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보르자크 연가곡과 현악 4중주 ‘사이프러스’

슬픈 사랑이 주는 또 다른 힘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3년 1월 1일 12:00 오전

드보르자크가 한 작품을 가지고 브람스만큼이나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며 개작한 경우는 교향곡도 아니었고, 오페라나 실내악도 아니었다. 무려 24년 동안 드보르자크의 가슴속에 메아리쳤던 음악은 다름 아닌 연가곡이었다. 그 힘은 무엇일까? 슈만이 클라라와 결혼한 ‘노래의 해’ 1840년에 상상할 수 없이 많은 걸작이 쏟아져 나온 것은 음악사에서 너무도 유명하다. 드보르자크 또한 선배처럼 사랑의 힘이 아니고서는 결코 세상에 나올 수 없는 가곡을 필연적으로 쓸 수밖에 없었다.
1865년 23세의 청년 드보르자크는 오르간 학교를 졸업하고 프라하의 여러 오케스트라에서 비올라 주자로 활동했다. 한편 아르바이트로 보석가게 주인의 두 딸의 피아노 레슨도 겸했다. 자매 가운데 동생 요제피네는 피아노 선생님의 마음을 온통 뒤흔들어놓았다. 하지만 그 사랑은 드보르자크에게 실연의 상처만을 주고 끝나고 말았다. 슈만이 사랑의 완성을 노래하는 음악을 썼다면 드보르자크는 그 반대였다. 그해 아픈 가슴을 부여잡고 그는 구스타프 플레거 모라브스키의 시에 붙인 18개의 연가곡을 단숨에 써내려갔다. 바로 ‘사이프러스(측백나무), 서정적이고 서사적인 시 모음’이다. 더구나 자필악보는 완전히 두 파트로 분리해 1ㆍ2ㆍ5ㆍ7ㆍ8ㆍ13ㆍ15곡은 테너가, 3ㆍ4ㆍ6ㆍ9ㆍ10ㆍ11ㆍ12ㆍ16ㆍ17ㆍ18곡은 바리톤이 부르게 하면서 느낌을 달리했다. 지극정성을 들인 흔적이 역력하다. 이것뿐만이 아니었다. 드보르자크는 15곡을 빼고는 모든 곡의 선율을 그의 다른 작품에 투영했다. 그리고 1881년 ‘4개의 노래’ Op.2로 출판하고, 1887년에는 12곡을 골라 그의 장기였던 현악 4중주로 편곡했다. 제목은 ‘노래의 메아리’였다. 2년 뒤에는 8개의 노래를 다시 골라 ‘사랑노래’ Op.83으로 출판하며 기나긴 여정을 마감했다. 결국 드보르자크가 평생의 반려자로 선택한 여인은 요제피네의 언니 아나였다. 기막힌 사연이 아닐 수 없다.
독일의 현대음악 작곡가 한스 페터 도트는 드보르자크가 놓친 1ㆍ5ㆍ10ㆍ11ㆍ13ㆍ15곡을 작곡가의 스타일에 충실히 따르며 현악 4중주 버전을 마무리 했다. 그 다음 2011년과 2012년 초에 걸쳐 헨슬러 클래식에서 원곡과 4중주 버전을 녹음했고, 2012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초연해 화제를 모았다. 테너 마르쿠스 울만이 문을 여는 첫 곡 ‘당신을 향한 열렬한 노래가’는 안개 자욱한 어두운 밤에 흐르는 사랑의 밀어가 촉촉하게 들려온다. 감정의 고양과 절제를 절묘하게 교차하는 능력이 탁월하다. 같은 곡을 도트가 편곡한 편곡 연주로 들어보면 비올라를 보이스 선율로 사용한 멋들어진 감각이 귀를 사로잡는다. 체코의 전설적인 바이올리니스트 안토닌 베네비츠에서 이름을 딴 베네비츠 4중주단, 이들의 연주는 역시 극히 체코적이다. 3곡 ‘많은 사람의 마음에 죽음이’를 노래하는 바리톤 마르틴 브룬스는 비강 공명이 적당히 섞인 매력적인 발성으로 나락으로 빠져드는 슬픔을 담담하게 읊는다. 현악 4중주는 오히려 더 급박하다. 프레제의 피아노는 울림이 정갈하다. ‘렌토’의 빠르기로 진행하는 14곡 ‘숲 속의 개울가’에서 퉁겨지는 첼로의 피치카토는 오히려 노래보다 진득하다. 세계 최초 녹음의 의미보다 연주 수준 자체가 환상적이다. 균형 잡힌 녹음과 완벽한 음향은 덤으로 주는 행복이다. 자 이제, 새해의 시작을 드보르자크 판 ‘시인의 사랑’에 빠져보자. 현악 4중주까지 함께 하니 더할 나위 없다.

글 유혁준(음악 칼럼니스트)


▲ 마르쿠스 울만(테너)/마르틴 브룬스(바리톤)/안드레아스 프레제(피아노)/베네비츠 4중주단
Hanssler Classic 98.641 (DDD, 2C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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