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옥천

남저음의 호방한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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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3년 3월 1일 12:00 오전

이옥천 명창의 소리는 중하성이 매력적인 남저음(男低音)이다. 나직하지만 우람하고도 넓은 이 소리는 그의 스승인 박녹주 명창의 성음과 거의 일치해 성황이다. 평온하게 소리를 들고 나가다가 한 번 벼락을 쳐서 집중시키는 호방한 대목이 있으니, 목소리가 약한 사람은 당해낼 수 없다.

남저음의 호방한 소리
이옥천 명창이 세 명의 관객을 두고 40분 정도 소리를 했다. 2003년 여름, 우리(김영운·김헌선·필자)는 약수동에 있는 옥당국악원에서 이옥천의 소리를 공식적으로 들었다. 이날 고수는 서울시 무형문화재 예능보유자인 정화영이 맡았다. 서울시에서 주관한 이옥천 명창의 박녹주제 ‘흥부가’의 위상을 점검하기 위해 마련된 무대였다.
‘중타령’으로 시작해 남저음으로 내놓는 묵직한 소리는 박녹주 명창을 그대로 빼닮았다. 우리는 모두 그가 내놓은 내드름을 들으며, 박녹주 소리와 닮아 있는 이옥천의 성음에 놀라고 말았다. 이옥천의 장기는 ‘제비노정기’에서 빛을 발한다. 이옥천은 스승의 표목을 어릴 때부터 배웠으므로 그 소리가 몸에 배어 ‘작은 박녹주’를 그려내고 있었다. 박녹주 명창은 고음이 나지막했으나, 상성(上聲)에서 ‘꾀목’을 쓰지 않고 통성으로 질러낸다. 박녹주 명창이 이옥천을 무릎에 두고 가르칠 때, 최상성에서 질러내는 대목이 힘드니 하청으로 부르자, 이옥천이 그대로 낮은 소리로 받아들이곤 했다. 그러자 스승은 다시 상청을 질러내어 고쳐가며 가르쳤다고 한다. 그렇게 배운 소리가 바로 ‘흥부가’였다.

흑운 박차고, 백운 무릅쓰고, 거중에 둥둥 높이 떠 두루 사면을 살펴보니, 서촉(西蜀) 지척이요, 동해 창망하구나. 축융봉을 올라가니 주작(朱雀)이 넘논 듯. 황우토·황우탄·오작교 바라보니, 오초동남(吳楚東南) 가는 배는 북을 둥둥 울리며 어기야 어야 저어가니, 원포귀범(遠浦歸帆)이 이 아니냐. 수벽사명양안태(水碧沙明兩岸苔) 불승청원각비래(不勝淸怨却飛來)라. 날아오는 저 기러기 갈대를 입에 물고, 일 점 이 점 떨어지니 평사낙안(平沙落雁)이 이 아니냐. 백구ㆍ백로 짝을 지어 창파상에 왕래하니, 석양촌이 거기노라. 회안봉을 넘어 황릉묘 들어가, 이십오현탄야월(二十五弦彈夜月)의 반죽(斑竹)가지 쉬어 앉아 두견성(杜鵑聲)을 화답하고, 봉황대(鳳凰臺) 올라가니 봉거대공강자류(鳳去臺空江自流), 황학루를 올라가니 황학일거불부반(黃鶴一去不復返) 백운천재공유유(白雲千載空悠悠)라.

‘제비노정기’의 앞부분이다. 흥부의 제비가 보은표 박씨를 입에 물고 멀리 강남에서부터 중국 대륙을 거쳐, 압록강을 지나 전라도에 있는 흥부 집까지 오는 먼 노정을 노래하고 있다. 흥부 제비는 구름 박차고, 하늘을 뚫고서, 공중에 높이 떠서 힘차게 날아온다. “거중에 둥둥 높이 떠”에서 ‘떠’는 음을 아주 길게 오르내려 제비가 선회하는 모습을 사실적으로 표현한다. 사면을 살펴보니 서쪽은 가까운데 동해는 아득히 멀다. 축융봉 올라가니 봉황새가 노닐고 있다. 흥부 제비는 소상팔경을 차례로 거쳐서 날아오고 있다. 제비는 워낙 빠르게 날기 때문에 이 노래도 제비의 날아오는 속도에 맞춰 자진모리의 급한 호흡으로 진행된다. 제비의 노정은 눈을 지그시 감고 들으면 그 풍광이 파노라마처럼 뇌리에 들어온다.
중국의 호남성 동정호는 소수(瀟水)와 상강(湘江)이라는 두 강에 근원을 두고 흐른다. 이 두 강을 따라 펼쳐지는 아름다운 경치 여덟 개를 골라 소상팔경이라 불렀다. 이 풍경은 워낙 유명해 조선시대에는 가보지 못한 중국의 명승을 하나의 교양으로 여기고 시와 그림으로 소상팔경을 예찬하곤 했다. 산시청람(山市晴嵐)·어촌석조(漁村夕照)·소상야우(瀟湘夜雨)·원포귀범(遠浦歸帆)·연사만종(烟寺晩鐘)·동정추월(洞庭秋月)·평사낙안(平沙落雁)·강천모설(江天暮雪)의 절경이 그대로 ‘흥부가’의 노정기에 들어 있다. 이 짤막한 구절에서 절승을 노래하면서도, 어딘지 모를 세상사의 쓸쓸함이 비친다. 그러나 빠른 호흡으로 노래하다 보니 소상팔경을 단숨에 지나고, 흥부 제비는 의주와 평양, 서울을 거쳐 운봉 근처의 흥부 집에 이르게 된다.

이옥천의 소리내력
이옥천은 경북 경주가 고향이다. 아버지 이선이와 어머니 김순덕 사이에서 2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홉 살 되던 해 어머니 손에 이끌려 같은 동네에 살고 있던 김향란 명창의 집으로 가면서 이옥천의 국악 인생이 시작된다. 김향란 명창은 대구권번 출신으로 송만갑·정정렬 선생에게서 판소리를 배운 이다. 이옥천은 포항에서 김향란 선생에게 6년 동안을 판소리와 춤을 배웠다.
포항여중을 졸업한 후, 이옥천은 서울 관훈동의 국악예술학교로 진학하면서 당대를 대표하는 스승들을 한꺼번에 만나게 된다. 박녹주·정권진·박초월·김소희·박헌봉이 그녀의 스승이다. 당시 국악예고는 민속음악 전승의 메카와 같은 곳이었다. 옥천은 국악예고에 진학해 박녹주 선생이 지도하는 ‘일반반’ 학생이 됐다. 그런데 박녹주 명창은 연로해 일주일에 한 시간만 입학생을 대상으로 한 수업이 있었고, 주 5일 동안 이루어지는 전공 수업은 김소희 명창이 담당했다. 소리 욕심이 많았던 옥천은 김소희 명창의 전공반 수업에 몰래 들어가 청강했다. 옥천의 소리와 모습을 본 김소희 명창이 그를 앞자리로 불러내 어쩔 수 없이 맨 앞에서 ‘심청가’ 수업을 이어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소리공부를 하고 있는데, 교무실로 내려오라는 전갈이 왔다. 옥천이 교무실로 들어서자 박녹주 선생이, “너는 내가 가르치는 반에서 공부를 하지 않고, 전공반에는 왜 갔드냐?”라고 꾸짖었다. 소리를 좀 더 많이 배우고 싶어 갔다고 대답하자, 스승은 “네 생각이 그렇다면 오늘부터 우리 집으로 와서 소리를 배워라. 그리할래?”라고 제안을 했다. 그래서 옥천은 스승의 집으로 들어가 본격적으로 박녹주제 소리 공부를 시작하게 된다. 얼마 후, 김소희 명창이 이 사연을 알고 옥천을 자신의 제자로 삼자 했지만, 옥천은 이미 박녹주 명창을 스승으로 맺었기 때문에 조심스레 사양했다. 김소희 선생은 그 무렵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는 명창이었으므로, 따르고 배우는 제자들이 많았다. 어린 옥천의 생각에 만정 김소희의 제자가 되는 것이 빠른 성공 길 같았지만, 한번 한 약속을 저버린다는 것은 스승을 배반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이옥천은 박녹주 선생의 문하에서 12년 동안 동편제 소리를 배우고 익혔다. 정통 동편제 소리를 배우면서 성격도 소리처럼 시원시원해졌다. 스승은 가난하게 살면서도 항상 넉넉한 마음을 가지고 국악인들에게 베풀기를 좋아했는데, 옥천은 스승의 그러한 습관까지도 배웠다. 남의 집에 세 들어 살면서 소리를 도제식으로 배우노라니 집주인은 물론이고, 동네 사람들에게 시끄럽다는 항의를 종종 받았다. 그래서 옥천은 한여름에도 이불을 뒤집어쓰고 배운 내용을 학습하곤 했다. 스승에게 배운 단가로는 ‘진국명산’ ‘운담풍경’ ‘초한가’ ‘적벽부’ 등이었고, 그 후 ‘백발가’도 익혔다. ‘춘향가’와 ‘흥부가’를 완창으로 배우고, ‘수궁가’ ‘심청가’ ‘적벽가’도 토막소리로 익혔다.
박녹주 명창은 노년에 가난하게 살았으면서도 꿋꿋함과 절조를 지켜온 국악인이다. 그런 스승에게 옥천은 함께하는 식구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스승은 옥천의 질러내는 목을 잘 다듬어서 완성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박녹주제 ‘흥부가’는 ‘놀부 제비 후리러 나가는 대목’에서 끝난다. ‘놀부 박타령’은 여자가 부르기에 가사가 난잡해서, 예전부터 여류명창은 배우지도, 부르지도 않았다. 박녹주 선생이 남원에 가서 김정문 선생에게 ‘흥부가’를 배울 때 그 대목까지만 배웠기 때문에 그의 제자들도 모두 같은 대목에서 마친다. 아직 결말이 남아 있는 것 같은 박녹주제 ‘흥부가’와는 달리, 박봉술제 ‘흥부가’는 ‘놀부 박타령’까지 온전히 있어 완결된 느낌이 난다.
어느날 옥천이 ‘적벽가’의 한 대목을 연습으로 부르는데, 박녹주 명창이 가만히 듣더니, “나도 ‘적벽가’를 배워 무대에서 부르기도 했지만, 내가 배워 부른 것은 무대에서 잠시 따먹을 수 있는 토막소리였다. 너는 바탕소리를 배워야 하니 내일부터 박봉술 선생에게 ‘적벽가’를 배워라”라며, 이튿날부터 박봉술 명창을 자신의 집으로 불러 제자 옥천이 ‘적벽가’를 배울 수 있도록 했다. 그렇게 옥천은 여러 해 동안 박봉술 명창에게서 ‘적벽가’와 ‘수궁가’까지 배워 익혔다. 박봉술 명창은 하성이 안정적이었지만 상청을 내는 것이 어려워 특별한 기교를 사용해 소리를 완성했는데, 전달하고자 하는 느낌이 아주 정확하게 표현됐다.
박녹주 선생과 친하게 지내던 김여란 명창이 어느 날 옥천의 공부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옥천이가 영락없이 언니를 꼭 빼닮았소!”라고 말했다. 그러자 박녹주 명창은, “그래? 나를 닮았다고?” 하며 안경 너머로 옥천을 바라보며 빙그레 웃었다. 명고수 김명환 선생은, “옥천이가 누님(박녹주 선생)의 배우지 않아도 될 목구성까지 다 배웠다”라고 말했다. 박녹주 명창과 이옥천의 사이는 제자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박녹주 선생은 특히 옥천을 편애했는데, 때문에 주위 선배들에게 시샘의 눈총도 많이 받았다. 옥천은 스승의 집으로 공부하러 들어가면서, 언제나 “선생님” 하고 크게 불렀다. 그런데 스승에게 그 “선생님” 하는 소리가 “엄마” 하고 부르는 소리로 들렸다고 한다. 옥천이 공부에 늦는 날은 “종일 기다려진다”며, 하루라도 공부하러 가지 않으면, 박녹주 선생은 “나는 너를 자식으로 친구로 애인으로 생각는데, 너는 나를 흑싸리 껍질만도 못하게 생각하지”라고 서운해 하기도 했다. 그런 이옥천은 어느 해 큰 결심을 하고 스승의 문하를 떠나게 된다. 박녹주 명창에게는 큰 아픔이었다.

이옥천, 혹은 이등우
스승의 문하를 떠나서 이옥천은 다른 의미의 자유를 느끼며 활동한다. 여성국극에 특히 힘을 쏟았다. 옥천이 여성국극을 처음으로 봤던 것은 어린 시절 ‘임춘앵과 그 일행’이 마련한 작품이었다. 옥천은 독특한 분장의 여성국극을 보자마자 그 매력에 푹 빠졌다. 여성국극이 전성기를 이룬 때는 1950~1960년대였다. 여성국극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고, 국극 배우들은 스타가 되어 팬들을 몰고 다녔다. 여성국극의 꽃은 바로, 남장 배우다. 여성국극단에 입단 후 김진진과 김경수의 뒤를 이어 이옥천이 이도령 역을 맡게 됐다.
이옥천은 이등우라는 예명도 갖고 있다. 여성국극 ‘춘향전’을 할 때, 작명가가 구경을 왔다가 이옥천 명창에게 ‘등우’라는 이름을 지어준 것이다. 이름이 두 개이듯, 그 후로 그의 소릿길도 두 갈래로 나뉘었다. 하나는 판소리요, 다른 하나는 국극이다. 이후 여성국극은 지금 그 명맥만 거의 이어올 뿐, 그 많았던 애호가들은 모두 떠났고, 학계에서도 특별하게 관심을 가져주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이등우’는 국극의 복원에 여전히 힘을 기울이고 있다. 제자들에게 자신이 보유한 ‘흥부가’와 함께, 국극도 열심히 전수시키고 있다.
이옥천은 한동안 국악계를 떠나 있기도 했으나, 1989년 국립국악원에서 박녹주제 ‘흥부가’를 완창하면서 복귀하게 된다. 이듬해에는 국립국악원에서 박녹주제 ‘춘향가’를 발표했다. 그리고 2001년 역시 국립국악원에서 박봉술제 ‘적벽가’ 완창발표회를 갖고, 판소리에의 뜻을 새로 세운다는 의미로 장흥가무악대회에 나가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2004년 1월 15일, 이옥천 명창은 박녹주제 ‘흥부가’로 서울특별시 무형문화재 제32호 판소리 예능보유자가 됐다. 그리고 2006년, 박녹주 명창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국립국악원에서 추모공연을 올리기도 했다. 시에서 지정한 판소리 예능보유자가 된 것으로, 스승에 대한 마음의 빚을 조금이라도 갚을 수 있었다는 것이 그의 회고다. 이후 이옥천 명창은 해마다 박녹주제 ‘흥부가’ 전수 발표회를 가져오고 있다. 현재 그의 제자는 100여 명. 국극의 방향성에 대해 깊은 고민을 하고 있다. 여성국극보존회를 만들어 그나마 명맥을 이어가고자 하는 노력을 다하는 이옥천은 사라져가는 ‘국극’이라는 예술에 대하여 한 가닥의 기운을 놓지 않은 이시대 명창이다.

글 유영대(고려대 교수) 사진 노승환(www.rohsh.com)


▲ 흥겨운 민요 메들리 40
1993년에 녹음한 남도 민요집. ‘태평가’ ‘창부타령’ ‘신고산타령’ ‘밀양아리랑’ ‘남원산성’ 등 전통민요 40곡을 메들리 형태로 취입하고 있다. 이옥천·조상용·홍연순이 불렀다.
(아성·태광레코드, 1993)


▲ 신바람 육자백이전집
1983년 대도레코드에서 LP로 출반된 것을 2000년에 CD로 복각했다. 남도잡가인 ‘새타령’ ‘육자백이’ ‘흥타령’ ‘남원산성’ ‘진도아리랑’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옥천은 박춘홍·홍현숙과 함께 불렀다. 가야금 박봉주, 대금 조병훈, 아쟁 김경환, 장구 이용배, 철현금 천대용 등이 참여했다. (대도레코드, 2000)


▲ 알고 싶은 우리음악 ‘국악’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주관한 2007년 국악축제인 ‘나라음악큰잔치’에서 공연된 영상을 모아 출반한 DVD이다. 이옥천 명창은 단가 ‘사철가’, ‘흥부가’ 중 ‘박타는 대목’, ‘적벽가’ 중 ‘활쏘는 대목’을 노래했다. 고수는 남경호이다.
(한국문화예술위윈회·나라음악, 2007)

이옥천 명창의 판소리 완창음반은 개인적으로 녹음한 자료만 있을 뿐 정식으로 출반되지 않았다. 서울시 무형문화재 보유자인데도 안타까운 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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