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 사이공’

새 시대가 만들어낸 새로운 캐릭터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4년 3월 1일 12:00 오전

1989년 웨스트엔드에서 초연된 이래 ‘미스 사이공’은 수십 년간 크고 작은 캐릭터의 변신을 거쳐 왔다.
막을 내리면 다시 볼 수 없는 것이 뮤지컬 공연이지만, 음반을 통해서라면 연출의 변천사를 생생하게 마주할 수 있다

‘미친 가창력’이라는 별명을 가진 우리나라 뮤지컬 배우가 있다. 개성 넘치는 연기와 감미로운 미성으로 유명한 홍광호이다. 다양한 무대 위 캐릭터로 종횡무진 활약을 이어가더니 오는 5월 런던 웨스트엔드에서 막을 올릴 ‘미스 사이공’ 25주년 기념 뉴 버전 무대에서 베트콩 장교이자 킴의 정혼자인 투이 역으로 캐스팅이 확정돼 최근 화제가 됐다. ‘우리나라 뮤지컬 배우 최초의 웨스트엔드 진출’이라거나 ‘주인공 첫 발탁’ 등 떠들썩한 매스컴 보도 행렬이 줄을 이었다.
개인적으로 그의 열렬한 팬 중 한 명이지만, 사실 홍광호의 웨스트엔드 진출과 관련된 매스컴의 기사들에는 오류가 있다. 우리나라 뮤지컬 배우들의 영국이나 해외 진출은 오래전부터 가시적인 성과를 낳았기 때문이다. ‘명성황후’에서 비운의 황후로 유명한 이태원은 2000년에 뮤지컬 ‘왕과 나’의 왕비 티앙 역을 맡아 영국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로런스 올리비에 어워드 여우조연상 후보까지 오른 바 있다.
웨스트엔드는 아니지만 다양한 ‘미스 사이공’에서의 활약도 많다. 전 국립극장 예술감독 손진책의 영애(令愛)인 뮤지컬 배우 손진원은 뉴 프로덕션의 영국 투어에서 지지 역으로 활약했으며, 현재 진행 중인 북유럽 투어에는 여승희가 참가하고 있다. 요즘 국내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마이클 리는 브로드웨이에서 투이 역으로 등장했고, 미주 지역의 투어에서는 이소정이 주인공으로 무대를 꾸민 바 있다. 아무래도 동양계 배우가 여럿 필요한 극의 특성상 ‘미스 사이공’은 아시안 배우들에게 좋은 기회가 되어왔다.
굳이 ‘처음’이나 ‘최초’와 같은 잘못된 수식어를 붙이지 않아도, 사실 홍광호의 웨스트엔드 진출은 그 자체로 충분히 의미 있는 성과이자 축하할 일이다. 국내 일부 언론의 잘못된 보도에서는 ‘주인공 중 하나’라는 오류까지 등장하지만, 선 굵은 연기와 이미지로 강렬한 인상을 남길 수 있는 비중 있는 주요 배역 중 하나인 것은 분명하다. 기왕이면 국내에서 명성을 이어가 해외 관객들에게도 울림이 큰 잔향을 남겨줬으면 좋겠다. 그가 서는 무대를 뿌듯한 마음으로 직접 나눌 수 있다면 더 바랄 나위도 없을 듯싶다.

시대에 따라 변신을 거듭해온 캐릭터와 노래들
처음 이 작품을 봤던 1980년대 말의 감동을 잊지 못한다. 유구한 역사의 고풍스런 공연장이 즐비한 런던이지만, 그중에서도 규모와 품격 면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드루어리 레인 극장은 10여 년 세월 동안 킴의 애절한 사연을 쉬지 않고 들려줬다. 코번트 가든부터 공연장까지의 거리에는 ‘미스 사이공’을 상품화한 각종 기념품들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공연 전 간단한 식사를 할 수 있는 레스토랑이나 카페, 기념품 가게들엔 온통 ‘미스 사이공’의 엠블럼이 넘쳐났다. 이쯤 되면 문화상품이 지역 경제를 책임진다는 표현이 무색하지 않을까 싶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배우들이 드나드는 극장 뒤쪽 출입구 풍경이었다. 공연이 시작하거나 끝날 즈음 구름같이 모여든 사람들을 만나기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꽃다발을 나르는 일꾼들과 종이와 펜을 들고 배우들의 사인을 받으려는 관객 덕분이다. 감상을 전하고 인사를 나누는 그들의 표정에는 세계 4대 흥행 대작 중 하나로 명성을 누리는 ‘미스 사이공’의 감동이 진하게 배어 있었다.
오랜 세월 공연을 이어가다 보니 뮤지컬에 등장하는 매력적인 캐릭터들은 시대에 따라 변신을 거듭하는 재미난 역사를 지니고 있다. 한번 만들어지면 개작이나 재제작이 쉽지 않은 영상물과 달리, 공연예술인 뮤지컬만이 지닌 특징이자 재미라 부를 만하다. 뮤지컬 음반은 바로 그런 변화의 역사를 따져볼 수 있는 흥미로운 시대적 기록이다.
홍광호가 캐스팅 된 투이 역할도 그렇다. 초연 당시 이 배역을 맡았던 인물은 동양인이 아닌 서양인 배우 키스 번스였다. 우리나라에선 극단 학전의 ‘의형제’라는 제목으로 알려진 뮤지컬 ‘블러드 브라더스’에서 해설자 역할을 맡아 열연을 펼쳤던 바로 그 배우다. 짙은 화장과 검은 머리 가발, 그리고 눈꼬리를 높게 올려 그린 모습의 그가 연기한 투이는 서양인들이 생각하는 전형적인 동양 남성의 모습이었다. 여성에게 군림하고 남성 우월주의에 빠져 있으며, 가부장적인 제도와 전통에 얽매는 그로부터 벗어나려는 킴의 모습이 마치 프랑스 대혁명에서 자유를 갈망하는 민초들의 모습과 일맥상통한다. 이 같은 시각은 오리지널 런던 캐스트의 음반을 감상해보면 잘 알 수 있다. 크리스와 킴의 결혼식에 느닷없이 나타난 투이는 킴을 겁박하며 노래한다.
“미군과 함께 있는 너, 도대체 얼마에 팔려온 거야?/우리의 정혼과 약속, 어떻게 저버릴 수 있니?/게다가 더 부끄러운 건 지금 네 눈앞엔 부모님의 영정이 있잖아.”
하지만 공연이 계속되면서 이 노랫말은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바뀐다. 훗날 다시 제작된 또 다른 앨범엔 이런 변화가 고스란히 담겨 있어 흥미롭다. 같은 멜로디지만 투이의 노랫말은 이렇게 바뀌어져 있다.
“밤새 달려 널 데리러 왔어. 전선을 뚫고 이곳에 왔지/킴, 친구들에게 말해, 이젠 안녕이라고/이 생활도 끝, 지금부턴 내가 널 지킬게.”
이쯤 되면 증오의 결정체가 사랑의 화신으로 변신했다고 인정할 만하지 않을까.

다양한 연출이 고스란히 담긴 음반 속 별미
투이뿐만이 아니다. 수십 년 장기 공연을 통해 ‘미스 사이공’은 크고 작은 캐릭터의 해석과 표현의 변화를 거쳐 왔다. 덕분에 처음에는 킴에 대해 단호했던 크리스의 미국 부인 엘런은 훗날 남편의 혼전 외도(?)를 따지는 날카로움보다 자신도 시대의 희생자라는 연민의 대상으로 탈바꿈됐고, 크리스의 친구인 존 역시 중립적인 입장에서 킴을 옹호하는 캐릭터로 바뀌었다. 막을 내리면 다시 볼 수 없는 공연의 속성 탓에 이젠 직접 확인할 수 없지만, 음반을 통해서라면 연출의 변화를 간접적으로 관찰할 수 있어 흥미롭다. 뮤지컬 음반 수집이 취미인 애호가들에게 허락된 별스런 재미들이다.
‘미스 사이공’의 최초 음반은 앞서 설명한 오리지널 런던 캐스트의 음원으로 1990년 만들어졌다. 킴 역을 필리핀 태생의 레아 살롱가가 맡았고, 엔지니어로는 조너선 프라이스, 크리스로는 사이먼 보우먼이 나온다.
두 장의 앨범은 1막과 2막에 따라 나누어진 것이 아닌, 두 번째 CD 앞부분에 1막 마지막 신을 담고 있는 형태다. 그래서 엔지니어가 부르는 ‘편히 죽고 싶다면(If You Want To Die In Bed)’이나 킴이 부르는 ‘널 위해 내 생명도 바칠 거야(I’d Give My Life For You)’는 1막에 나오는 노래이지만 두 번째 CD 앞부분에 수록돼 있다. 1막이 2막보다 조금 더 길어서 생긴 일로 보인다.
앞에서 잠시 언급한 컴플릿 음반은 1995년에 등장했다. 컴플릿 앨범이라 하면 실제 공연처럼 장면을 연계해주는 브리지 음악 등 모든 음악을 원형 그대로 고스란히 수록했다는 의미다. 이 음반에 참여한 사람들은 실제 여러 나라의 ‘미스 사이공’ 무대에 등장했던 각국 배우들인데, 킴 역은 런던 무대에 섰던 조애나 앰필, 엔지니어는 토론토와 LA 무대에 섰던 케빈 그레이, 그리고 크리스는 시드니 프로덕션에 등장했던 피터 커젠스가 등장한다. 오리지널 런던 캐스트 음반과 달리 컴플릿 앨범은 첫 번째 CD에 1막을, 두 번째 CD에 2막을 넣음으로써 공연과 마찬가지의 구조를 따르고 있는 것이 큰 특징이다.
노래 구성 면에서도 음반에 따라 차이가 있다. 특히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오리지널 런던 캐스트 음반에서 2막 마지막에 킴이 부르는 ‘고결한 새(The Sacred Bird)’가 컴플릿 앨범에서는 아주 짧고 간결한 형태로 축약됐다는 점이다. 실제 무대에서도 초창기에는 이 노래가 그 모습 그대로 등장했지만, 요즘 공연되는 버전에서는 킴과 아들 사이의 간단한 대화로 생략되면서 보다 스피디하게 클라이맥스와 극적 피날레로 이어진다. 아마도 신파조로 흐를 수 있는 극 내용에 속도감을 더하기 위한 변화가 아닐까 싶다.
듣는 사람의 개인적 취향에 따라 음반에 대한 호불호도 크게 갈린다. 개인적으로는 킴 역의 경우 레아 살롱가의 소리가 조애나 앰필보다 감동의 폭이 큰 반면, 엔지니어는 조너선 프라이스보다 케빈 그레이의 비열하고 또 때로는 기회주의적인 모습이 더 적절하다는 느낌이다. 서양인의 머리로 상상한 해석과 동양인이 직접 그리는 마음의 해석이 달라서 생기는 차이점 같다.
내년에는 우리말 공연도 다시 올라간다. 런던 공연에서 활약을 펼칠 홍광호의 귀환 여부도 궁금하고, 새로운 스타 탄생의 가능성에도 호기심이 쏠린다. 더불어 내년 앙코르 무대를 전후해서는 우리말 음반도 제작됐으면 좋겠다. 해외 유명 뮤지컬이 국내 무대에 소개되면서 겪는 크고 작은 변화를 음원으로 비교해 감상하는 재미를 선사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좋은 작품을 만드는 것 못지않게 다양한 이야기와 감상 ‘거리’를 제공하는 것도 무대를 튼실하게 만드는 마케팅 방안이라는 것을 우리나라 제작진들이 빨리 이해했으면 하는 바람으로 반가운 소식을 기다려본다.

글 원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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