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산인문극장 ‘베키 쇼’

밑바닥 정서와 버무려진 미국식 자본주의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4년 5월 1일 12:00 오전

4월 1~26일 두산아트센터 스페이스111

연출가 박근형의 신작이 2014 두산인문극장의 첫 작품으로 올라갔다. 지나 지온프리도의 2008년 작품 ‘베키 쇼’가 그것이다. 지나 지온프리도는 인기 미국 드라마 ‘CSI 과학수사대’와 같은 과학 수사물 ‘콜드 케이스’의 작가이기도 하다. ‘콜드 케이스’의 주인공이 미모의 여자 수사관이고, 이번 작품 ‘베키 쇼’에서도 미스터리한 미모의 여주인공이 나온다. 여자 주인공을 중심으로 빠른 장면 전환과 촌철살인의 대사 감각으로 미국 드라마 특유의 ‘드라이’한 맛을 보여준다. 박근형은 일명 ‘조용한 연극’의 히라타 오리자의 작품 ‘잠 못 드는 밤은 없다’에서도 박근형만의 스타일로 재해석한 ‘박근형표 일상극’을 보여준 적이 있다. 이번 작품의 관전 포인트도 바로 이것이다. 자본주의의 최극단, 풍요로운 미국 시민의 일상의 드라마를 박근형식 밑바닥 정서를 과연 어떤 식으로 보여줄지 궁금했다.
결과는 흥미로웠다. 심리학 박사 과정의 상담 치료사가 등장하고 뉴욕과 보스턴을 오가며 고객들의 거액의 돈을 관리하는 자산관리사가 등장하는, 일명 뉴요커의 도시 생활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배우들의 연기는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일상의 감각으로 전달된다. 베키와 앤드루가 테이크아웃 커피 잔을 양손에 들고 반복해서 포옹하는 장면이나, 냉혹하고 비열한 맥스가 베키를 회유하는 장면에서 수세에 몰려 있던 베키가 빨대로 쭉쭉 빨아먹던 주스 잔은 그 장면이 끝날 때 밑바닥을 드러내며 베키의 밑바닥까지 함께 드러낸다. 수지의 엄마 수잔이 다발성 경화증을 앓으며 목발을 짚고 다니면서도 딸 또래 젊은 남자와의 사랑에 뻔뻔할 정도로 당당한 모습은 흡사 박근형의 ‘경숙이, 경숙아버지’에서 툭하면 딸에게 “인생 평생 외로운 거다!” 퉁명스럽게 내뱉는 경숙아버지의 모습과 겹쳐진다. 수잔 역할의 이연규는 심리적으로 허약한 딸 세대의 인물들과는 다른 통찰력과 독설로 극의 중심에 확고부동하게 버티고 서있다.
극은 어린 시절 한 집안에서 형제처럼 자란 수지와 맥스가 친구와 연인 사이 그 어디쯤 애매한 관계를 유지하는 한편 수지는 앤드루와 결혼하고, 맥스에게 앤드루의 회사 동료인 베키 쇼를 소개하면서 시작된다. 수지는 상담치료사이고, 맥스는 수지 집안의 자산관리사다. 앤드루는 마마보이 기질이 다분하고, 베키는 심리적으로 불안한 상태다. 베키는 예쁘지만 돈도 없고 직장도 불안한 임시직이다. 맥스가 까칠하게 말하듯이 베키는 맥스에게 어울리지 않는 부류의 사람이다. 그런데 문제는 베키가 맥스를 원한다는 것이다. 맥스는 자꾸 자신과 얽히게 되는 베키를 “남자를 잡으려고 안달 난 사이코”라고 진저리친다. 실제로 공연에서 베키 역의 강지은은 예쁘지만 미스터리하고, 때로는 집착이 강한 사이코처럼 보였다가도 귀엽고 코믹한 대사로 객석에 끊임없이 웃음을 끌어낸다. 베키는 반복적으로 “난 건강보험이 없어요!”라고 외치고 관객들은 어김없이 웃는다.
극은 영리하게도 두 명의 부정적 인물인 맥스와 베키를 중심으로 코믹 코드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맥스 역의 신덕호는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차갑고 이기적이면서 자기연민에 빠진 다중적인 모습을 보여주면서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신덕호의 독특한 질감은 박근형의 ‘경숙아버지’와 ‘동백아저씨’의 사이 그 어디쯤의 묘한 지점을 건드린다. 자본주의 도시 뉴욕과 보스턴 한복판에서 정신적 파산에 이르는 맥스에게서 박근형식 남루함이 느껴진다. 지나 지온프리도의 직설화법, 묘하게 박근형과 어울린다.

글 김옥란(연극평론가) 사진 두산아트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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