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단 백수광부의 ‘죽음의 집2’는 극작가 고(故) 윤영선의 미발표 유작을 후배작가인 최치언이 재창작한 작품이다. 비 오는 밤, 한 의사가 갑자기 나타난 벙어리 여인에게 이끌려 낯선 집에 왕진을 가서 겪는 기괴한 하룻밤의 이야기를 그려냈다. 죽음과 삶,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드러내고자 한 원작에 비해 공연에는 현실 문제가 훨씬 구체적으로 담겨졌다.
8월 8~22일, 선돌극장.
글 이은경(연극평론가) 사진 극단 백수광부
‘죽음의 집2’(이성열 연출)는 카프카의 소설 ‘시골의사’ ‘변신’뿐만 아니라 아베 코보의 소설 ‘모래의 여자’를 연상케 한다. 고기가 먹고 싶어 쥐를 잡아먹다 쥐가 된 아들, 동생을 인간으로 만들기 위해 자신의 허벅지를 잘라내는 벙어리 딸, 아들을 인간으로 만들기 위해 살인도 불사하는 어머니, 이들과 더불어 살고 있는 정체불명의 사내 등 우화적 요소와 엽기적인 인물, 그로테스크한 분위기가 어우러진 마술적 리얼리즘 작품이다.
작품을 이끄는 중요한 상징은 바위와 쥐이다. 제목처럼 의사가 찾아간 곳은 ‘죽음의 집’이다. 산골 마을에서 화전민으로 살아가던 가족은 힘들게 밭 한 뙈기를 개간하지만 어디서 굴러왔는지도 모를 거대한 바위가 밭 가운데에 들어앉는다. 아버지는 바위와 싸우다 화병으로 죽고, 바위는 굴러서 집까지 비집고 들어와 남은 가족을 위협하고 있다. 바위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해 아버지는 죽어서도 망치로 바위를 쪼개면서 집을 떠나지 못한다. 계속 구르던 바위는 마침내 집을 무너뜨리고, 남은 가족을 덮친다. 결국 의사가 목도한 것은 바위로 상징되는 죽음과 끊임없이 투쟁해야 하는 인간의 존재론적 숙명이다. 쥐로 변신한 아들은 물질사회의 부조리를 함축하는 존재다. 가난으로 인해 인간이기를 포기한 아들은 동물적 욕망만 좇는 존재가 되고, 가족들은 아들의 인간성 회복을 위해 스스로 인간의 기본 가치마저 포기하려 한다. 또한 의사와 화전민으로 대비되는 경제적·사회적 불평등에 관한 문제는 사내의 대사를 통해 직접적으로 제시된다. 결국 가난으로 인한 비인간화가 개인이 아닌 사회 문제임을 환기시킨다. 죽음과 삶,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드러내고자 한 원작에 비해 공연에서는 현실 문제가 훨씬 구체적으로 담겨 있다.
원작과 두드러지게 달라진 점은 딸들의 존재와 결말이다. 먼저 “작고, 크고 못생겼으며, 어딘가 희고 창백한 게 산 사람 같지 않은 묘한 느낌”으로 설명되는 두 딸들은 원작에는 없는 인물이다. 이들은 작품의 전개를 암시하는 상징적인 노래를 부르는, 예언 가능한 영적인 존재로 생사조차 모호하게 그려진다. 그녀들을 통해 삶과 죽음의 경계를 담으려는 원작의 의도를 강조하고자 했지만 오히려 서사 구조에 부담이 됐다. 공연은 의사의 부재로 마무리된다. 첫 장면과 동일하게 목소리로만 존재하는 아내의 일상적인 이야기가 들리지만 무대에는 의사의 흰 가운만 놓여 있다. 앞선 사건으로 새로운 깨달음을 얻은 의사의 내적 변화를 시각적으로 연출한 것으로 여운이 남는 결말이었다. 무대는 얼기설기 엮은 나무 벽이 무대 바닥까지 내려오지 않아 허공에 떠 있는 듯 불안정해 보인다. 무대 한 편에 바위가 부분만 보인 채 놓여 있고, 의자·휴대용 가스레인지 등 일상소품이 더해졌다. 사실성과 상징성이 혼재하는 미니멀한 무대였지만 집에 드리워진 죽음의 이미지가 충분히 전달되지는 않았다. 사실과 과장을 넘나들며 충분한 긴장감을 조성한 김학수(사내 역)와 정은경(노파 역)의 연기는 믿음직했다. 하지만 사건의 중심에서 관객의 시각을 반영하는 의사(정훈 분)가 경직된 연기로 일관해 관객과의 정서적 공감을 이끌어내지 못했다. 또 의사의 악몽 속에 쥐로 변신한 아들이 실제 등장하면서 팽팽했던 극적 기대감이 급격하게 약화되었다. 원작의 의도를 살리려고 노력했지만 재창작의 과정 속에 최치언의 특징인 그로테스크와 현실인식이 강조되면서 환상과 상징은 약화되었다. 작은 차이로 인해 의미의 층위뿐만 아니라 극적 질감까지도 달라졌다. 그래서 윤영선 원작 그대로의 공연도 궁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