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티고네’

고전에서 발견하는 현실의 섬뜩함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3년 4월 1일 12:00 오전

지난 2011년 1월, 관객은 이전에 보지 못했던 새로운 ‘오이디푸스’를 만났다. 신이 부여한 운명에 몸부림치던 왕의 이야기가 아닌 항상 선택의 기로에서 고민하고 갈등하던 인간 오이디푸스. 마지막 장면의 충격이 아직도 뇌리에 남을 정도로 강렬한 오이디푸스를 선보였던 한태숙 연출이 이번에는 ‘안티고네’를 올린다. 소포클레스의 비극이라는 고전을 빗대어 현실을 탐색하는 일관된 그 시각이 놀라운 작품이다.
4월 15~28일까지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

아버지, 아버지 당신의 발자국을 좇아 여기로 왔어요
‘안티고네’는 커다란 기획하에 준비된 공연이다. 한태숙 연출의 전작인 ‘오이디푸스’와 함께 한 편의 공연으로 묶어내는 것이 그것이다. 저주받은 운명의 대명사 오이디푸스와 그의 남겨진 딸 안티고네의 행적은 거대한 비극적 서사로 구성되어 있는데, 소포클레스는 이것을 ‘오이디푸스’ ‘콜로노이의 오이디푸스’ ‘안티고네’로 나누어 연극으로 만들어냈다. 2천 년의 세월이 훌쩍 지난 지금, 마치 다른 이야기인 양 구별되던 오이디푸스 가문의 비극을 다시 한 편의 거대 서사로 꾸며내려는 기획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2011년의 ‘오이디푸스’가 그 기반을 다졌다면 2013년의 ‘안티고네’는 그 기획을 가시화하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고 해서 ‘안티고네’가 ‘오이디푸스’의 부록이나 속편쯤으로 이해하면 곤란하다. 매 작품마다 굵직한 문제의식을 던지는 한태숙 연출의 특성은 ‘안티고네’에서도 여지없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오이디푸스’와 마찬가지로 이번 작품 역시 김민정 작가가 각색을 맡았다. 고전을 박물관에 전시된 박제(剝製)가 아닌 꿈틀거리는 생명체로 바꾸어내는 데에는 김민정 작가의 역할이 크다. 우선 원작에 비해 크게 변한 것은 안티고네와 크레온의 성격이다. 기존 작품에서는 안티고네를 대게 열혈전사로 형상화하였다면 이 작품에서는 다양한 인간적 결들을 품은 인물로 그려냈으며, 강력함과 굳건함으로 그려지던 크레온은 노쇠하지만 의뭉스럽고 노련한 정치인으로 재창조했다. 거기에 안티고네의 여동생 이스메네의 비중을 키워 권력의 논리에 야합하는 인물을 만들어냈고 유약했던 하이몬을 좀 더 강한 인물로, 예언자 티레시아스는 보다 인간적으로, 사제는 기회주의적 정치꾼으로 그려냈다.
이러한 각색의 방향은 한태숙 연출과 오랜 논의를 통해 이루어진 것으로, 이는 곧 연출의 의도에 해당한다. 한태숙 연출은 마치 ‘오이디푸스’의 후속편으로 인식되는 이 작품에서 풍부한 철학적 질문과 대단한 정치성을 읽어낸다. 시민들이 내뱉는 한탄은 그리스의 먼 과거가 아닌 우리가 발 딛고 있는 현실을 품어내고, 안티고네와 크레온의 대립점은 현 시국을 읽어내는 날카로운 두 가지의 태도로 정리했다. 어느 편에 서도 충분히 설득당할 수 있는 논리의 투쟁이 이 작품의 핵심이자, 그럼에도 반드시 잊지 말아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굵은 선으로 밑줄을 긋고 있는 것이다.

세상은 비극이라고
안티고네와 크레온의 대립은 안티고네의 오빠인 폴리니케스의 시체를 놓고 발생한다. 크레온은 지배 권력의 논리에 따라 나라를 위태롭게 한 죄의 대가로 반역자인 폴리니케스의 매장을 법으로 금한다. 훼손된 그의 시신은 그대로 벌판에 버려졌고 시민들은 크레온의 조치에 갑론을박 자신들의 의견을 피력한다. 견고한 지배자의 법의 논리에 반발한 것은 안티고네다. 그녀의 논리는 매우 분명하다. 혈육의 매장은 신의 논리이기에 인간이 막을 수 없다는 것. 폴리니케스의 시신을 매장한 죄로 안티고네는 동굴 속에 갇히고 결국은 목숨을 끊는다.
한태숙 연출과 김민정 작가가 강조하는 바는 ‘안티고네’의 동시대성이다. 신의 논리와 법의 논리로 단순화되는 안티고네와 크레온의 갈등은 개인과 국가, 여성과 남성, 젊음과 노년 등 대립의 핵심을 무엇으로 파악하느냐에 따라 갖가지 해석이 가능해지는데, 이러한 해석을 넘어서는 보다 근원적인 것은 그 대립이 현재에도 유효하다는 발견이다.
크레온은 능구렁이 같은 정치인으로 형상화되어 불같은 안티고네를 대적하면서도 이스메네를 변절자로 활용하여 시민들을 포섭하려는 술수를 부린다. 거기에 시민의 인심을 얻기 위해 폴리니케스를 매장하지만 자신을 반역한 안티고네는 용서하지 않는다. 이는 곧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고 그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서라면 어떤 인물, 어떤 사건도 활용하는 현실의 정치인 그대로다. 시민들에게 내려지는 포고령이 마치 계엄령처럼 느껴지는 것은 크레온이 지금의 정치 논리와 전혀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안티고네는 보다 복합적 모습을 가지고 있는데, 계란으로 바위치기식의 무모함을 열혈 투사로 묘사했던 기존의 안티고네와는 달리 다각적인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어느 누구도 반대하지 않은 통치자의 논리를 전면적으로 거부한 데에는 공주로 자란 왕족의 자부심과 오이디푸스로부터 촉발된 혼탁한 혈통에 대한 부끄러움도 함께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스스로 삶을 마감하는 안티고네의 의지는 죽음으로서만 완성될 수 있는 혹은 용서될 수 있는 그녀의 다층적이면서도 균열되어 있는 복합적 정체성에 대한 결론이라고 할 수 있다. 전횡적인 권력의 논리를 폭정이라 말하며 시민들이 안티고네에 동조할 수밖에 없는 것은 그녀의 용기가 누군가는 해야 할 행동의 단초라는 것을 공감했기 때문이다.
세상은 비극이며, 이 속에서 매 순간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의 기로에 놓인 사람들. 아무리 오랜 세월이 지나가도 이 근본적 질문과 선택의 문제는 인간과 함께 존재하고 있음을,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현실임을 한태숙 연출은 안티고네의 입을 빌어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바람아 내 죽은 향기를 실어 저 세상에 가져다주어라
한태숙 연출의 작품은 묵직한 주제의식만큼이나 인상적인 시청각 장치들로 가득 차 있는 무대가 특징이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랴’나 ‘아워타운’처럼 무대의 여백을 강조하면서 인간의 삶을 연극화하기도 하지만, ‘꼽추 리처드 3세’나 ‘오이디푸스’처럼 특별하게 구상된 무대만으로도 모든 것을 설명하기도 한다. 깎아지를 듯한 9미터의 벽면에 시민들이 매달려 불안한 기운을 형상화했고 무대 전체의 경사면을 통해 오이디푸스의 균열된 왕좌를 표현했던 ‘오이디푸스’의 무대처럼 ‘안티고네’ 역시 함축적 의미가 강조된 무대를 선보인다.
무대는 뒤쪽부터 객석 앞까지 급한 경사면으로 이루어진다. 뒤쪽의 무대 높이가 6미터를 넘으니 배우들은 어지간한 언덕을 오르내리며 연기를 해야 하는 셈이다. 평지를 찾을 수 없는 테베는 그곳이 불행의 공간임을 상징하는 것이며, 경사면에 위태로이 흩어져 있는 시민들은 그들의 삶이 지닌 불안정성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여기에 특별한 무대 효과가 등장하는데, 무대 전체가 마치 지진이 난 듯 양쪽으로 갈라져 크레온이 안티고네를 가둔 ‘빛도 어둠도 분간할 수 없는 암흑’인 동굴의 공간을 만들어낸다. 그 깊이가 깊은 만큼 안티고네의 절망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시각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또한 무대의 벌어진 간극은 부자지간임에도 대립할 수밖에 없는 하이몬과 크레온의 거리를 가시화한다. 거대하고 위태로운 경사면과 그 틈 사이의 깊고 어두운 동굴. 안티고네와 크레온의 대립, 테베 시민들의 불안한 삶이 효과적으로 그려지는 무대가 된다.
‘안티고네’가 기대되는 이유 중 하나는 배우다. 한 무대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원로 배우와 중견 배우, 젊은 배우들이 서로 앙상블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노련한 정치꾼으로 캐릭터를 새롭게 해석한 크레온 역은 원로 배우 신구가 연기한다. 시민들을 꼼짝할 수 없게 포고령을 내리고 조카인 안티고네를 가두면서 법의 정의와 논리를 견고하게 실천하는 한편, 이스메네를 변절자로 이용할 줄 아는 정치 9단의 의뭉스러운 권력자 크레온은 야무지고 당당한 신구의 몸을 빌어 생명을 얻었다. 편안하면서도 다부진 발성은 크레온의 논리에 설득력을 더하고 있으며, 다양한 표정을 만들어내는 그의 얼굴은 권력을 쥔 자의 복합적 성격을 효과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무대에 선 세월만큼이나 명민한 그는 안티고네와의 긴장 관계를 명료하게 다듬은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잊지 않는다.
‘오이디푸스’에 이어 이번 작품에도 티레시아스 역으로 출연하는 박정자는 장님 예언자로서의 존재감을 한껏 무대에 드러낸다. 새와 소통하고 신의 이야기를 들어 인간에게 전달하는 티레시아스는 신비롭고 무거운 옷을 벗어던지고 보다 솔직해지고 세속적으로 바뀌었다. 저음의 탁한 목소리로 “부려먹기도 되게 부려먹네”라며 자신의 운명을 투덜거리는 티레시아스는 훨씬 인간답고, 죽음이 허락되지 않는 그의 고단함이 고스란히 배어나는 대목이다. 박정자의 여유 있는 몸짓과 느린 말투는 몇 백 년을 예언자로 살아온 권태로움을 절묘하게 살려내고 있다. 또한 그녀는 단 두 장면만 등장함에도 경사면의 무대에 힘을 실을 소품을 주문했는데, 자신의 키보다 몇 배나 긴 지팡이가 그것이다. 경사면이 가로축을 담당하고 있다면 티레시아스의 지팡이는 신의 이미지를 형상화하는 동시에 세로축을 형성하여 넓은 공간을 가득히 채우게 된다. 오랜 세월 무대에 선 그녀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근사한 아이디어다. 아직까지도 운명이나 저주를 이야기하는 것이 겁난다는 박정자의 겸손함은 티레시아스가 인간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예언자임을 짐작하게 해준다.
가장 많은 에너지가 필요한 인물은 아무래도 안티고네 역일 것이다. 차분하고 지적인 연기를 선보였던 김호정은 안티고네를 이전에 볼 수 없었던 다채롭고 복합적 인물로 표현하는 데에 골몰하고 있다. 작고 야윈 그녀의 몸은 쉽게 부서질 것 같은 아스라함을 지녔지만 놀라울 정도로 짧게 깎은 머리는 그녀의 의지와 논리가 매우 단단하고 견고한 것임을 직접 보여준다. 저돌적이면서도 혈통에서 비롯된 근원적 불안과 비정상적 성향, 그리고 공주로서 혹은 왕족으로서의 오만함도 가질 수 있다는 그녀의 캐릭터 분석은 그동안의 안티고네가 얼마나 획일화되었던가를 돌아보게 한다. 이스메네 앞에서는 혈육으로서의 연민이, 하이몬에게는 연인으로서의 미안함이, 크레온에게는 끝없는 애증이 교차해야 하는 복잡한 안티고네의 성격은 무서울 만큼 큰 울림을 주는 김호정의 대사를 통해 입체화되고 있다.
사제 역의 신덕호는 신을 섬기는 종교인이자 크레온을 옆에서 보필하는 현실 정치인의 복합적 성격을 표현하는 데에 주력하고 있다. 오이디푸스 시절의 기억이 현실논리의 기반이 되었다고 사제의 행동을 이해하는 그는, 크레온과 함께하지만 결국은 테베와 함께 몰락하는 길을 선택하는 것이 관객에게 설득력 있게 다가가도록 만들어내는 데 힘쓴다. 권력의 편에서 나름대로 객관성을 지니고자 하는 중간자적 태도는 신덕호의 냉소적 표정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파수꾼 역의 손진환과 하이몬 역의 이갑선, 이스메네 역의 윤현길을 비롯, 시민들을 연기하는 젊은 배우들은 티레시아스에게 불길함을 전달하는 새가 되기도 하고, 크레온의 법에 각자의 방식으로 불만을 토로하는 시민이 되어 그 옛날 테베를 지금의 한국으로 바꿔놓고 있다. 이경은의 안무로 만들어질 이들의 역동적이며 불안한 움직임은 경사진 무대 위에서 작품의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킬 것이다.

모든 걸 버려도 너는 버릴 수가 없다고
짐작했겠지만, 이번에는 소제목을 작품 속에 나오는 노래 가사에서 인용했다. 대사에 대해 함축적이면서도 경제적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고충을 토로한 김민정 작가의 고민이 느껴지는 시적 표현들이다. 더불어 고전이 생명력을 얻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안티고네가 크레온을 향해 외치는 말들, 시민들이 폴리니케스의 시체를 둘러싸고 뱉어내는 한숨들은 인간을 지배하기 위한 법의 논리와 정의의 논리가 야기하는 불합리와 폭력성을 곱씹어보게 한다. 이러한 모순의 현실 속에서 모든 걸 버려도 버릴 수 없는 것, 바로 인간이다. 인간이 중심인 사회, 상식이 통하는 사회, 그리고 일방적 강요가 아닌 서로가 소통하는 사회. 안티고네가 그 옛날에 목숨을 걸고 지키려 했던 것들이 지금의 우리에게도 유효하다는 것은 섬뜩한 발견이자 우울한 인정(認定)이다. 다른 나라, 다른 시대의 이야기라며 소홀했던 그 속에 지금 우리의 자화상이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고전이란, 고전의 힘이란 이렇게 부지불식간에 현대의 인간들에게 몸서리치는 깨우침을 주는 것인가 보다.

글 배선애(연극평론가) 사진 국립극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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