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민희 가곡실격 ‘나흘 밤’

그녀와 가곡이 욕망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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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3년 5월 1일 12:00 오전

‘필요(needs)’가 아니다. 가곡은 우리에게 꼭 필요하지 않다. 과거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우리는 가곡이 없이도 살 수 있다. 그러나 가곡을 하는 사람은 숭고하다. 가곡의 보존적 가치도 충분하다. 하지만 다시 현실은 가곡을 원하지 않는다. 가곡은 아름답게 존재할 수 있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가곡도 이제 ‘욕망(desire)’의 대상이어야 한다. 4월 4~5일, 국립극단 소극장 판.
글 윤중강(음악평론가) 사진 페스티벌 봄

여창가곡을 아는가? 여인이 다소곳하게 앉아있다. 시선은 한 곳을 고정한다. 표정의 변화가 거의 없다. 노래를 하기 위해 입은 움직이고 있다. 너무 크게 벌리면 격에 어울리지 않는다. 더불어 긴 호흡으로 이어지는 장단을 놓치지 않기 위한 손가락의 작은 움직임. 이것이 소위 가곡의 품격이다.
그녀는 당돌하다. ‘박민희의 가곡실격’ 공연 제목부터 자신의 이름을 내걸었다. 실격(失格)을 서슴없이 내세운 것은 파격이다. 언뜻 보면 박민희는 가곡의 파괴자가 된 듯 보인다. 그녀는 공간을 움직이며 서서 노래를 하고 있다.
전통 가곡과는 다르다. 박민희가 그저 그런 젊은 여성으로 보이게 하는 ‘모던한 룩’은 마치 그녀가 현실적인 욕망의 주체로 보인다. 젊은 여성의 소소한 심리가 가곡을 배경으로 펼쳐지고 있다. 우리는 더불어 가곡이 욕망하는 것도 함께 보게 된다.
확성과 화성과 악기가 없는 삼무(三無)의 이번 무대에서는 박민희를 비롯한 다섯 명의 출연자가 마이크 없이 육성으로 노래를 시작한다. 그렇게 나흘 밤을 경험했다.
하룻밤은 애매모호하다. 박민희는 일단 가곡이 ‘노래’라는 것에 의문을 갖게 만든다. 마치 소소한 일상이 담긴 ‘일기’를 쓰듯이 어두컴컴한 곳에서 비밀스럽게 소리를 낸다. 우리는 마치 그녀(들)의 방을 훔쳐보고 있는 것 같다. 그녀들의 모습을 제대로 보기에는 무대가 어두워 괜한 궁금증이 생긴다. 노래, 몸도 전체가 아닌 부분을 들려주고 보여주니, 결핍을 각인시키고 욕망을 자극시킨다.
이틀 밤은 망연자실하다. 그녀는 무대 뒤편에 설치한 농구대와 같은 곳에 올라가 있다. 이제 서서히 그녀가 속내를 드러낸다. 그에 따라 가곡도 제 모습을 드러낸다. 마치 옥탑방 처녀가 별을 보면서 소원을 비는 장면과 같다. ‘그녀가’ 더불어 이제 ‘가곡이’ 그동안 갇혀 있던 골방에서 나와 아쉬운 대로 ‘그녀의’ 혹은 ‘가곡의’ 광장으로 나온 셈이다. 그동안 가곡 속의 여인은 모두 조선시대 속에 사는 여자라고 치부했지만 오늘의 가곡 속의 여인은 지금을 사는 한국 여자도 될 수 있다.
사흘 밤은 ‘거리 두기’다. 내가 그녀에게 다가갔으나, 그녀는 이제 나를 외면한다. 요즘말로 한다면, 그녀들은 ‘밀당의 귀재’였다. 옥탑방의 그 모습에 끌려서 찾아갔지만 그녀는 나를 선뜻 받아들이지 않는다. 마치 토라진 것처럼 무심하게 노래한다. 가곡을 아주 ‘쿨하게’ 부른다. 내게 시선을 주지 않은 채 자기 노래만을 반복하고 있다. 가곡이 만들어낸 ‘소격효과’를 경험한다. 객관적 거리를 확인하면서 주관적 가치를 판단하게 한다.
이어지는 나흘 밤은 ‘신체반응’이다. 노래하는 세 여자는 어둠을 틈타 요조숙녀의 자태로 우리의 뒤와 곁에서 노래를 한다. 그런데 내 곁에 살짝 앉아있는가 싶더니, 또 다른 사람에게로 이동했다. 무대 중앙에는 두 명의 무용수가 있다. 과거 가곡에서 손가락으로만 허용됐던 움직임이 이제 온몸으로 확대되어서 신체반응을 일으킨다. 이제야 우리도 가곡의 모든 것을 알 것만 같고 함께 몸으로 반응할 수 있게 될 것 같다. 그녀가, 그리고 가곡이 나를 변화시켰다.
이번 공연을 지켜본 사람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공연을 즐겼을 것이다. 방식과 정도는 달라도 분명한 것이 하나 있다. 박민희를 통해 가곡이란 대상을 욕망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세상은 필요가 아닌 욕망에 의해 움직인다. 가곡도 그래야 한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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