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나가 연출을 맡은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는 개막 전부터 초미의 관심사였다. 지금까지의 행보로 보아 그녀가 과거의 성가극 같았던 우리말 버전을 아무 비판 없이 그대로 답습하진 않을 것이라는 기대가 컸기 때문이다. 마침내 뚜껑이 열린 이번 무대는 원작의 도발적인 해석에 음악적 변화로 신선함을 더했다. 6월 9일까지, 샤롯데씨어터.
글 원종원(뮤지컬 평론가·순천향대 교수) 사진 설앤컴퍼니
이만큼 유명하면서 이렇게 잘못 알려진 작품도 없다.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를 두고 하는 말이다. 국내에선 거룩한 성가극쯤으로 알려져 있는 이 뮤지컬은 사실 도발적이기까지 한 실험과 도전으로 논란의 중심에 섰던 작품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겟세마네 언덕에서 부르는 예수의 기도가 그렇다. 사람의 몸을 빌려 세상에 태어난 그가 죽음에 대한 인간적인 고통 속에서 예언 속 문구대로 자신을 희생하고자 결심하는 이 유명한 기도 장면은 뮤지컬에선 록 밴드 리드 싱어의 찢어질 듯한 고성으로 재연된다. 덕분에 결연한 예수의 결심은 듣는 이를 할퀴기라도 할 듯 처연히 펼쳐진다. 또, 막달라 마리아의 노래 ‘어떻게 그를 사랑하나(I Don’t Know How To Love Him)’를 유다가 자살할 때도 부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정말 드물다. 그 유명한 선율에 유다가 “그도 나와 똑같은 보통사람인데, 이젠 그가 너무 두렵다”라며 피를 토할 듯 절규하면 하늘 높은 곳 어디에선가 “잘했다 유다, 불쌍한 유다”라는 천상의 소리가 울려 퍼진다. 그가 예수를 배신함으로써 비로소 신화가 완성되었다는, 그래서 시각에 따라 유다의 행위가 곧 예수의 위대함을 완성하기 위한 전제조건이었고, 따라서 그 스스로가 희생양으로 선택된 운명이라는 해석도 가능하다는 의미다. 종교적으로는 불경스럽다고까지 할 수 있는 무대만의 발칙한 상상이다.
2013년, 우리 무대에 다시 오른 이지나 연출의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는 일단 신선하다. 이번 무대는 거룩한 성가극 같던 지금까지 우리말 공연의 직설적이고 남세스럽던 신앙고백(?)을 과감히 지워버리고 원작의 도발적인 해석을 다시 입혔다. 어떤 장면에선 오히려 원작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 부분도 있다. 유다가 스스로 역사의 배신자가 될 것이라 노래하는 모습이나 덜 아둔하게 그려진 사도들의 모습이 그렇다. 원작의 노랫말보다는 이지나식 해석이 가미된 번안도 변화된 부분이다. 덕분에 “키스로 배신해야만 했니?”라는 유다를 향한 예수의 노랫말은 “배신의 시간이 왔다”라는 가사로 바뀌었고, “지난 3년이 30년, 90년 같다”도 “영원처럼 느껴진다”라는 의역으로 대체됐다. 때로 영어를 섞어 부르는 배우들의 노래는 요즘 아이돌 밴드들이 부르는 대중음악과도 비슷하다. 어색하기도 하지만 원래 음률을 최대한 살리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음악적 변화는 귀를 쫑긋하게 한다. 변주와 편곡의 솜씨가 맛깔스럽다. 원곡을 과감히 해체해 극적 구조에 맞게 재해석하고 재배치한 부분에선 과감성도 느껴진다. 같은 극장의 다른 뮤지컬 작품들이 늘 소리에 문제가 많던 점을 떠올려보면 음향도 훨씬 좋아졌다. 로비에서 만난 연출자가 음악을 중심으로 감상해달라는 말을 한 의도를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배우들도 매력적이다. 특히 예수 역으로 나오는 마이클 리와 박은태의 무대는 각기 다른 재미를 선보인다. 마이클 리가 온몸을 불사르며 날소리 그대로의 격정 어린 연기를 보여준다면, 박은태는 정갈하면서 깔끔하게 그만의 창법으로 고역대의 음역을 자유자제로 유영하는 재미를 전해준다. 음악적으로는 박은태가, 무대 위 캐릭터로는 마이클 리가 반 발자국씩 앞서 있다. 누구 공연을 추천한다는 말조차 건네기 힘든 호각지세다. 도발적인 상상력을 보태고 신격화의 그림자도 거둬냈지만, 역설적으로 더욱 감동 어린 작품이 된 것이 흥미롭다. 예수는 기적도 부활도 하지 않지만 그의 희생이 주는 감동은 더 생생하게 재연된다. 원작자의 노림수도 결국 이것이 아니었을까. 모처럼 만나는 가볍지 않은 뮤지컬이 반가운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