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테의 신곡’

지금, 바로 이곳이 지옥이다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3년 12월 1일 12:00 오전

11월 2~9일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정말 모처럼 국립극장에서만 할 수 있는 공연을 만났다. 쉽게 만나기 어려운 고전 대작을 현대적으로 각색한 총체극 ‘단테의 신곡’은 방향을 잃었던 국립극장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환기시킨 작품이었다.
방대한 서사에 심오한 의미를 담은 원작 ‘신곡’은 이성과 덕을 받아들이게 되는 작가 자신의 정신적 성장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하지만 ‘단테의 신곡’은 원작의 근간을 이루는 기독교·신화적인 의미를 약화시키고, 이미 지옥처럼 변해버린 현재의 삶에 초점을 맞춘다. ‘참고 견디는 자’를 의미한다는 ‘단테’가 지옥 같은 삶을 견디고 살아가야 하는 우리의 자화상처럼 느껴져 현실감은 커졌다. 단테가 만나는 지옥 속 인물은 바로 우리 자신으로 환치된다. 물질적 탐욕·해체된 가족·근친상간·자살·부패한 권력 등 14세기의 단테가 지옥으로 생각했던 모든 죄악들이 우리 삶에서는 일상으로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신을 부정하며 자신의 죄악을 인정하지 않던 단테가 지옥을 경험하면서 내면적 변화를 이뤄 자신의 이기심과 불의에 눈감은 죄를 참회하자 비로소 지옥문이 열린다. 이 같은 원작과 다른 각색으로 지옥의 나락에 떨어진 우리 삶을 직시하자는 작가의식을 드러낸다. 하지만 난해하고 복잡한 원작의 서사가 이해하기 쉽게 단순해지면서 단테(지현준 분)의 고뇌는 약화되고, 베르길리우스(정동화 분)는 안내자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했으며, 베아트리체(정은혜 분)는 장식적인 인물처럼 존재감이 약했다. 이 작품은 우리가 기대하는 단테의 ‘신곡’이 아니라 고연옥·한태숙의 ‘신곡’이었다.
대극장 무대 대부분을 차지한 거대한 구조물은 회전하면서 2층 골조로 이루어진 지옥, 비탈진 산으로 표현된 연옥의 풍경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연옥 무대 정상에는 별들이 빛나는 천국이 존재한다. 무대는 절제된 조명으로 인해 인물들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둡다. 대신 초현실적인 상상의 공간을 재현하기 위한 이미지 영상이 구조물에 투사되면 무대는 죽음만이 존재하는 지옥의 강으로, 죽은 손녀의 인육을 먹는 기아의 피바다로 변한다. 아쉬운 점은 영상 이미지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아 무대에서 먼 관객에게는 단순 조명처럼 보였다는 것이다.
공연은 연극·판소리·오페라·마임·미디어아트 등이 어우러진 총체극이었다. 특히 판소리·정가·클래식 음악·일렉트로닉 등 장르의 경계를 넘나드는 음악이 인상적이었다. 지옥·연옥·천국의 느낌을 잘 살린 과감한 음악에 동·서양 악기로 구성된 오케스트라의 라이브 연주가 더해지고, 노래의 가사가 자막으로 제공되어 훨씬 흡족하게 즐길 수 있었다. 현대적으로 작창된 판소리는 이 공연의 백미였다. 판소리가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 아니라 새로운 작창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고, 판소리의 비중이 컸으면 하는 아쉬움도 있었다.
연옥은 한태숙이 연출한 ‘오이디푸스’(2011)와 동일한 콘셉트의 무대였다. 산으로 상징되는 경사진 무대에서 배우들은 암벽 등반을 하듯 매달리고 미끄러지며 천국을 향한 열망을 몸으로 표현한다. 작은 봉에 매달린 배우의 몸이 만들어내는 조형미가 인상적이고, 장면의 의미를 전달하는 데도 효과적이었다. 하지만 베아트리체의 경우, 불편하고 어색해보일 만큼 움직임과 무대장치가 충돌했다.
이번 공연에서 단테를 연기한 지현준은 정동환(베르길리우스 역)에게 전혀 밀리지 않고 배우로서의 존재감을 확실하게 보여주었다. 지옥이란 극적 공간과 어울리는 판소리 연기를 보여준 배역들인 카론·미노스·대장마녀를 통해 창극 배우들의 뛰어난 역량도 확인했다.
기대가 너무 컸는지 공연은 이에 못 미쳤다. 하지만 국립극장의 시도는 긍정적으로 평가해야 한다. 이러한 작품들이 이어질 때 진정한 국립극장의 정체성을 쌓아가게 될 것이다.

글 이은경(연극평론가) 사진 국립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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