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배우 유준상

치열한 믿음을 그리다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3년 3월 1일 12:00 오전

유준상이 무대 위에 오른다. 그의 가슴을 울리고 나오는 소리는 아름다운 여인이 되고, 비참한 고통이 되며, 새로운 꿈이 된다. 그리고 그림이 된다. 천천히 둥글게 함께 그리는 그림. 혼자가 아닌 함께이기에, 유준상의 무대는 행복과 축복의 시간이다.

“머릿속으로 상황을 그리고, 그걸 말로 씹어서 표현해요. 궁금해 하고 상상하도록 만드는 거죠. 제가 말하는 대상은 사람일 수도, 엄청난 대저택일 수도 있어요. 중요한 건 그림처럼 그려져야 한다는 거죠. 한 마디를 외치더라도 마치 눈앞에 보이듯, 상상력을 불어넣어야 해요.”
유준상은 무대 위에서 그림을 그린다. 세상에 없던 것을 만들어내고 오랫동안 잊고 있던 것을 일깨우는 그림, 우리를 웃고 울게 만드는 그림 말이다. 그는 ‘집중’과 ‘몰입’을 그림 그리기와 연기의 공통점으로 꼽았다. “종이에 그리는 그림은 결과물을 스스로, 바로 판단할 수 있지만, 연기는 그게 어렵죠. 그래서 학생 시절부터 죽어라 연습했어요. 아무리 해도, 아무것도 안 보이니까 그냥 열심히 했어요. 노력 안 하면 끝이라는 생각으로요. 지금 많은 분들에게 사랑받고 있지만, 제가 열심히 연습해야 하는 이유는 변함없어요.”
젊은 날, 그는 연기가 재밌고 좋아서 힘든지도 몰랐다. 매일이 똑같은 반복이었다. 똑같지만, 새로움이 더해지는 반복이었다. 그래서 지루할 틈조차 없었지만, 딱히 정답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타협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생각했다. “치열하게 살자!”
“1998년 ‘그리스’를 할 땐 아침부터 새벽 3시까지 연습했어요. 그러고 몇 시간 있다가 나와서 다시 연습, 또 연습. 그런 생활이 몸에 배어 있으니까, 이제 게을러질 조짐이 보이면 제가 못 참아요.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면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든, 음악을 만들든 해요. 그러다가 또 연습하고….” 해이해 있다고 느껴질라치면, 글로 쓰든 큰 소리로 외치든 스스로에게 주의를 준다. 발전을 위해선 고민하고 방황하는 과정도 필요하지만 깊게 빠지지 말자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스스로 가혹하게, 그러나 자신은 가혹하다 느끼지 못했던 시간들은 2001년 ‘더플레이’ 무대에서 빛을 발했고, 2002년 한국뮤지컬대상 남우주연상으로 이어졌다. 대학생 시절 뮤지컬로 남우주연상을 받아야겠다는 목표가 현실이 된 순간이었다. “상 받고서, 기쁜 게 딱 일주일 가더라고요. 그 뒤에는 다시 정신 차렸어요. ‘상’이 오래가는 게 아니구나 싶었어요.”
상에 대한 욕심은 금방 사그라들었지만, 좋은 작품에 대한 열망은 더욱 커져갔다. 악마가 되지 않기 위해 고통을 참아내는 천사의 이야기를 다룬 ‘천사의 발톱’에서 맡은 1인 2역이나 2009년부터 지난해까지 서왔던 ‘잭더리퍼’의 앤더슨 역만이 아니더라도, 유준상이 출연한 대부분의 작품들은 선뜻 택하기 어려운 것들이다.
“스태프·배우 때문에 작품을 택할 때가 많았어요. 믿는 사람들과 하면 뭘 해도 재밌으니까요. 신기하게도 매번 새로운 캐릭터를 만날 수 있었죠. 그렇게 시작하고 연습에 들어가면 연출자의 의도를 적극적으로 따르는 편이에요.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가 제 안에 들어가고, 다시 나올 땐 저도 몰랐던 새로운 것들이 함께 보이거든요.”
어느 작품이든 그는 캐릭터를 다소 단순하게 준비하는 편이다. 작품과 관련된 책은 보지만, 영상 자료는 철저하게 가린다. 해외 라이선스인 ‘레베카’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영상은 너무 쉽게 기억에 남잖아요. 무의식중에 그 외적인 것들을 따라할까 싶어서 일부러 멀리해요. 혹시 영상을 보고 ‘나도 저렇게 해볼까’ 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 내 것이 아닌 남의 것을 따라하는 게 되니까요. 대신 대본에 다 담겨 있지 않은 관계 설정 같은 걸 파악하기 위해서 책을 읽거나 음악만 듣죠.”
나이가 들수록 편한 방법과 자신이 만든 틀 안에 있으려는 습성을 버리기란 쉽지 않다. 그런데 유준상은 그것을 당연하게 해낸다. 그래서인지 그가 들려준 대부분의 에피소드는 자발적으로 권위를 포기했을 때 오는 유익에 관한 것이었다. 그의 생각은 단순히 ‘배려’에서 출발해, ‘어떻게 하면 팀 분위기를 좋게 만들 수 있을까?’로 이어진다. “배려가 없으면 끝이에요. 배려 속에서 앙상블이 만들어지죠. 거기에서 인생을 배워요. 제가 무대를 좋아할 수밖에 없는 이유죠. 같이 작업하는 사람들 간에 그 믿음이 있어야 관객도 진정성 넘치는 작품을 만날 수 있어요. 이걸 계속 경험하다 보니, 또 배려하지 않을 수가 없죠. 결국 이런 것들이 서로에게 자유를 만들어주니까요.” 이 원리는 그가 있는 곳에 좋은 작품이 만들어지는 비결이기도 하다.
‘혼자’보다 ‘여럿이 함께’를 외쳐서일까. 유준상은 유독 창작뮤지컬과 인연이 깊다.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삼총사’나 ‘잭더리퍼’는 해외 프로덕션 작품을 대대적인 수정을 통해 새롭게 만든 창작뮤지컬이다. 올해 초 무대에 오르고 있는 ‘레베카’는 오스트리아 프로덕션 버전을 한국 무대에 맞춰 수정한 작품이다. 그리고 유준상은 또다시 새로운 창작뮤지컬을 준비하고 있다.


▲ 헤어 최진경 메이크업 김효정(순수)

“4월부터 무대에 오르는 ‘그날들’은 고(故) 김광석 씨의 노래들로 만들어진 작품이에요. 캐스팅이 확정된 순간부터 ‘이건 내꺼다’라는 마음으로 장유정 연출가와 정말 많은 얘기를 나눴죠. 이번에 다들 마음이 잘 맞아서 일주일 만에 1막 연습을 끝냈어요. 연습을 마치고 나니 벌써 쓰러질 것 같더라고요(웃음). 너무 힘들지만, 재밌으니까 버틸 수 있어요. 그래야 끝나서도 의미가 있고, 연습할 때 애정을 더 가질 수밖에 없죠.”
올해로 마흔넷. 유준상은 늘 무대 위에 자신을 내던지며 달려왔다. 그럼에도 지치거나 넘어지지 않을 수 있었던 데에는 배우일지의 힘이 크다. 대학교 1학년 시절 ‘기초 연기’ 수업 시간에 “배우는 일지를 써야 돼”라는 안민수 교수의 말을 들은 뒤부터 써내려간 일기는 이제 스무 권을 훌쩍 넘겼다. 시도 쓰고 그림도 그리고, 짧든 길든 그날의 소소한 깨달음을 일기에 적어놓았다. 지난해에는 그간 써온 일기를 모아 ‘행복의 발명’이라는 책을 내놓기도 했다. 한 시간 넘게 그의 치열한 이야기를 듣는 동안 문득 일기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반복은 여유를 만들고 여유는 쉼을 만든다.” 그에게 반복·여유·쉼 가운데 어느 지점에 서 있는지를 물으니 “영원한 사이클”이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훈련 없이 여유는 생기지 않아요. 그저 쉰다고 여유가 생기는 게 아니라 반복된 고통을 통해 생기죠. 그렇게 반복하고 무대에 섰는데도 불안하고 떨릴 때가 있어요. 어쩌다 그때 연습마저 충분치 않으면 관객 앞에 자신 있게 설 수조차 없어요. 그 순간을 헤쳐 나갈 수도 없죠. 전쟁하는 심정으로 올라간 무대에서 별별 일을 겪고 나면 오히려 강해진 저를 발견해요. 그리고 이게 계속 반복되죠. 그렇게 근성이 쌓이고 시간이 더 흐르면 관객이 믿고 보는 배우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유준상이 무대에 오른다. 무대 위에서 대사를 씹고, 상황을 씹고, 한 음 한 음을 채워나간다. 그의 가슴을 울리고 나오는 소리는 아름다운 여인이 되고, 비참한 고통이 되며, 새로운 꿈이 된다. 그가 그리는 무대는 자신을 새롭게 세우는 공간이자, 행복과 축복의 시간이다.

글 김선영 기자(sykim@) 사진 박진호(studio Bo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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