘아우어’를 설립하기에 이른다.
계획에 없던 회사 설립에 정신이 없었을 것 같다.
처음에는 거의 혼자 일했다. 하지만 회사가 빠르게 성장하며 2000년에는 직원이 12명으로 늘었다. 2009년 함부르크에서 베를린으로 사무실을 옮기면서는 직원 3명과 함께 다시 시작해야 했다. 현재 사무실은 쿠담 거리에 위치해 있다. 구 서베를린의 중심지로 품격 있는 장소다.
본격적인 매니지먼트 일을 경험한 것은 독일의 주요 기획사인 KD 슈미트에서였다.
프랑스 유명 에이전시에서 일했던 사촌 덕분에 그곳에서 잠시 인턴으로 일할 기회를 얻었다. 아직 어린 학생이었지만, 일을 시작하고 2주 만에 ‘이 일이 내 천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 어학 공부를 시작했고, 여러 에이전시를 거치며 경험을 쌓아나갔다. KD 슈미트에서 참여한 여름 인턴십도 이중 하나였다. 그런데 그로부터 2년 뒤, 회사로부터 실내악 부서를 맡아달라는 제안을 받았다.
1982년부터 1989년까지, 7년에 가까운 시간을 보낸 KD 슈미트를 떠나 지멘아우어를 설립했다. ‘내 회사’를 차리고 싶었던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이었나?
현악 4중주만을 위한, 그들을 가장 최우선 순위에 둔 회사를 만들고 싶었다. 내게 현악 4중주는 여러 음악 장르 중에서도 가장 지적인 음악이다. 그런데 이 장르가 사업적 측면에서 비주류로 평가되고 있는 게 안타까웠다.
결국 현악 4중주를 비즈니스 전면에 내세운 것이 여러 아티스트에게 매력적으로 어필한 것 같다.
우리가 현악 4중주단들을 대하는 모습을 보고, 기돈 크레머를 포함한 몇몇 유명 솔리스트들이 회사에 들어오고 싶다고 말했다. 음악계에서 기대하는 일반적인 패턴에 맞추기보다 각자의 개성에 맞춘 케어를 원했던 거다. 그렇게 기돈 크레머와 킴 카시카시안, 콜야 블라허 등의 음악가들도 우리 회사와 함께하게 됐다.
설립부터 ‘현악 4중주단’이라는 뚜렷한 키워드를 두고 시작된 지멘아우어는 아티스트 각자의 가치와 음악에 중점을둔다. 솔리스트와는 또 다른 방향성을 가지고 관리해야하기 때문에 매니저의 역할도 크다. 각 팀만의 뚜렷한 색깔을 만들기 위해 음악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고, 그들을 빛낼 수 있는 좋은 기획자를 찾아야 한다.
‘아티스트 매니저’의 역할은 어디에 있나?
에이전트는 아티스트를 대표한다. 사람들이 내 아티스트를 보게 하고, 그의 예술에 흥미를 갖게 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자신의 아티스트를 빛나게 하기 위해 꼭 필요한 자질이 있다면.
최소한의 음악적 지식을 가지고 여러 가지 언어를 구사하는 것도 물론 필요하지만, 무엇보다 음악에 대한 사랑이 있어야 한다. 또한 예술가의 예민한 감수성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하고, 인내심도 필요하다. 나를 드러내기 보단 다른 사람을 돋보이게 만드는 데서 성취감을 느끼고, 아티스트의 예술성을 더 끌어낼 수 있어야 한다. 결국 내 아티스트를 받쳐주면서도 이끌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솔리스트와 비교해 실내악 팀 관리에 더 신경써야 할 점이 있다면?
솔리스트와 실내악 팀은 애초에 홍보의 대상이 다르다. 솔리스트를 홍보하는 데 있어 오케스트라나 지휘자와의 좋은 채널을 갖는 게 중요하다면, 실내악 팀의 경우에는 그들의 음악을 잘 나타내줄 수 있는 좋은 기획자와의 접점이 필요하다. 일반적으로 실내악 연주를 찾는 대중은 연주자보다 음악에 집중하기 때문이다.
지멘아우어에는 현재 11팀의 현악 4중주단이 함께 하고 있다. 아르디티 콰르텟, 벨체아 콰르텟, 카살스 콰르텟, 에벤 콰르텟 등 모두 현재 클래식 음악계를 이끌어 가고 명문 실내악 팀이다. 김수연(베를린 콘체르트하우스 오케스트라 악장)이 속한 아르테미스 콰르텟도 이곳 소속이고, 한국의 노부스 콰르텟도 2014년부터 함께 하고 있다.
노부스 콰르텟과 함께하게 된 계기는?
뮌헨 ARD 콩쿠르(2012)에 참가했을 때부터 눈여겨봤던 팀이다. 당시 무대를 보고 곧바로 사랑에 빠져버렸다. 아주 지적이고 매력적인 연주였다. 노부스 콰르텟은 지난 8월 25일, 스위스 바젤의 오래된 음악홀인 슈타드카지노(Stadtcasino)의 재개관 축하공연에 슈만 콰르텟과 함께 올랐다. 다양한 배경과 문화를 가진 사람들이 음악 안에서 어떻게 통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 안에서 얼마나 큰 기쁨을 누릴 수 있는지를 보여준 아주 아름답고 성공적인 무대였다.
실내악이나 현악 4중주는 독주나 오케스트라 협연에 비하면 한국에서 크게 주목 받는 장르는 아니다. 그러나 최근 이와 관련된 공연과 페스티벌이 늘면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숨은 매력을 알려준다면?
현악 4중주단은 아주 특별한 음악적 언어를 선보이며 실내악의 ‘여왕’이라 여겨졌다. 작곡가들에게는 새로운 형태의 음악을 경험하게 하는 실험적 장르였기 때문에 피아노 문헌만큼이나 뛰어난 명곡들이 많다.
그의 모든 답변에서는 누구보다도 아티스트를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이 묻어났다. 그에게 모든 아티스트는 저 높은 하늘 위로 날아갈 때까지 소중히 품어야 할 존재인 듯싶다. 지멘아우어는 스스로 전술과 전략에 능숙하지 못하다고도 밝혔다. 지름길을 찾기보다 정도의 길을 선택하는 그에게서 조금 시간이 걸리더라도 더 단단한 결과물을 만들겠단 의지가 느껴진다.
많은 아티스트들이 자신의 홍보수단으로 유튜브, 인스타그램 등의 온라인 채널을 활용하고 있다.
이는 아티스트의 가치와 작업 방식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음악가에게 음악가로서의 역할 이상을 요구하는 것이 이제는 매우 당연하게 되어버렸다. 꼭 음악과 관련된 것이 아니더라도 미디어에 지속적으로 노출되어야 하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다가가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물론 인스타그램이나 유튜브 등의 온라인 채널은 국제적인 커리어를 위해 필요한 수단이다. 그러나 나는 이런 활동이 천천히, 유기적으로 쌓아가는 커리어를 대체할 수는 없다고 본다. SNS를 통해 끊임없이 쏟아지는 이야기들을 보면 이런 생각이 든다. ‘이것이 주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아티스트는 무엇을 소통하고자 하는가?’, 그리고 ‘과연 이들이 정말로 음악에 관심이 있을까?’
‘디지털화’와 ‘세계화’를 음악계가 변화한 가장 큰 요인으로 꼽았다.
30년 전에는 아주 극소수의 예술가들만이 국제적인 커리어를 쌓을 수 있었다. 그러나 여행이 보편화되고, 전 세계적인 교류가 엄청난 속도로 늘어나며, 국제적인 커리어를 쌓을 수 있는 기회가 더 많은 사람에게 열렸다. 하지만, 팬데믹이 지난 30년의 판세를 단숨에 바꿔놓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외부 환경에 영향을 받지 않고, 안정적인 운영을 지속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지난 몇 년간 성공궤도를 달려온 민간 기업들이 이번 코로나 사태로 파산의 지경에 이르렀다. 우리 회사도 정부의 도움을 받지 못해 직원들에게 휴가를 주고, 예비금을 사용하며 회사를 유지 중이다. 결국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유연성’에 있지 않을까.
지난 30년간 클래식 음악 매니지먼트 업계는 성장을 거듭해 왔다. 그리고 이 흐름 속에서 지멘아우어도 함께 성장했다. 소니아 지멘아우어 대표는 시대에 발맞춘 회사 운영을 위해 젊은 직원들을 계속해서 채용하고, 그들이 가진 새로운 시각과 아이디어를 차용했다. 3년 전부터는 그의 아들인 아놀드 지멘아우어가 회사 경영에 참여하고 있다. 더욱 젊은 감각이 더해진 지멘아우어의 새로운 도약이 기대된다.
글 이미라 기자 사진 지멘아우어
Judson Management Group, INC · since 1992
미국 · 저드슨 매니지먼트 그룹
스티븐 저드슨 President
시대의 변화를
목격하다
| 주요 아티스트 |
안드레아 그리미넬리(플루트),
하비에르 페리아네스(피아노), 레너드 엘셴브로히(첼로), 요나스 알버(지휘), 율리시스 콰르텟,
오르페우스 챔버 오케스트라
1982년 탱글우드 음악제. 노장의 지휘자가 새파란 청년을 붙잡고 감사 인사를 전한다. “저드슨 씨, 당신의 할아버님인 아서 저든슨 씨는 제 은인입니다. 그분 덕분에 지금의 커리어를 쌓을 수 있었지요.”
그는 유진 오먼디(1899~1985)였고, 청년은 음악제 인턴으로 갓 경력을 쌓기 시작한 스티븐 저드슨이었다. “성이 같을 뿐, 컬럼비아 아티스트 매니지먼트(이하 CAMI)의 창립자인 아서 저드슨과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다. 해명하려고 했지만, 흥분한 마에스트로는 들을 생각이 없었다”라고 저드슨은 이날을 회상했다. 역사 속으로 사라진 세계적인 기획사 CAMI와 그의 인연이 시작된 날이기도 했다.
보스턴대학교 예술대학 졸업 후 CAMI에 입사했다. 아서 저드슨과 친척이냐는 오해가 더욱 잦아졌겠다.(웃음)
아서 저드슨(1881~1975)이 설립하고, 로날드 윌포드(1927~2015)가 성장시킨 CAMI는 가히 클래식 음악의 성지였다. 당시 세계 최정상의 음악가는 모두 이곳으로 모였다.
어떤 부서에서 일했나?
탱글우드 음악제에서 인턴을 경험하면서 클래식 음악 산업 중에서도 경영 분야에 관심을 갖게 됐다. 그래서 예약부(booking department)에 자원했다. 연주자를 위해 공연 기회를 만들고, 공연에 따르는 제반사항을 협상하는 일을 맡았다.
클래식 음악의 산업성을 고민하던 그는, 일찍이 예술 후원 분야에 잠재된 가능성을 알아봤다. 미국 예술계를 떠받치는 후원 자금의 상당수는 정부가 아닌, 민간 기업과 개인 기부자로부터 나온다. 그렇기에 후원 의사가 있는 기업과 후원이 필요한 예술가를 매개해주고, 수수료를 받는 저드슨의 아이디어는 타당한 것이었다.
뛰어난 경영자는 시대의 흐름을 읽는다. 스티븐 저드슨은 25세에 CAMI 역사상 최연소로 부사장이 된 인물이다. 그는 CAMI를 떠나, 1992년 미국 뉴욕 맨해튼 중심부에 자신의 이름을 딴 저드슨 매니지먼트 그룹(이하 JMGI)을 설립했다. 예술 후원 사업을 전문으로 하는 기획사였다. 갈수록 전문화, 세분화되는 최근 클래식 음악 산업계의 경향을 앞서간 셈이다.
승승장구하던 회사를 떠날 만큼 예술 후원 사업에 확신이 있었나?
실은 CAMI에 후원 부서를 만들자고 먼저 제안했었다. 아직 미국에서 예술 후원 분야가 사업화되기 전이었다. 즉, 실패할 위험이 있었고 회사는 이를 감당할 의사가 없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았다. 다국적 기업의 막대한 자본 중 일부라도 예술을 위해 쓰인다면, 전 세계인에게 예술을 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루치아노 파바로티와 로린 마젤, 교향악단 피츠버그 심포니 오케스트라, 기업 크레디트 스위스·크라이슬러·제너럴 모터스·메르세데스 벤츠 등이 JMGI의 고객이다. 이 목록에 CAMI도 이름을 올렸었다.
최고경영자였던 로날드 윌포드는 비록 내 제안을 거절했지만, 내가 아이디어를 추진할 수 있도록 격려해주었다. 실제로 CAMI는 우리의 초창기 고객이다.
공교롭게도 얼마 전, 90년 역사의 CAMI가 문을 닫았다. 코로나19로 연이어 공연이 취소되면서 수익이 감소한 것이 폐업의 원인으로 지적된다.
이번 사태가 근본적인 원인은 아니다. 전통적인 클래식 음악 기획사의 비즈니스 모델은 산업 호황기에나 유효하다. 공연이나 음반 등의 수익에서 일정한 수수료를 취하는 방식으로는 이제 대형 기획사를 운영할 자금을 조달하기 어렵다. 게다가 CAMI는 지난 몇 년간 핵심 인력들이 회사를 떠나며 재정난에 시달렸다. 악재에 악재가 겹친 것이다.
JMGI는 직원 수 10여 명 규모의 중소형 기획사다. 예술 후원 사업 외에도 공연기획과 아티스트 매니지먼트를 담당한다. 안드레아 그리미넬리(플루트)·하비에르 페리아네스(피아노)·레너드 엘셴브로히(첼로) 등 8명의 음악가와 율리시스 콰르텟이 이곳 소속이다.
저드슨은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대형 클래식 음악 기획사는 사라질 것”이라며 냉철하게 전망했다. 클래식 음악 산업이 호황을 이루던 때와 달리, 공연 당 10~15퍼센트에 이르는 수수료 수익으로는 비용을 감당하기에 급급하다는 것이다.
대표이사로서 경영상의 이유로 다른 무언가, 예컨대 예술성 같은 것을 포기한 적이 있다면?
경영상의 이익과 예술적 가치가 상충한다는 전제에 동의하지 않는다. 매니저의 역할은 예술적인 동시에 충분한 보상이 가능한 결과를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고객 중에는 기획사에 전혀 이익이 되지 않는, 예술적인 선택을 하는 이들도 있다. 어떤 경우든 최대한 고객을 지원하려고 한다.
북미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코로나19로 인해 지난 3월부터 2021년까지 공연이 대거 취소됐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수익성은 기업의 존폐를 가르는 조건일 텐데.
말한 대로, 팬데믹은 클래식 음악 산업에 치명타를 입혔다. 공연이 열리지 않으면 기획사는 일차적인 수입원, 즉 최소한의 수익마저 낼 수 없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미국 정부는 이례적으로 다수의 클래식 음악 기획사에 해당되는 중소기업을 위한 대출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그렇다면 산업의 구조적인 측면에서, 전통적인 클래식 음악 기획사의 쇠퇴는 불가피하다고 보는가?
많은 기획사가 예술을 사랑하는 헌신적인 개인에게 의존하는 실정이다. CAMI의 실패는 상당한 자본이 투입되지 않는 한, 다른 대형 기획사 역시 존속하기 어려울 수 있음을 시사한다.
앞으로 클래식 음악 산업은 어떻게 바뀔까?
소규모 기획사, 나아가 개인 사업자가 전통적인 기획사의 역할을 대체할 것이다. 이 산업의 안정성에 관해 묻는다면, 내가 해줄 수 있는 답은 간단하다. 다시 공연을 열 수 있을 때까지 버텨내야 한다, 이것뿐이다.
JMGI는 상반기에 미국 정부로부터 대출을 지원받아 간신히 정리해고를 면했다. 그러나 대출자금이 고갈된 6월부터 여러 중소 기획사가 직원 수를 줄이고 있는 실정이다. 기금 모금을 위한 온라인 공연을 적극 추진하고 있지만, 뾰족한 수가 없는 상황. 대표이사 스티븐 저드슨의 고민은 깊어만 간다.
글 박서정 기자 사진 저드슨 매니지먼트
Nordic Artists Management · since 2006
덴마크 · 노르딕 아티스트 매니지먼트
제이콥 솔베르그 CEO
견고하게 닦은 지역의 색깔
| 주요 아티스트 |
이지윤(바이올린), 이자벨 파우스트(바이올린),
트리오 콘 브리오, 데이비드 비외크만(지휘),
안드레아스 브란텔리드(첼로),
크리스토프 에센바흐(피아노), 마르크 수스트로(지휘)
2014년, 로린 마젤이 84세로 타계했다. 여덟 살에 데뷔해 76년이란 긴 세월을 지휘자로 활동한 그는 전 세계 2백여 개의 주요 오케스트라와 7천 회 이상의 무대를 가지고, 300여 장의 음반을 남기며 클래식 음악사에 한 획을 그었다. 신동에서 거장으로의 긴 여정을 마치고 인생의 끝에 서 있던 마에스트로. 그 곁에는 제이콥 솔베르그가 있었다.
“마젤이 세상을 떠나기 불과 이틀 전, 그의 집을 찾아갔다. 앞으로의 활동에 대해 함께 의논하기 위해서였다. 그의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할 수 있었던 것은 내겐 큰 영광이다.”
솔베르그는 클래식 음악산업 분야에서만 30년 이상의 경력을 쌓아온 인물이다. 연주자로서 먼저 클래식 음악계에 발을 디딘 그는 덴마크 왕립음악원에서 바이올린을 공부했다. 졸업 직후 곧바로 덴마크 외레순 페스티벌(Öresund Festival)에 매니저로 참여하며 예술경영 관련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연주를 멈춘 것은 아니었다. 이후 17년간 덴마크 내셔널 심포니 바이올린 단원으로 무대에 오르고, 자폴스키 콰르텟의 멤버 겸 매니저로 활동하며 연주자와 경영자로서의 경험을 함께 쌓아 올렸다. 코펜하겐 경영대학원(CBS)에서 공부를 이어간 것도 그 연장선에서였다.
그러던 2006년, 솔베르그는 덴마크 코펜하겐에 기반을 둔 노르딕 아티스트 매니지먼트를 설립했다. 영국의 매니지먼트사인 아스코나스 홀트(Askonas Holt)와의 우연한 만남을 계기로 북유럽 최대의 기획사가 탄생한 것이다.
덴마크 왕립음악원을 졸업하고 바로 예술경영 분야에 뛰어들었다.
바이올리니스트로 활동한 내 경험을 다른 음악가를 돕는 데 사용하고 싶었다.
연주자로 시작해 매니지먼트 업계에 발을 디뎠다. 현장에서 음악 전공자가 가지는 이점이 있었나?
어떤 포지션을 맡느냐에 따라 다를 것 같다. 현재 내가 운영 중인 노르딕 아티스트 매니지먼트에는 음악 전공자가 반이고, 나머지 반은 경제를 공부한 사람들이다. 아티스트나 공연을 홍보하는 시작점에 있어서는 음악적 배경이 주요하게 작용하지만, 마무리하는 단계에서는 후자의 경험이 더 필요할 때가 있다.
예술경영에 참여하는 여러 방법이 있었을 텐데, 매니지먼트를 설립한 이유가 있는가?
6개월간 영국 버밍엄에서 공부할 기회가 있었다. 그때 영국의 클래식 음악 에이전시인 아스코나스 홀트의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는데, 북유럽 현지의 에이전시와 함께 일하고 싶어 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바로 노르딕 아티스트 매니지먼트를 만들었다.
노르딕 아티스트는 지역적 색깔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영역을 견고히 만들어가고 있다. “우리는 작은 지역을 대표하는 회사이기 때문에 세계적인 스타와 지역의 영웅 모두가 필요하다”는 그의 말은 소속 아티스트를 보면 금세 파악할 수 있다. 지휘자, 기악연주자, 성악가, 앙상블, 영아티스트까지 90여 명의 아티스트 중 대다수가 북유럽 지역을 기반으로 한다.
지역 기반의 아티스트가 대다수인데, 이들을 통해 느끼는 북유럽 특유의 감성이 있는가?
대부분의 북유럽 음악가들은 민속적 성격이 강한 음악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추운 날씨 때문인지 음악에서 우울함과 자기성찰적 느낌도 강하게 느껴진다. 그리그, 닐슨, 시벨리우스 등을 보면 대번에 알 수 있다. 정직함과 겸손한 사고방식도 특징일 것 같다.
소속 아티스트의 거의 절반이 지휘자이다.
그동안 젊은 지휘자를 위한 말코 콩쿠르를 진행해왔는데, 이것이 많은 지휘자와의 교류로 이어졌다. 지휘자는 다른 아티스트에 비해 더 많은 수익을 창출한다. 더 많은 연륜과 성숙한 음악성도 느낄 수 있고. 요즘에는 특히 창의적인 방식으로 음악을 만들어가는 여성 지휘자들이 눈에 띈다.
소속 아티스트로 덴마크 방송교향악단에 재직 중인 홍수진(악장)과 홍수경(첼로 수석) 자매, 베를린 슈타츠카펠레의 악장 이지윤 등 한국인 연주자도 눈에 띈다. 한국 연주자들의 현지 활동은 어떤가?
콩쿠르에 입상한 한국인 연주자들을 보면 실력이 매우 뛰어나다. 하지만 아직 북유럽 클래식 시장을 뚫고 들어오는 데는 어려움을 겪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홍수경·수진 자매가 멤버로 있는 트리오 콘 브리오는 북유럽 지역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덴마크 피아니스트가 함께하며 이 지역의 앙상블로 인식된 것이 성공 요인 중 하나일 것 같다.
노르딕 아티스트 매니지먼트에는 현재 7명의 직원이 90여 명의 아티스트와 함께하고 있다. 지역 예술가들을 중심으로 수익을 창출함과 동시에 오케스트라 투어, 칼 닐센 콩쿠르 진행 등 다양한 활동을 병행 중이다.
코로나19의 여파로 전 세계 클래식 음악계가 흔들리는 지금, 솔베르그는 “더 많은 지역 예술가와의 협업”에서 돌파구를 찾으려 한다.
지금과 같은 팬데믹은 그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던 일이다. 그 어느 때보다 정부의 역할이 클 것 같은데.
덴마크의 모든 문화기관은 100%의 세금보조를 받고 있다. 이 외에도 음악생활(미술, 건강관리 포함)을 위한 민간 자금이 마련되어 있다. 현재는 국가로부터 급여와 고정 지출 비용에 대한 지원을 받고 있다.
코로나 여파로 국가 간 장벽이 더 높아지고 있다. 이로 인해 대다수의 투어 연주가 취소되기도 했고. 앞으로 지역 중심의 기획과 운영이 더욱더 강화될 것 같다. 아무래도 예술가들의 이동도 줄고, 오케스트라 투어도 제한적으로 이뤄질 테니까. 우리도 더 많은 지역 예술가들과 협업하며 위기를 극복해보려 한다. 온라인 플랫폼 활용도 생각 중이고.
전 세계 사람들이 공연장에서의 온기와 열기를 그리워하는 나날들이 이어지고 있다. 지금의 상황에서 온라인 스트리밍이 과연 최고의 대안일까?
스트리밍 공연은 계속해서 빠르게 발전해가겠지만. 라이브 무대를 대체할 수는 없을 것이다. 처음 CD가 나왔을 때 많은 사람이 CD가 공연을 대체할 것이라 예상했지만, 모두 알다시피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수많은 공연장이 폐쇄되고 라이브 무대가 금지된 지금, 대부분의 예술가와 단체는 온라인 스트리밍 공연을 대안으로 내놓고 있다. 노르딕 아티스트 매니지먼트도 최근 작은 공연장이 있는 새로운 사무실로 이전하며 라이브 스트리밍에 대한 방안을 모색 중이다. 솔베르그는 “온라인 공연이 라이브 무대를 대체할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고 말한다. 그러나 대체 방안을 찾기 위한 그의 시도는 끊임없이 진행 중이다.
글 이미라 기자 사진 노르딕 아티스트 매니저먼트
LIU KOTOW International Management & Promotion · since 2009
미국 · 리우 코토프 인터내셔널 매니지먼트 & 프로모션
섀넌 리우, 제고시 코토프 Managing Director
흔들리지 않는 가치
| 주요 아티스트 |
루돌프 부흐빈더(피아노), 이보 포고렐리치(피아노),
김봄소리(바이올린), 콜야 블라허(바이올린),
다니엘 호프(바이올린), 미도리(바이올린),
스티븐 이설리스(첼로), 자비네 마이어(클라리넷)
유망 아티스트를 발굴할 때 입상 경력보다 내면의 음악성을 본다. 아티스트 매니저를 채용할 때도 경영이나 행정 전공생보다 음악도를 선호한다. “음악의 가치를 이해하는 사람들이 음악 시장을 만들어가야 한다”는 믿음에서다.
이런 태도에 루돌프 부흐빈더·이보 포고렐리치(피아노), 콜야 블라허(바이올린), 자비네 마이어(클라리넷), 하겐 콰르텟 등이 신뢰로 화답했다. 리우 코토프가 이렇게 음악의 가치를 힘주어 강조하는 이유는 하노버 국립음대를 졸업한 두 명의 대표가 한때 음악가의 삶을 살아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리우 알프레드 브렌델·루돌프 부흐빈더·하인리히 쉬프 등의 공연을 관리한 회사였다. 당시 아티스트 매니저로서 주요 직무는 세계적인 아티스트와 악단의 아시아 투어를 성사시키며 시장을 개척하는 것이었다.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2009년 리우 코토프를 창립한 이유는 무엇이었나.
리우 성공적인 투어 프로젝트를 몇 차례 마치고 나서, 또 다른 아티스트 및 악단과 협업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코토프가 합류한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코토프 대학 졸업 후 현악 4중주단의 바이올리니스트이자 교육자, 음악 축제의 예술감독 등으로 활동했다. 현악 4중주단에서 팀의 매니저 역할을 도맡으면서 아티스트 관리나 공연 기획 비즈니스에 대해 배울 수 있었다. 리우의 파트너로 함께 된 건 2016년의 일이다.
두 사람 모두 음악에 대한 탄탄한 이해를 바탕으로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음악 전공’, 이 업계에서 필수적인 걸까?
리우 아티스트 매니저라면 음악에 대한 높은 이해도는 당연히 큰 이점이다. 20~30년 전에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오늘날에도 음악을 전공하지는 않았지만 일을 잘 처리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 하지만 그중에는 이미 높은 인지도를 보유한 아티스트의 시장성에 기대어 비즈니스 판단을 내리는 경우가 많다. 혹은 여러 해 동안 이 음악 시장을 지켜보면서 쌓은 경험이나 본능적인 결정에 맡기기도 한다. 음악 그 자체가 기준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신인 아티스트를 발굴하는 것, 그야말로 투자의 성격을 띠는 이 일에 관해서는, 음악 그 자체를 이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어시스턴트나 투어 매니저라면 어떨까?
리우 아티스트 매니저만큼의 음악 지식이 필요하지는 않다. 이들의 직무는 전반적인 사회 경험과 문제 해결 능력을 더 필요로 한다.
리우 코토프는 최근 미국 반 클라이번 콩쿠르와 파트너십을 맺었다. 2021년에 개최될 콩쿠르 입상자들을 위한 세계 투어 공연을 기획하는 것은 물론, 수상 영역에 들지는 못 했지만 콩쿠르에서 충분한 음악성을 보여준 연주자를 발굴하는 역할까지 맡고 있다. 사실 리우와 코토프는 이미 여러 콩쿠르의 심사위원이나 해설자로 초청돼 수많은 젊은 연주자를 지켜봐 왔다. 유망 아티스트를 발굴하는 일은 그들의 중요한 사명 중 하나다.
하지만 신인 발굴 사업은 상업적 성공을 보장하지 않는다. 더욱이 리우 코토프는 콩쿠르 우승자라는 타이틀보다 오래 지켜보아야 하는 음악성에 주목한다. 예술적 가치와 상업적 성공 가능성 사이에서 고민하지는 않느냐는 질문에 리우와 코토프는 단호히 ‘노(No)’라는 대답을 내놓는다. “사업 이윤을 위해 디자인된 프로젝트는 따로 있다”는 것. 아티스트 발굴은 그 범위 밖에 있다. 전적으로 ‘투자’의 개념으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