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수호의 춤 인생 50년 중 40년은 국립무용단 차지였다. 그가 국립무용단의 주역으로 도포를
휘날릴 적에 윤성주는 “보살 1·2·3·4, 마을 사람 1·2·3·4 중 한 명”이었단다. 지금 국수호는
국수호디딤무용단을, 윤성주는 국립무용단을 이끌고 있다
국수호 선생을 만나러 가는 길. 그저 한 예술가의 50년을 담아낸다는 생각으로, 무색무취 상태로 인터뷰 장소를 향해 걸었다. 그러나 인터뷰가 진행되는 2시간 동안 나는 어떤 팽팽한 ‘힘’에 사로잡혀 있었다. 선생의 말투는 부드러웠으나 당신의 춤 인생을 셀 때는 매서운 손으로 짚어보셨다. 자신의 꿈과 미래에 대해서 논할 때는 멋으로 수사하지 않았다. 인터뷰가 끝났을 때, 내 앞에는 우리나이 67세의 노인이 아닌 17세의 오래된 청년이 앉아있는 듯했다.
여기, 오래된 청년이 있
춤으로 뜻을 세운 17세의 소년은 이제 춤 역사에 기록될 명인이 되었다. 그의 몸에는 한국 춤의 전류가 흐른다. 정자선·정형인·한영숙·이매방·박병천·김천흥·박금슬 명인들의 춤을 한 몸으로 받아냈고, 이를 자양분 삼아 그의 세계를 그리고 우주를 지었다.
춤 인생 50년. 노장은 자신의 춤을 세상에 남기고자 하는 속세의 움직임과 기운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듯했다. 다만 밀실에서 역작이 되리라 믿으며 작업에 임하는 조각가가 아직 마르지도 않은 작품에 대해 흥분하며 이야기하듯 새롭게 빚을 춤에 대해 이야기할 때 더 흥을 올렸다. 열심히 듣고 있던 나는 물었다.
“열일곱의 국수호는 어떤 소년이었나요?”
“지금과 똑같았어. 정말로 춤으로 내 인생을 살겠다고 한 것이 지금까지 온 거야. 자기를 극복하는 것이 자기가 생각하는 것에 다다르는 것이죠. 지금, 나이를 먹은 건 사실인데 새로운 것을 더 노숙하게 해내는 연륜이 내게는 있어. 수많은 자료들 속에서 실을 뽑아낼 수 있는 것처럼. 여기 보여요? 트럭 열 대 분량의 책이에요. 이 속에서 내 춤 50년이 실처럼 뽑아져나온 것이지.”
사방이 책이다. 책장마다 ‘무대미술’ ‘복식’ ‘건축’ ‘가야시대’ 등의 꼬리표가 붙어 있고 영어·일본어·중국어로 된 제목이 책장을 덮고 있다. 그래, 나는 지금 그의 춤이 태어나는 가장 깊숙한 곳에 와 있는 것이다.
“시대가 많이 바뀌었어. 그래도 될 놈은 그 어린 나이에도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을 거예요, 아마도.”
어린 시절을 스스로 ‘떡잎’이었다고 말하는 그가 춤의 넓이와 깊이를 안 것은 불혹의 나이라 불리던 마흔 즈음이었다.
“뼈와 마디, 살과 피가, 내 생각과 흐름이 똑같아지더군요. 춤추는 사람의 뼈와 피는 자기가 의도하는 정신세계로 데려다 주는 그 무엇이에요. 그래서 한국 춤은 기술이 아니에요. 어떤 연륜과 깊은 세월, 그리고 관조의 영감이 흐르고 있어야 예술품이 되는 것이죠, 몸 자체가. 그제야 무대에 올라 손 하나를 올렸을 때 예술가의 초상이 되더군요.”
그의 춤이 지나온 50년의 시간 속에 40년은 국립무용단 차지다. 국수호는 국립무용단 ‘그 자체’였다. 그는 1973년 입단하여 1984년까지 단원으로, 이후 지도위원으로, 1996년부터 1999년까지 단장 및 예술감독으로 재직했다.
“국립무용단은 해외 공연이 많았어요. 해외의 무대에서 한국 춤을 추면서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방법을 터득했던 시간이었습니다. 나는 우리나라에 태어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해요. 한국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국수호의 세계’가 펼쳐질 수 있었죠.”
이제 국립무용단 시절의 이야기가 나온다. 출연했던 작품과 역할, 그리고 연도는 준비해간 자료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하루에 줄넘기 1천 번, 제 몸이 조금이라도 무겁게 느껴진다면 딱 놓아버리는 밥숟가락이 명확한 기억력의 비법은 아닐 것이다. “그때의 그 무대들. 모든 것들이 내 생각과 확실한 신념에서 나온 거예요. 그러니 다 기억이 나지.”
그와 그녀, 춤으로 함께 밥해먹던 시절
곧 국립무용단의 윤성주 예술감독이 도착했다. 이제 눈앞에는 두 명의 춤꾼이 아니라 국립무용단의 ‘과거와 전통’ ‘현재와 미래’가 함께 있는 셈이다.
“성주가 이대를 졸업할 즈음에는 졸업생들이 대부분 김매자 교수가 있던 창무회로 들어가던 시절이었어요. 윤성주 감독은 최현 선생으로부터의 배움이 있고 해서 창무회보다는 최현 선생이 춤췄던 무대, 국립극장이 더 좋다고 해서 들어왔어요.”
최근 국립무용단이 선보인 윤성주 안무의 ‘묵향’은 최현의 ‘사군자’(1993)를 모티프로 한, 최현에게 바치는 오마주였다.
옛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국수호와 윤성주는 “국립극장 아래서 한솥밥”을 먹었지만 국수호가 주역으로 도포를 휘날릴 때, 윤성주는 그녀 자신의 표현대로 “보살 1·2·3·4 중 한 명, 마을 사람 1·2·3·4 중 하나”였다.
“당시 국립은 남자 무용수가 귀하던 시절이었어요. 국 선생님은 독보적인 존재였죠. 국수호 선생님과 정재만 선생님을 동시에 볼 기회도 있었는데, 같은 남자 무용수지만 성향이 굉장히 달랐어요. 춤, 감정 모두. 국수호 선생님은 카리스마와 무대 장악력이 있어서 관객들이 많이 선호했던 거 같아요. 저는 그런 부분을 닮고자 했죠.”
무대 위 국수호의 옛적을 그리는 윤성주에게 나는 살짝 물어봤다. “만약 연애를 했다면요?” “쉽지 않게 살았을 거예요. 어떻게 보면 섬세한 면은 맞는 부분도 있을 거 같은데… 결코 행복하지 않았을 거 같아요(웃음). 저는 그냥 우리 신랑한테 감사해요.”
“그때는 성주가 나 쳐다보지도 못했어(웃음). 원래 국립이라는 곳이 들어오면 5~6년은 죽었다 생각하고 연습만 해야 하는 곳이에요. 최고의 엘리트들이 모인 시베리아 벌판인데. 1984년부터 조연을 맡기 시작했던 것 같은데.”
1984년 당시 송범 단장이 제작한 ‘도미부인’에서 윤성주는 사당녀 역을 맡았고, 1986년에는 ‘은하수’의 직녀 역을 맡으면서 주연으로 활동했다.
“성주는 당시 춤도 춤이지만 캐릭터적인 무용수로서는 최고였어.”
88서울올림픽이 있던 해. 서울국제무용제에 당선된 ‘하얀초상’은 국수호를 ‘춤 작가’로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역사적 상상력, 젊은 연륜이 묻은 움직임, 춤의 문기(文氣)로 일군 작품이었다. 국수호는 혼자 대본·연출·출연을 도맡으며 이차돈 역으로, 윤성주는 달아기 역을 맡으며, 두 사람은 주연으로 무대를 누볐다.
다른 길, 같은 생각
‘선생’ ‘선배’, 이 앞서가는 자의 존재란 참 묘하다. 내 앞에 있을 때는 그의 뒷모습과 걷는 길이 영 탐탁지 않게 느껴진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본인이 그 자리에 서게 되고 후배들을 이끌다 보면 어느덧 그 앞에 있던 자의 마음을 이해하게 된다.
“무용단을 운영하면서 스스로 답을 얻으려고 할 때 보면 어느덧 국수호 선생님을 빗대어서 생각하는 그런 습관이 있더라고요. 선생님은 제가 가까이서 물어보지 않아서 섭섭해 하죠. 그런데 선생님! 진짜 힘드신 게 있긴 있으셨어요? 선생님은 없었을 것 같은데… 단원들도 엄청 잘 휘어잡으시고. 그럴 때마다 생각이 나요. 늘 일이 닥치거나 어려움에 봉착할 때면. ‘샘플’이라고 할까요? 비유가 적절한지 모르겠지만.”
“샘플? 그런 걸 ‘멘토’라고 하는 거야, 이것아.”
사실 두 사람에게는 공통의 멘토가 있다. 송범 선생이다. 송범은 단장으로서 1973년부터 1992년까지 국립무용단을 이끌어왔다. 송범에 대해 윤성주에게 먼저 물으니 넌지시 국수호에게 먼저 답을 받으란다.
“송범 선생은 국립무용단의 아버지예요. 나는 30년을 식구보다 가깝게, 밤낮 같이 지냈죠. 선생이 시킨 거면 아무리 아파도 진통제를 먹고 해냈어요. 생각해보면 선생님을 위해 내가 잘 한 게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서 내가 선생님한테 잘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이에 윤성주가 이어받는다. “저는 선생님이 무용극이라는 장르를 국립무용단에 정착시키는 시기에 입단했어요. 철저함과 통솔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죠. 그것을 늘 닮으려고 했어요.”
지나온 길에 대한 회고에서 이제 국립무용단이 걸어야 할 길이 놓였다. 국수호가 먼저 입을 연다.
“국립무용단은 한국성, 바로 민족성입니다. 역사관이 있어야 해요. 그러한 것들이 주제가 되어서 정체성을 세우고, 춤의 미래를 제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작품으로요. 그리고 현재성도 있어야 하고. 무엇보다 미래지향에 있어서도 국립무용단만의 방법론이 있어야 해요. 미래를 따라가는 방법으로는 에너지 낭비일 수 있어.”
“그간 선생님들이 일군 국립무용단은 지금 세계 최고의 반열에 올랐다고 생각해요. 저도 이러한 역사성을 근거 삼아 단원들에게 국제사회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할 수 있는 세계적인 무용단이 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해요. 어떻게 보면 그간 국립이 보여준 모습과 부딪힐 수 있는 변화가 많은데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해요. 도전이 필요한 시기죠.”
빠른 행보를 은근히 걱정하는 선배와 “선생님! 선생님이 1980년대·1990년대 안무자로 활동을 하실 때는 지금보다 더 진보적이었어요. 이제는 ‘전통’이 되었지만”이라며 웃으며 걱정 말라는 후배. 서로 욕심의 모양은 다르지만 그 열기와 농도는 똑같다.
“귀한 시간 내서 무대에 서시는 데 선생님 건강 조심하시고요. 이제 건강을 위해서 좀 줄이셔야 할 거 같은데요(웃음).”
국수호의 건강을 기원하는 윤성주 감독에게 선배는 끝내 춤, 춤, 춤만 이야기한다.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으로 국립무용단을 끌어가야 해. 무용수들의 행복지수를 늘 생각하고. 그들이 따라와줘야 하거든. 인간은 다 같이 살아야 되는 존재야. 그렇게 함께 세계로 나아가면 좋겠어.” 끝까지 춤, 춤, 춤.
국수호는 올해도 바쁘다. 그의 머릿속은 셰익스피어의 리어왕부터 고려의 산대희(山臺戱), 백제시대 미마지가 추었다는 춤, 조선조 김만중의 ‘구운몽’ 등 시대와 공간을 초월하는 ‘춤거리’로 가득하다.
“영감? 나에게는 내 작품에 대한 예감, 그래 예지력 같은 게 있어요. ‘뭘 하지?’라는 생각을 10여년 들고 다니면서 축적하죠. 10년 이상 뭘 모아야 해. 다음은 ‘더 맨’이라는 작품을 하려고 해요.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으면서 남자가 겪어야 되는 인생. 부인을 먹여 살리고 전쟁에 나가고, 가부장제에서 남자가 겪어야 되는 세계에 대한 비극적인 것을….”
춤 인생 50년을 기념한 이번 무대 ‘춤의 귀환’에 오를 춤을 일일이 설명하는 그의 목소리는 회고의 느낌보다는 무대에 선다는 흥분으로 가득 차 있었다.
“보면 내 작품은 비슷한 게 없어요. 기본적인 움직임으로 쓰인 ‘입춤’이 오르고, ‘장한가’, 이건 춤추는 사람의 격을 돋보이게 하는, 그리고 인생을 관조하는 듯한 느낌을 주고. ‘남무’는 세상을 관조하는 기상으로, 이 세상과 부딪히면서 펼쳐가는 남자의 고뇌가 담긴 춤… 초연하는 ‘고독’은 상생과 소멸의 기운이. 왜, 상생을 거친 존재가 소멸로 향하잖아요. 모든 기운이 빠져나갔을 때 생기는 고독감, 소외감, 무력감 그리고 사회에 대한 저항감이 약해지는 그 인생을 그린 작품이에요.”
이 외에 국수호는 ‘바라승무’ ‘입춤’ ‘남무’를 독무로 선보이고 국립무용단의 이정윤과 함께 ‘용호상박’과 그 외에 ‘금무’를 선보인다. 보통 노장은 객석에 앉아 제자들의 무대를 보며 스치는 과거와 마주하는데, 그는 그 자신이 흘릴 땀방울 속에 과거를 담아보는 것이다. 이번 무대에는 손진책(연출)·박범훈(음악)·박동우(무대미술)·이상봉(조명)이 함께 한다. 안숙선 명창서부터 김영재·이어령·박범훈·김성녀·최태지도 함께 하여 그와의 쌓아온 인연을 들려준다. 3월 5~7일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
글 송현민(음악평론가) 사진 박진호(studio Bo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