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人(in) 체홉’

짧은 웃음, 그 안에 인생 한 자락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3년 7월 1일 12:00 오전


▲ ‘곰’ 김태근·서정연


▲ ‘청혼’ 최용민


▲ ‘청혼’ ‘곰’ 유준원


▲ ‘백조의 노래’ 박정자

또 체호프다. 다시 체호프다. 아니, 새로운 체호프다. 분명 체호프의 작품이지만 이번에는 기존 작품들과는 다르다. 극장에서 흔히 만나는 체호프의 4대 장막극이 아닌 단막극이 옴니버스 형식으로 전개된다. 체호프 작품을 지속적으로 무대에 올려온 연출가 오경택을 중심으로 열네 명의 배우들이 뭉쳤다. 연습실에서 만난 14명의 배우들은 짧은 이야기 속에 숨어있는 체호프의 시선을 유쾌하게 체현(體現)하고 있었다.
6월 18일~7월 7일, 프로젝트박스 시야.

촌철살인(寸鐵殺人)의 유머 작가 체호프
체호프는 생계를 위해 단편의 유머 작가로 작가 활동을 시작했다. 수많은 단편을 모아서 ‘관리의 죽음’ ‘카멜레온’ 등의 단편집을 발간했고, ‘지루한 이야기’ ‘유형지에서’ 등의 작품을 발표하여 유명세를 얻은 소설가이기도 하다. 그가 본격적으로 희곡 창작에 힘을 기울인 것은 폐결핵이 악화된 말년에 접어들면서다. 잘 알려진 체호프의 4대 장막극인 ‘갈매기’ ‘세 자매’ ‘바냐 아저씨’ ‘벚꽃동산’이 대체로 1896~1997년과 1901~1903년 사이에 발표됐으니 희곡은 체호프에게 삶의 의미를 종합할 수 있는 장르였던 셈이다. 이 작품들은 몰락·죽음·떠남 등 비극적 상황을 제시하면서도 체호프 스스로 자신의 작품을 코미디라고 명명할 만큼 작품의 기본적 정서는 경쾌하다. 유머 작가로 출발한 체호프의 시선과 태도를 상기하면 작품 속에 양립하는 비극적 상황에 희극적 정서라는 모순은 오히려 자연스럽게 여겨진다.
이처럼 희비극의 요소가 함께 어우러진 것이 체호프 장막극의 특징이라면 그의 단막극은 대체로 희극적 요소가 강하다. 체호프가 짧은 이야기 속에 담아내는 인생의 면면들은 뜨겁고 격정적이면서도 바로 그로 인해 우스꽝스럽다. 우리가 살아온 인생을 되돌아보았을 때, 숨 막히게 힘들었거나 말도 안 되는 고통의 연속이라고 생각했던 시기를 회상할 때, 그땐 왜 그랬을까, 웃어넘기는 태도. 체호프의 단막극은 바로 그러한 관조와 성찰의 태도가 밑바탕에 깔려 있다.
‘14인 체홉’에서는 총 4편의 단막극 ‘백조의 노래’ ‘곰’ ‘청혼’ ‘담배의 해로움에 대하여’와 ‘불행’이라는 한 편의 단편소설을 무대에 올린다. 노배우의 쓸쓸함을 담아내는 ‘백조의 노래’를 제외한 나머지 단막극은 기가 막힌 코미디이다. 당장 내일 갚아야 할 돈이 필요해 과거에 빌려준 돈을 받으러 찾아간 빚쟁이가 그 집의 젊은 미망인의 매력에 빠져 적극적 구애를 하고, 죽은 남편에 대한 정조를 지키리라 맹세한 미망인은 그렇게 곰처럼 밀어붙이는 남자의 저돌적 행동에 매료되어 사랑에 빠지는 ‘곰’. 청혼을 하러 간 남자가 청혼할 여자와 대화를 나누던 도중 그 목적을 잊은 채 땅의 소유에 대해서 혹은 자신의 개가 더 낫다고 싸우다 얼떨결에 결혼이 성사되는 ‘청혼’. 담배의 해로움에 대해 강연을 하러 나온 남자가 사실은 강연 내내 담배가 아닌 아내의 해로움에 대해 일장 연설을 펼쳐내는 ‘담배의 해로움에 대하여’까지. 각각의 인물들은 모두 매우 위급하거나 중요한 국면을 맞이하고 있음에도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정작 처음 목적한 것은 잊어버리고 사소한 것에 몰입하는 상황을 연출한다. 체호프는 단막극을 통해 인간이라면 누구나 대면할 수 있는 일상의 면면에서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일들이 빈번하게 일어나는지를 보여줌과 동시에 그것이 보편적 인생임을 이야기하고 있다. 짧은 말로 폐부를 깊숙이 찌르는 촌철살인의 미학, 체호프의 단막극은 웃음을 통해 인생을 통찰하는 날카로운 침(針)이다.


▲ 연출가 오경택


▲ ‘곰’ 정수영

열네 명의 배우가 만드는 닮은 듯, 다른 작품들
오경택은 체호프의 작품을 무척이나 아낀다. 이미 ‘갈매기’와 ‘벚꽃동산’을 공연한 그는 체호프의 모든 작품을 공연하고 싶다는 열의를 갖고 있다. 그가 체호프를 좋아하는 이유는 의외로 간단명료하다. 위대한 극작가이기 때문에. “갈등을 전면화하는 전통적 의미의 극작술을 깨면서도 인간에 대한 가장 따뜻한 시선을 가진 작가가 체호프”라는 그의 설명은 체호프 작품의 특징을 매우 잘 간파하고 있었다. 장막극에서 단막극으로 방향을 선회한 것은 기획을 마련하고 공연을 준비하는 시간이 짧았기 때문인데, 덕분에 체호프의 단막극을 여러 편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겼으니 관객 입장에선 오히려 감사할 일이다. 하지만 단막극만이 아니라 단편 소설까지 낭독극 형식으로 공연하는 특별한 저의가 궁금했다. 이에 오경택은 “‘불행’에 묘사되어 있는 여인의 심리가 너무 세세하고 사실적이라 라디오 드라마처럼 공연을 하면 재미있을 것 같았다”라는 설명을 덧붙인다.

이렇게 확정된 라인업에 힘을 실어주는 것은 배우다. 모든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은 ‘곰’과 ‘청혼’이 각각 세 명, ‘불행’과 ‘백조의 노래’가 두 명, ‘담배의 해로움에 대해’에 나오는 한 명까지 모두 열한 명이다. 여기에 몇몇의 배역이 더블캐스팅이라 출연하는 배우는 결국 열네 명이다. 공연 시간이 채 30분이 안 되는 짧은 공연이지만, 체호프 작품은 같은 인물이라 해도 각 배우가 연기할 때마다 질감이 달라지므로, 이러한 구성은 다양한 배우를 통해 다양한 인생을 보여주고 싶은 연출가의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래서인지 이 작품에 출연하는 열네 명의 배우들은 성별도 나이도 매우 다양하다.
텅 빈 극장에 남겨진 노배우의 이야기인 ‘백조의 노래’에는 박정자와 박상종이 출연한다. 원작에서 남자 배우가 등장해 무대 위에서 보낸 인생의 회한을 리어와 햄릿 등의 대사를 통해 표현하는 역할을 박정자가 맡았다. 마치 자신의 이야기인 양 읊조리는 대사들은 50년을 무대 위에서 살아온 그녀의 삶과 겹쳐져 커다란 울림이 되는 모습이다. 아무리 주인공의 대사를 읊어도 실제로는 포틴브라스의 군사 역할밖에 하지 못한 초라한 실체를 자인(自認)하는 비애감이 그녀의 목소리를 통해 극대화된다. 특히 리어와 햄릿 등 남성 캐릭터의 대사가 여성 배우의 입을 빌어 발성될 때의 느낌은 매우 복합적이며 오묘한 정서를 만들어낸다. 또한 배우와 무대라는 작품의 인물과 공간의 느낌이 보다 입체화되는 효과를 연출한다. 남녀의 성보다는 인간, 그것도 죽음만을 앞두고 있는 인간의 쓸쓸함을 드러내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박정자는 이 작품을 통해 그럼에도 생은 살아갈 의미가 있다는 위로를 관객들에게 주고 싶다고 말한다. 노배우의 대사를 친절히 받아주는 늙은 프롬프터 역의 박상종은 좋은 보조자의 역할을 담당한다.
‘청혼’에는 최용민과 유준원, 전미도와 이은이 각 배역에 더블 캐스팅되었고, 여기에 이창훈이 출연한다. 다혈질적이고 성격이 급한 츠부코프를 연기하는 최용민은 능청스럽고 천연덕스러운 연기로 자꾸만 다른 길로 엇나가는 딸과 청혼자의 대화를 더욱 극단으로 밀어붙인다. 단막극 출연이 처음이라는 최용민은 “체호프 작품의 유머를 새삼 발견했다. 그것을 기반으로 인간 자체가 아무리 잘났다 해도 참 단순하고 보잘것없다는 것을 관객들에게 보여주고자 한다”라고 말한다. 최용민과는 다른 분위기를 연출하는 유준원의 츠부코프는 그의 외관에서 풍겨오는 이미지로 더 강하고 폭발적인 성격의 아버지가 된다. ‘곰’에서 늙은 하인 루카 역을 함께 연기하는 유준원은 상반된 캐릭터를 명확하게 구분하기 위해 츠부코프로서는 보다 강하게, 루카로서는 힘을 빼고 무기력하게 연기하는 데에 집중하고 있다. 딸 역의 전미도와 이은은 청혼자 이창훈을 상대하면서 다른 색깔의 인물을 선보이고 있어 각각의 조합마다 다른 분위기의 작품을 기대하게 한다.
‘곰’에는 유준원·김태근·서정연·정수영이 출연한다. 젊은 미망인 역의 서정연과 정수영은 연기 톤과 이미지가 많이 다르기 때문에 곰처럼 밀어붙이는 김태근과 호흡을 맞추며 독자적인 분위기의 작품을 만들어내고 있다. ‘담배의 해로움에 대하여’는 중년의 김태훈과 젊은 구도균이 전혀 다른 질감으로 작품을 입체화한다. 낭독극인 ‘불행’에는 박호산과 함께 우현주·서정연이 더블 캐스팅되어 본인의 개성에 따라 작품의 결을 다양하게 표현한다. 열네 명의 배우들은 이렇게 누구와 누가 조합을 이루는가에 따라 전혀 다른 정서와 분위기를 만들어내기에 ‘14인 체홉’은 엄밀한 의미에서 단편 다섯 작품이 아닌 무수히 많은 작품인 셈이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어떤 배우의 조합을 보더라도 체호프 단편이 지닌 유머와 삶의 통찰은 일관되게 주조된다는 점이다. 따라서 관객은 누구의 연기를 보더라도 즐거움을 체험할 수 있다.

우리네 삶은 그렇게 진지하고, 그렇게 우습다
‘14인 체홉’의 연습실은 무척이나 유쾌했다. 텍스트를 충실하게 따라간다는 오경택의 연출 콘셉트에 따라 별다른 개작 없이 작품에 충실하게 대사를 치고 연기를 하는데도 그렇게 우스울 수가 없었다. 빚쟁이가 갑자기 사랑에 빠지거나, 청혼자가 사랑의 밀어가 아닌 언쟁을 벌이는 것을 보고 웃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런데 면밀히 들여다보면 그들은 매 상황에 항상, 언제나 진지하다. 초라한 역할만 연기해온 배우의 허세 가득한 대사는 애잔하면서도 쓸쓸하고, 담배 대신 아내 얘기만 늘어놓는 못난 남편은 나름 절실하다. 빚을 받으러 온 남자도 긴박한 상황이고, 그를 상대하는 미망인도 총을 꺼내들 만큼 절박하고 진지하다. 땅의 소유자를 가리거나 서로의 개가 우월하다는 청혼자의 논쟁은 진지하다 못해 뒷목이 뻣뻣해질 정도로 치열하다.
전체를 놓고 보면 우스운 일들이 부분에 집중하면 지나치게 진지하다. 우리네 인생도 그렇다. 살아가는 일상의 면면들은 치열하고 진지하다. 어쩌면 이 순간이 인생의 마지막이라는 절박함마저도 느끼곤 한다. 그러나 길고 긴 삶의 여정을 놓고 보면 그 진지함은 정말 아무 것도 아닌 우스운 일이 되어버린다. ‘내가 그땐 왜 그랬을까?’ 스스로 의아해하며 말이다. 체호프는 짧은 이야기 속에 이처럼 놀라운 통찰을 담아내고 있고, 열네 명의 배우들은 그것을 관객들에게 유쾌하게 전달한다.
한껏 진지하면서도 우스워지는 삶,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인간들은 서로를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체호프처럼 말이다.

글 배선애(연극평론가) 사진 연극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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