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극단 ‘개구리’

지금 그분을 다오, 코악스!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3년 9월 1일 12:00 오전

연극계에 그리스극 바람이 불고 있다. 게릴라극장에서 ‘희랍극 페스티벌’을 열어 이미 네 편의 비극 작품이 연속으로 공연되고 있고, 9월에는 국립극단에서 아리스토파네스 희극 3부작을 잇달아 공연한다. 2013년 한국과 2,500년 전 그리스극의 만남은 매우 흥미로운데, 이 두 페스티벌에 모두 참가한 연출가 박근형은 앞서 아이스킬로스의 비극 ‘결박된 프로메테우스’를 각색한 ‘그 사람의 눈물’을 공연했고, 이제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 ‘개구리’를 준비 중이다. 9월 3~15일, 백성희장민호극장.

B.C. 405년 그리스 vs. 2013년 한국
연출가 박근형의 ‘개구리’에 앞서 원작부터 이야기를 해야겠다. 그리스 최고의 희극작가로 꼽히는 아리스토파네스는 기원전 405년에 ‘개구리’라는 작품을 썼다. 당시 아테나는 스파르타와의 전쟁에서 국력이 소진된 상태로, 아리스토파네스는 이러한 위기의 아테나에 구국의 조언을 해줄 위대한 시인들이 필요하다고 판단한다. 그러나 소포클레스를 비롯 에우리피데스·아이스킬로스 등 위대한 비극 시인들이 모두 죽고 없는 상황. 아리스토파네스의 유쾌한 상상은 이미 저승에 있는 세 명의 위대한 시인을 찾아가 꼭 한 명을 데려오는 것으로 이어져 ‘개구리’라는 작품을 탄생시킨다. 따라서 이 작품은 ‘위기에 빠진 아테나’라는 아리스토파네스의 현실 인식과 문제 제기로부터 출발한 작품이다.
지옥으로 찾아가는 주인공은 디오니소스다. 축제의 신이자, 연극의 신인 디오니소스가 직접 나섰다는 것도 기발하지만 그가 지옥을 넘나들었던 헤라클레스의 도움을 받는다는 것, 지옥으로 가는 과정에서 헤라클레스로 오인되는 것, 그리고 아테나를 구해줄 한 명을 놓고 에우리피데스와 아이스킬로스가 서로 자신의 작품을 자랑하는 것 등은 일반적 상식을 뒤집는 독특한 발상이자 이 극이 희극임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사실 이 작품은 두 개의 내용으로 구분되는데, 하나는 지옥으로의 여정이며 다른 하나는 두 명의 시인이 서로 겨루기를 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개구리’를 토론극 혹은 논쟁극으로 이름붙이는 것은 후자, 즉 에우리피데스와 아이스킬로스가 자신의 작품에 대해 경쟁하며 자랑을 늘어놓는 데에 의미부여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위기에 빠진 아테나를 구할 수 있는 단 한 사람이 되기 위해 각자의 작품을 뽐내고 상대방의 작품을 비방하는 이들의 행태는 ‘위대하다’는 수식어가 무색할 정도로 직설적이다. 우열을 가릴 수 없는 이들의 경쟁은 결국 누구의 시가 더 무거운지 저울에 올려놓음으로써 판가름이 났고, 디오니소스는 승자인 아이스킬로스를 데리고 이승으로 돌아간다.
연출가 박근형은 이 작품에서 두 가지에 방점을 찍었다. 하나는 “위기에 빠진 아테나를 구할 단 한 사람”이라는 아리스토파네스의 창작 동기이고, 또 다른 하나는 저승에 이르기까지의 여정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놀이의 연극성이다. 이 둘을 취하기 위해 가장 먼저 전제한 것은 2,500년 전 그리스 희극이라는 괴리감을 없애는 것. 이미 ‘결박된 프로메테우스’를 각색하여 ‘그 사람의 눈물’로 선보였던 그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이 작품을 한국적 색채로 전면 재창조한다. 박근형의 말을 그대로 빌자면, 연극을 보는 관객이 ‘지금의 한국인’이기 때문이다.
디오니소스는 ‘미나리’라는 이름의 신부로, 디오니소스의 노예인 크산티아스는 ‘고사리’라는 동자승으로 바뀌었고(이 둘은 작품 말미에 삼촌과 조카 사이로 밝혀진다), 저승길을 설명해주는 헤라클레스는 ‘오이’가 되었다. 그 유명한 저승의 뱃사공 카론은 ‘몽금포타령’에 마음을 빼앗기는 실향민이 되었고, 술집 여주인은 카리스마 넘치는 마고할미로 탈바꿈했다. 원작의 ‘백조개구리’가 아니라 저승에 어울리게 ‘송장개구리’로 바뀐 개구리들은 “코악스 코악스” 노래를 부르며 이들의 저승길에 동행을 한다. 원작을 가늠할 수 없을 만큼 한국적으로 바뀐 인물들은 역시 그 행동도 한국적이다. 현실 문제를 타개하기 위한 지도자에 대한 염원으로 신부와 동자승은 삼보일배를 하며 저승길에 오르고, 도깨비는 서로를 물어뜯으려 끊임없이 싸움질이며, 마고할미는 저승의 인물들을 데리고 춘향이나 심청으로 역할을 바꿔가면서 쉬지 않고 놀이를 한다.
이름부터 행동까지 완벽히 한국적으로 바꾼 것은 연출가 박근형이 ‘개구리’의 문제의식을 “내가 사는 세상, 내가 사는 나라”로 끌고 왔기 때문이다. 지금 이곳에 대한 고민은 곧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단 한 사람”이라는 아리스토파네스의 창작동기에 집중되며, 이에 따라 작품의 기본 맥락 역시 바뀐다. 가장 큰 변화는 위대한 비극 시인이 자웅을 겨루는 토론의 장면이 생략된 것이다. 신부와 동자승이 고통을 마다않고 저승길을 찾아간 것은 오로지 ‘그분’을 다시 이 세상으로 불러내기 위해서다. 저승에 도달하기까지의 여정이 상대적으로 길어지며, 저승에서는 목적한 바, ‘그분’을 설득해서 모셔가는 것으로 바뀌게 된다.
박근형이 원작에 밑줄을 그은 두 지점으로 인해 작품의 서사와 주제의식은 보다 명확해지고 한국적 색채의 투영으로 관객의 정서적 동일시는 극대화된다. 2,500년의 어마어마한 시간, 그리고 그리스와 한국이라는 공간적 거리는 이렇게 지금 현재의 고민에 집중하고 있는 연출의 태도에 의해 순식간에 사라져버렸고, 2013년 한국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개구리’를 통해 관객은 이질감이나 거리감을 느끼기보다는 우리의 현실과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선명한 풍자 속 유쾌한 놀이
매우 지엽적인 장면을 현실적으로 각색했음에도 연출가 박근형은 정치적 색채나 현실성이 지나치게 부각되는 것을 경계한다. 연극이 정치성을 띠는 것 자체가 식상한 일이며, 그것을 최대한 가린 채 그저 관객이 우리의 현실을 직시하고 문제점들을 느끼길 바란다는 것이 그의 의도이다. 이러한 연출의 태도와 시각은 이 작품이 희극이라는 측면과 매우 잘 맞아떨어진다.
작가와 연출을 겸하고 있는 박근형은 지금까지의 전작이 대체로 비루한 삶을 그려내되 그것을 무겁지 않게 묘사한 것이 특징이었다. 진솔한 인생의 단면을 그려내지만 그래서 우스운 상황, 삶의 핍진함이 드러날수록 묘하게 뒤틀려 있어 유쾌하면서도 씁쓸해지는 정서. 박근형의 이러한 특징은 희극이라는 장르를 만나면서 보다 적극적으로 표현된다. 캐릭터 하나하나가 웃음을 유발하며, 그들이 만들어내는 저승의 모습은 유쾌한 놀이로 가득한 새로운 공간으로 탄생한다. 삼보일배로 저승길에 오르는 신부는 하루 동안 채 500미터도 가지 못할 만큼 힘들고 피곤하다고 엄살을 부리며, 기회만 있으면 술과 담배를 즐긴다. 신부와 동행하는 동자승은 사사건건 신부의 행동에 꼬투리를 잡고 잔소리를 늘어놓고 있어 둘이 주고받는 대사는 얼핏 만담을 보는 듯 우습고 재미나다. 그들과 합류한 광대들은 “빅밴드에서 활동하다가 뜻한 바가 있어 듀엣으로 나섰다”라고 자랑을 늘어놓지만 뱃사공에게 뱃삯으로 재주를 보여줄 땐 번번이 거절당하는 존재들이다. 큰 덩치에 무서운 표정의 뱃사공은 절대 강을 건네줄 것 같지 않은 견고함을 보여주지만 신부가 흥얼거리는 ‘몽금포타령’에 급속도로 감정이입이 되어 급기야 나룻배도 버린 채 신부와 동행하게 된다. 강을 건널 때 사방팔방에서 울어대는 송장개구리들과 그 소리에 맞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신부 일행의 소음 대결도 재미나다. 연습 장면 중에서 가장 즐거운 부분은 마고할미의 역할놀이 장면이다. 저승을 쥐락펴락하는 마고할미는 매일매일 다양한 놀이를 하면서 하루를 보내는데, 눈에 띄는 사람에게 아무 이유 없이 춘향이나 심청·이몽룡의 역할을 주면서 잠시도 쉬지 않고 놀고 있다. 처음에는 구경만 하던 신부 일행이 의도하지 않게 역할놀이 속에 끌려들어간 상황도 기가 막히게 재미난 부분이다. 신부가 찾아 나선 ‘그분’이 골치 아픈 현실로 돌아오는 것을 거절하는 것에 충분히 공감되는 장면이다.
원작 자체가 희극이기 때문에 웃음을 유발하는 다양한 장치들이 배치되어 있음은 당연하지만, 그것을 현재로 각색하면서도 작품의 중요한 원리로 활용한 데에는 연출가 박근형의 적극적 의도가 작용했다. 그리스 비극에 비해 상대적으로 공연 기회가 적은 그리스 희극을 공연한다고 했을 때 먼저 떠오르는 것은 원작 자체, 즉 문학으로 남아있는 텍스트 자체를 성실하게 무대화하는 것이다. 물론 그 자체로도 충분히 공연의 의미는 있겠지만, 박근형은 그것을 바라보는 관객의 반응에 보다 무게중심을 두고 작업을 진행했다. 그는 그리스 희극의 문학적·연극적 가치보다는 관객이 이 작품을 어떻게 보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말하면서 “어렵게 보거나 힘들게 보는 것이 아니라 즐겁고 재미나게 볼 수 있는 작품”이 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즉, 원작의 이해보다는 관객들이 자신의 이야기로 쉽게 받아들이는 작품이기를 희망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작품 전면에 흐르고 있는 유쾌한 놀이와 연극성의 강조는 지금 이곳의 관객을 염두에 둔 연출가 박근형의 일관된 연극관이 투영되어 있는 것이다.
희극적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은 배우의 연기와 서로 간의 호흡에서 비롯된다. 진지하고 점잖은 표정의 배우 박윤희는 어린 동자승에게 투정도 부리고 허풍도 치는 신부의 귀여운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으며, 그와 호흡을 맞추는 동자승 역의 심재현은 어리면서도 어른스러운 모습을 효과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마고할미를 연기하는 윤부진은 역할놀이의 주인공으로 극중 분위기를 유쾌하게 주도하며, 허스키한 목소리의 뱃사공 이종윤은 무섭기보다는 친근하고 편안한 인물로 그려지고, 광대를 맡은 임진웅과 심원석의 무사태평한 표정은 그 자체로 우습다. “코악스 코악스”를 외치는 송장개구리와 도깨비, 저승의 사람들은 여러 배우들이 역할을 바꿔가며 코러스처럼 연기하면서 유쾌한 정서를 만들어내고 있다.

희극이 비극이 될 수밖에 없는 여기, 이곳
이렇듯 유쾌하고 즐거운 분위기의 작품이지만 결말은 결코 희극이 아니다. 저승에 계속 있고 싶어 했던 ‘그분’을 설득하여 현실로 보낼 때 그 빈자리를 누군가는 채워야 하기에 신부는 스스로 저승에 남는다. 삼촌과 생이별을 해야 하는 동자승의 슬픔은 ‘그분’을 모셔가는 기쁨보다 더 크다. 희극이 희극인 채로 끝나지 못하고 비극의 대단원이 되는 것은 우리네 현실이 무언가 소중한 것을 얻으려면 그만큼 귀한 것을 대신 내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지금 이곳에 ‘그분’을 불러오려는 신부의 의지는 그만큼 현실 자체가 죽은 ‘그분’이 필요할 정도로 위험하고 모순에 가득 차 있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다.
원작에는 없는 각색된 작품 속 ‘개구리’에 대해 “우리들의 그림자 같은 인생이외다. 우리 모두가 뛰고 뛰지만 날뛰어보지만 결국은 저승으로 달려가는 송장개구리 아니겠습니까?”라는 설명이 이어진다. 신부가 살고 있는, ‘그분’을 반드시 데려가야 하는 현실이 송장개구리가 울어대는 저승과 다를 것이 없다는 인식이 투영된 것이다. 인간과 욕망, 그리고 세상에 대한 가장 원형질의 이야기가 모두 녹아들어 있는 그리스극은 이렇게 오랜 세월을 지나 지금도 현실을 환기시키고 있다.
지난 7월에 신작 ‘피리부는 사나이’와 그리스 비극 ‘그 사람의 눈물’을 동시에 공연하고 이어서 그리스 희극 ‘개구리’까지 연속으로 무대에 올리는 연출가 박근형은 그 누구보다 바쁜 여름을 보내고 있었다. 30도를 훌쩍 넘는 태양의 열기보다 더 뜨거운 것은 연극에 대한 연출가 박근형의 열정, 관객에 대한 배려, 그리고 연극과 관객이 함께 존재하는 ‘지금 이곳’에 대한 관심과 애정일 터이다. 무대의 삶에만 머물지 않는 중견 연출가의 일관된 현실인식과 연극적 문제제기가 저승에 남는 것을 선택한 신부만큼 감동적이다. 뜨거운 태양처럼, 또한 긴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유효한 그리스극처럼 연출가 박근형의 연극 작업도 그랬으면 좋겠다.

글 배선애(연극평론가) 사진 국립극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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