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호프의 단편 소설 ‘제6병동’을 각색한 ‘라긴’(극본 김태현·연출 김원석)은 지적인 대화에 목말라하던 시골 마을 정신병원장이 환자와의 대화에서 즐거움과 깨달음을 얻게 되지만 오히려 동료들에 의해 미치광이로 몰려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9월 25일~10월 6일, 대학로예술극장3관.
글 이은경(연극평론가) 사진 명품극단
명품극단은 신체움직임과 시각적 미장센, 일관성 있는 주제의식을 기반으로 다양한 연극적 시도를 하고 있는 극단이다. 고골 3부작·한국문학 3부작·‘죄와 벌’ 3부작 등 소설을 각색한 작품들로 필모그래피를 채우며 레퍼토리 극단으로서의 정체성을 뚝심 있게 구축해가고 있다.
‘라긴’은 원작 소설의 주인공 이름이다. 제목이 변경된 것에서 각색 의도가 확실하게 드러난다. 원작은 병동을 사회악이 구현되는 폭력적인 공간으로 설정하여 현실의 부조리를 강조하고 이에 야합하는 지식인의 무기력을 비판한 사실주의 작품이다. 하지만 연극 ‘라긴’은 병동으로 상징된 현실의 폭력성보다 라긴의 변화에 초점을 맞춘다. 원작에 비해 병원 직원들이 수행하는 폭력의 양상은 순화되고 젊어진 동료들과 라긴의 갈등 양상은 단순해졌으며, 인물의 이름과 역할이 다소 바뀌기도 했다. 결국 무기력한 지식인 라긴이 지적인 환자 이반과의 대화를 통해 점차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를 인식하고, ‘생각하는 자’로 변화하는 과정이 중심 사건이다. 그렇기에 공연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원작보다 훨씬 밝고 유쾌하다.
무대 중심 후면에는 환자용 이층침대가, 그 옆에는 세워진 침대가 놓여 있다. 객석 앞쪽에 위치한 라긴의 진료실은 이동형 창호지 문으로 구분되는데, 이 문은 공간 구분뿐만 아니라 그림자극의 장치이며, 방법적 회의를 깨닫게 하는 오브제 등으로 다양하게 활용된다. 병실과 외부 공간으로 나아가는 통로를 구분하기 위해 무대 후면을 두꺼운 비닐 커튼으로 에워쌌다. 자신의 생각을 거침없이 말하는 정신병자들이 자신의 생각을 말하지 못하는 라긴의 동료들보다 더 온전하고 건강한 인물이라는 점을 환기시키는 시각적 연출이 흥미로웠다. 라긴의 동료들이 통로를 지날 때 비닐 커튼을 통해 투영되는 권위적이고 과격한 모습, 행동이 조명의 변화와 커튼의 흔들림을 통해 자주 왜곡되어보였기 때문이다. 창호지 문을 활용한 그림자극도 인물 간의 갈등과 변화의 과정을 상징적이고 압축적으로 표현했기에 효과적이었다. 라긴의 죽음은 붉은색 조명 속에 베개의 오리털을 무대 가득 날리는 베개 싸움으로 상징된다. 죽음을 놀이로 환치시키는 전복적 상상력을 통해 비극적 현실인식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억압적인 현실세계에서 ‘생각하는 자’는 존재하기 어렵기에 오히려 죽음이 위안이 된다는 사실을 환기시키기 때문이다.
이번 공연에서 쉽지 않은 인물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 관록 있는 배우들의 연기도 인상적이었다. 라긴을 연기한 남명렬은 등장의 순간부터 삶의 무기력과 권태를 온 몸으로 표현했다. 물론 ‘툴파’ 장면처럼 과장된 희화화는 분명 거슬렸지만 지식인의 고뇌와 권태를 그처럼 자연스럽게 연기할 수 있는 배우가 얼마나 있을까. 이반을 연기한 백익남은 지적인 장광설과 다양한 움직임을 능숙하게 표현하여 그의 진실이 무엇인지 오랫동안 생각하게 했다. 하지만 라긴의 변화에 초점을 맞추면서 사회성 강한 원작의 의미가 축소되어 개인적인 우화로 그려진 점은 안타깝다. 현실이 부재한 채 이루어지는 라긴의 변화는 개인적인 문제 이상의 의미를 담지 못했다. 죽은 라긴의 독백을 통해 그의 고뇌를 반복한 마지막 장면도 마무리에 대한 강박을 드러낸 사족이었다. 젊은 배우들의 연기는 제각각일 만큼 조율되지 못했다. 정신병 환자들과 라긴을 제외하고는 그로테스크한 다류시카(전윤지 분)처럼 양식적인 인물로 연기 콘셉트가 통일되는 것이 좋겠다. 그러면 극단의 장점인 연극성도 효과적으로 강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