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고전 ‘그리스인 조르바’가 새롭다. 배삼식의 번안과 각색으로 탄생한
한국판 조르바 ‘라오지앙후 최막심’은 고전의 본질과 현재의 새로움 사이에서 태어났다.
1941년 러시아 연해주 조선인 집단 거주지 앵화촌을 배경으로 삼는 무대에는 중국어와
러시아어가 함께 들려오고, 배우들이 직접 악기를 연주하는 유랑악단 음악이 등장한다.
5월 8일~6월 2일, 명동예술극장.
명동예술극장이 고전극장으로서의 면모를 확실히 다지고 있다. 재개관 원년에 올린 ‘밤으로의 긴 여로’와 ‘베니스의 상인’을 비롯해서 ‘한여름 밤의 꿈’ ‘유랑극단 쇼팔로비치’ ‘돈키호테’ ‘헤다 가블러’ ‘아워타운’에 이르기까지 고전 명작 공연들이 해를 거듭할수록 탄력을 받고 있다. 최근에는 ‘광부화가들’ ‘예술하는 습관’ ‘그을린 사랑’ 등 무게감 있는 해외 신작 공연과 균형을 맞추는 한편 고전 레퍼토리 선정에 점점 더 과감해지고 있다. 이번 공연 ‘라오지앙후 최막심’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가 원작이다. 그리스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대문호 카잔차키스의 대표작 ‘그리스인 조르바’를 배삼식이 한국적 상황으로 번안·각색하여 ‘라오지앙후 최막심’이라는 작품으로 다시 썼다. 연출은 감각적이고 섬세한 무대를 보여주는 양정웅이 맡았다.
자유인 조르바, 톨스토이와 고리키 시대의 오디세우스
마침 전 세계적으로 고전이 다시 인기다. 영화 ‘레미제라블’이 흥행에 성공했고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도 영화로 만들어져 개봉을 앞두고 있다. 사막의 밤에 별빛 하나에 의지해 길을 찾거나 격랑 속에서 등대 불빛 하나에만 의지하게 되는 것처럼 삶이 혼란스러울수록 단순한 원리를 찾게 된다. 최근 영화화되고 있는 고전들이 주로 근대 초기 사실주의 소설들이라는 점에서 ‘자본주의의 막장을 지나고 있는 지금’ 시점에서의 겹쳐 읽기를 시도하고 있는 평자도 있다. 인문학 저서들이 다시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르고 있는가 하면 전 세계적으로 전환기의 징후가 뚜렷하다.
‘그리스인 조르바’ 또한 마찬가지다. 책이 처음 출간된 것은 1947년이지만 카잔차키스가 소설 속의 실제 모델인 조르바를 만난 것은 1917년이다. ‘그리스인 조르바’는 터키 지배 아래 있는 그리스 독립운동 시기와 러시아 혁명기를 배경으로 유럽과 아시아·시베리아의 국경선을 횡단하고 떠도는 이야기다. 카잔차키스 자신이 조국인 그리스를 비롯해서 프랑스·영국·독일·이탈리아·러시아·중국·일본·팔레스타인·이집트를 떠돌며 평생 글을 쓴 ‘20세기의 오디세우스’이다. 조르바 역시 민족과 국가의 경계선을 넘어 온몸으로 자유인의 삶을 산 오디세우스였다. 카잔차키스와 조르바는 톨스토이와 고리키 시대의 오디세우스들인 셈이다.
실제로 카잔차키스는 젊은 시절 톨스토이를 읽고 “톨스토이가 멈춘 곳에서 다시 시작할 것”을 맹세한 적이 있으며, 고리키의 신념을 품고 터키 지배하의 그리스 독립운동의 전쟁터로 떠난 친구의 이야기를 ‘그리스인 조르바’의 첫 출발지점으로 삼고 있다. ‘그리스인 조르바’는 고리키의 신념을 따르는 친구 스타브리다키가 조국 해방의 전쟁터에서 죽음을 맞고, ‘정신적 낙태’ 상태에서 단테 문고판을 들고 여행을 떠난 지식인 주인공이 고대 그리스인의 원형에 가까운 조르바를 만나 깨달음을 얻는 과정의 세 축을 중심으로 삼고 있다.
“나는 자유다” 민족과 국가로부터의 자유도 가능한가?
조르바는 말한다. “두목, 나는 당신이 들으면 머리카락이 쭈뼛할 짓도 조국을 위해서랍시고 태연하게 했습니다. 나는 사람의 멱을 따고 마을에 불도 지르고 강도짓도 하고 강간도 하고 일가족을 몰살하기도 했습니다. 왜요? 불가리아 놈, 아니면 터키 놈이기 때문이지요. 요새 와서는 이 사람은 좋은 사람, 저 사람은 나쁜 놈 이런 식입니다. 그리스인이든, 불가리아인이든 터키인이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좋은 사람이든 나쁜 놈이든 나는 그것들이 불쌍해요. 모두가 한가집니다. 불쌍한 것! 우리는 모두 한 형제간이지. 모두가 구더기 밥이니까.”
그리스 비정규 무장단체에서 민족과 조국의 이름으로 약탈과 살인을 일삼았던 조르바는 자신이 살해한 신부의 아이들이 비참하게 구걸하고 있는 것을 목격하고 “조국이 있는 한 인간은 짐승 신세를 벗어나지 못함”을 깨닫고 이 모든 것으로부터 도망치기로 한다. 자유인 조르바의 ‘자유’는 낭만주의의 자유보다는 아나키즘의 자유 개념에 더 가깝다.
“그런데 여자라면… 젠장, 눈이 빠지게 울고 싶어집니다요. 두목, 당신은 내가 여자를 너무 좋아한다고 놀리지요. 내가 어떻게 이것들을 좋아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젖통만 쥐면 무슨 짓을 하는지도 모르고 손을 들어 버리는 이 가엾은 것들을 말입니다.” 조르바는 정직하게는 두 번, 비양심적으로 치자면 천 번, 이천 번, 삼천 번 결혼했다고 너스레를 떤다. 한술 더 떠 그리스 신화의 제우스까지 끌고 들어와, 암양들을 한꺼번에 네댓 마리 해치운 ‘가엾은 숫양’이라고 변호한다. 자신 또한 제우스와 같은 ‘위대한 순교자’라고 강변한다.
그렇게 제우스는 여자들에게 마지막 한 방울까지 남김없이 빨아 먹혀 죽어버리고 그 뒤를 이어 그리스도가 이 땅에 내려와 “여자를 조심할지니!”라고 말하게 되었다고 그리스 신화를 자유자재로 변형시키는가 하면, 성(性)의 해방을 통한 종교 비판 또한 서슴지 않는다. 조르바의 건강한 성에 비해 수도원 수도승들은 동성애에 얽힌 살인을 자행하고 있다. 카잔차키스는 신성 모독의 이유로 교회로부터 끊임없이 위협당하기도 했다. 민족과 국가와 종교로부터 자유로운 카잔차키스의 모습 자체가 철저한 자유인의 모습이다. 카잔차키스의 묘비명은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이다.
라오지앙후 최막심, 배삼식표 제2의 노마드적 인물
아프리카로부터 불어와 여자와 과일을 익게 하는 바람, 제우스 그리고 조르바. 신성성과 해학이 유쾌하게 뒤섞이는 해방적 에너지. 그리스(인)를 다시 묻는 것은 인간의 삶이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를 근원적으로, 아무런 금기(禁忌)없이 다시 묻는 일이기도 하다. 이것이 오랜 세월 이 작품이 사람들의 가슴을 뛰게 한 이유가 아닐까. 민족과 국가의 경계를 넘어, 인간과 동물의 경계를 넘어, 대지에 두 발을 굳게 딛고 서 있는 수컷 그 자체의 자유를 말하는 ‘그리스인 조르바’. 과연 이 작품은 지금 현재, 우리의 현실에서 어떻게 다시 살아날 수 있을까? 배삼식의 새로운 대본 ‘라오지앙후 최막심’을 받아들고 첫 번째로 들었던 궁금함이다.
‘그리스인 조르바’는 이미 유명한 고전이고, 1964년엔 앤서니 퀸 주연의 영화로 만들어져 대중적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최근엔 ‘니코스 카잔차키스를 품고 그리스를 가다’라는 부제가 붙은 그리스 기행문 ‘문명의 배꼽, 그리스’가 출간되기도 했다. 텔레비전 모 프로그램에서 소개된 이후 작년 한 해 베스트셀러 10위 안에 계속 오르내리기도 했다. 한국적 상황으로의 번안뿐만 아니라 각색의 부담 또한 만만치 않아 보인다.
그런데도 배삼식의 싸움은 가뜬해보인다. 1941년 러시아 연해주 조선인 집단 거주지 앵화촌, 주인공 김이문과 최막심·월남 하노이 출신 여관 주인 오르땅스와 러시아 혼혈인 젊은 과부 로사·독립군 무장단체의 비밀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집단적으로 재배하는 아편 농사와 촌로 조선달과 아편 중독의 무당 진펄댁 등 의외의 설정과 기상천외한 인물들이 거침없이 등장한다. 원작의 방대한 에피소드들이 동네 바보 천보에게까지 골고루 분산되어 대사 분량도 적절히 안배되어 있다. 중국어와 러시아어가 함께 섞여서 들려오고, 1930~1940년대 대중가요들이 손풍금과 기타·우크렐레·발랄라이카·사물과 함께 흘러나온다.
‘라오지앙후 최막심’, 제목 또한 예사롭지 않다. 라오지앙후는 떠돌이라는 뜻의 중국어라고 한다. 그리고 한국판 조르바인 최막심의 이름 막심은 어머니가 날 낳고 후회가 막심했다, “일생일대 최고로 후회 막심한 일이다”라는 너스레와 함께 소개되는 한편 ‘밤주막’과 ‘어머니’의 막심 고리키로부터 따온 이름이라는 작가의 설명이 덧붙여진다. 중국어로 불리는 떠돌이 라오지앙후, 조선 이름 최가, 막심 고리키의 막심이라… 배삼식의 입담이 여간 여문 것이 아니다.
배삼식의 자유로운 횡단과 유희본능, 그러고 보니 배삼식에게는 꽤나 익숙한 모습이기도 하다. ‘열하일기만보’의 그 배삼식이다. ‘열하일기만보’에서는 연암 박지원을 우울증 걸린 말하는 나귀로 등장시키고, 욕정도 죄의식도 없는 건강한 성의 쾌락을 보여주는 만만의 사랑 이야기, 온갖 이질적인 것들이 섞인 기이한 이야기들이 가득했다. ‘라오지앙후 최막심’의 최막심은, ‘열하일기만보’의 나귀 연암에 이어 배삼식표 제2의 노마드적 인물인 셈이다. 카잔차키스와 조르바와 최막심과 배삼식이 만나고 있는 참으로 절묘한 지점이다.
세대를 아우르는 공감과 치유의 공연
“‘그리스인 조르바’는 어머니의 애독서이자 서가에서 가장 잘 보이는 곳에 꽂혀 있는 책이었다.” 연습실에서 만난 연출가 양정웅에게 ‘그리스인 조르바’에 대한 인연을 묻자 반갑게 되돌아온 답변이다. 더불어 청소년기에 어떤 책을 좋아했느냐는 질문에, 톨스토이의 ‘부활’을 고등학교 때 내내 옆구리에 끼고 다녔다고 한다. 청소년기에 읽었던 고전들이 지금도 좋다고 말하며 살짝 흥분한 듯 말을 이어간다. 지금은 예전에 비해 훨씬 풍요로운 시대지만 더 혼란스럽고 우울하고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고전은 그런 우리 삶의 본질을 꿰뚫어 보여주는 힘이 있다는 말도 함께 덧붙인다. 이 작품을 통해서도 관객들이 명작을 다시 읽고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한다.
작가 배삼식와 연출가 양정웅의 만남은 이번이 처음이다. 양정웅은 “다루고자 하는 문제를 피해가지 않고, 정직하게 밀고 나가는 힘이 있다”라고 배삼식을 소개한다. 양정웅 스스로는 “시적 압축과 생략의 양식성과 미니멀리즘이 강한 연극성을 추구해왔다”고 자평하는 한편, 배삼식과의 작업이 다른 스타일과 감성을 수용하는 만남과 충돌이자 그것이 곧 연극적 만남의 방식이라고 말한다. 연극성과 음악성을 중시하는 연출답게 이번에도 배우들이 직접 악기를 연주하는 유랑악단 스타일의 단순하고 어쿠스틱한 음악을 시도하고 있다. 음악감독으로는 대중음악계에서 활동 중인 일본인 음악가 하찌가 참여하고 있다. 양정웅 하면 떠오르는 감각적인 무대가 배삼식의 단단함과 어떤 조화를 보여줄지 기대되는 대목이다.
‘한국판 조르바’ 최막심을 통해 일제 말 민족과 국가의 경계에서 일탈과 카타르시스를 경험하는 사람들에 대한 묵직한 주제의식을 던지고 있는 배삼식과 건강하고 짐승 같은 삶의 본능으로 문제를 돌파해나간 최막심을 무대에서 현재화시켜서 보여주는 양정웅. ‘그리스인 조르바’라는 고전을 매개로 부모 세대와 젊은 세대가 함께 공감하고, 지금 현실의 문제를 다른 시대와 공간의 이야기를 통해 반추하여 해결의 실마리를 얻는 치유의 공연을 기대해본다.
글 김옥란(연극평론가) 사진 명동예술극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