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무력감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현대인들은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고 산다. 우리가 지난 옷을 다시 걸쳐 입는다고 해서 우리에게 사회성이, 자아정체성이 발생할 수 있는 것일까. 이번 국립현대무용단의 작품을 보고 생각했다. 나는 지금 어떤 사회적 피부를 선택하고 살고 있는지. 2012년 11월 30일~12월 2일,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
글 정우정 기자(wjj@) 사진 국립현대무용단
두 사람의 무용수가 등장한다. 처음 이 형상은 한 명의 인간과 나뭇가지 정도로 비춰졌다. 조명이 밝아질수록 형체가 드러났고, 그것은 꺾어진 나무가 아닌, 근육을 상실한(흡사 죽은 것에 가까운) 인간이었다.
무대 상수에서 등장한 남자 무용수는 축 늘어진 여자 무용수를 사선으로 끌고 갔다. 무대 중앙 앉아 그를 세우기 시작했다. 무근육 상태의 인간은 자꾸만 주저앉는다. 팔도, 다리도 심지어 고개까지도 주체(主體)하지 못한 체 끊임없이 타자의 동작에 의해 몸을 맡기던 그녀는 꽤 오랜 시간 살아 있는 인간과 실랑이를 벌렸다. 마침내 무대에 세워진 5톤 무게의 옷들 사이로 사라졌다. 잊자, 다 묻어두자는 의미였을까?
이스라엘 출신의 우리 이브기와 네덜란드 출신의 요한 흐레번이 함께 안무한 ‘소셜스킨’이 국립현대무용단의 춤으로 무대에 올랐다. 사회적 저항과 자유로 향하는 그들의 작품은 2년 전 국제현대무용제에서도 잔인함과 신선함으로 해석됐다. 이번 신작 ‘소셜스킨’의 의미는 ‘옷’이라고 했다. 역사와 전쟁, 추억이 내포되어 있는 ‘옷’. 그것은 곧 ‘사회적 피부’인 셈이다.
무리의 질서와 무질서를 형상화하던 막이 끝나자 회색 옷을 입은 군중이 들어와 옷을 고르기 시작한다. ‘우린 옷을 입고 산다’는 진부하지만 새로운 시선과, ‘선택’이라는 새로운 화두가 발생했다. 그 순간 인간의 취향은 참으로 다양하다는 사실이 환기된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각색의 옷 사이에서도 그들이 고르는 옷의 색은 일괄적인 검정색과 회색 톤이었다. 눈에 띄는 옷을 걸치기라도 하면 신체의 욕망이 살아난다고 생각했던 걸까.
옷을 입은 무용수들은 왠지 모르게 차분해졌다. ‘네 심장 소리는 내가 사는 세상(Your heartbeat makes the world I’m in)’. 한 명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고, 멜로디언과 장난감 기타로 열세 명의 무용수가 무대 중앙으로 모여 괜찮은 하모니를 선보였다. 이브기와 흐레번의 해석에 따르면 새로운 ‘사회적 피부’를 걸친 것이고, 개인적으로는 노망(老妄)해졌다고 받아들였다. 그들은 단지 노래를 부르고 있을 뿐이다. 동작은 계속해서 진부할 정도로 동심과 상상의 표현으로 치달았고, 물론 억압의 요소도 빼놓지 않았다. 5톤의 옷에 몸을 짓눌리는 장면은 사회가 주는 억압과 강요를 의미하는 듯했다. 눈앞에서 옷(즉 역사)에 의해 망각되는 무용수들의 형상을 보며 그 안에서 인간은 자의든 타의든 새롭게 죽음과 삶을 선택하게 되는 것을 읽는다.
사회학자 기든스는 현대에서의 자아 정체성을 “나는 괴상한 옷을 걸치기 시작했다”로 설명했다. 이브기와 흐레번이 지나간 옷을 주워든 것은 기든스의 의식에 반기를 든 것이다. 현대무용의 다채로운 표현의 요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의미만을 읽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작품의 상징성은 좋으나 동작이 배포한 시간에서 긴장감을 찾을 수 없었던 아쉬움 때문이다. 홍승엽 예술감독이 극찬한 무용수 박성현의 무근육의 춤은 굉장히 큰 인상으로 남아있다. 죽음과 생명을 내포한 운동의 발견은 관객으로 하여금 신체가 가진 이면의 아름다움을 선보였다. 예술의 진정한 역할은 아름다운 것을 예찬하는 것만이 아니라, 아름답지 못한 것에 시선을 두게 하는 것도 포함된다. 이들의 작품이 훈훈할 수 있었던 이유는 우리가 갖고 있는 상심을 공감할 수 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커튼콜에서 스쳐간 흐레벤의 아주 멋진 갈색신발 역시 기억에 남는다. 그것은 어떤 사회적 피부일까. 오늘을 향한 것일까, 내일을 향한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