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죽음이 어우러진 절정의 시간, 피로 물든 무대 뒤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12박의 플라멩코와
3·4조의
한국 장단이 어울리면
어떤 하모니를 이룰 것인가?
‘피의 결혼’은
한국과 스페인 전통의
격렬한 교배의 장이다
가르시아 로르카의 연극 ‘피의 결혼’이 이윤택의 연출로 3월 27일부터 4월 5일까지 명동예술극장 무대에 올랐다. ‘피의 결혼’은 결혼식 날 다른 남자와 도주한 신부와 그들을 뒤쫓는 신랑의 이야기를 통해 죽음과 사랑, 그리고 본능이 지배하는 세계를 시적으로 그려낸 작품이다. 로르카는 같은 내용의 스페인 설화에서 영감을 받아 이 작품을 완성했다.
작품 곳곳에는 스페인 고유의 ‘두엔데(duende)’라는 정서가 서려 있다. 두엔데란 귀신·접신을 의미하는 단어로, 스페인 음악에서 나타나는 황홀경을 의미한다. 안달루시아 지방의 음악 플라멩코에서는 두엔데가 격렬한 발놀림과 몸짓으로 나타난다. 박해받던 집시들의 피맺힌 한과 삶에 대한 열망이 녹아있는 이것은 한국으로 치면 ‘아리랑’에서 한의 정서를 신명의 경지로 승화시킨 것과 같다. 이 연극에서는 플라멩코 춤판이 한바탕 벌어지는 혼례 장면에서 두엔데가 특히 두드러진다.
연출가 이윤택은 연극을 관통하는 플라멩코가 한국의 전통음악 장단과 유사하다는 것에 주목했다. 특히 이 둘의 공통점인 한 맺힌 탁음과 즉흥성, 그리고 청중의 간접적인 참여를 음악 연출에 적극 활용했다. 그는 플라멩코의 정교한 기타 소리에 가야금과 피리, 갖가지 타악의 우리 가락을 덧입혔다. 국악 퓨전 음악그룹인 반(VANN)은 공연 전 흥겨운 미니콘서트를 시작으로 하여 연극 내내 생생한 라이브 연주로 연극의 배경을 장식한다. 배우와 악단은 공연 내내 “올레!”라는 추임새로 청중의 참여를 유도해낸다.
플라멩코와 우리 가락이 신명 나게 어우러진 ‘피의 결혼’은 올해 남미 최대 규모의 공연예술축제인 이베로 아메리카노 연극제에 공식 초청되었다. 400편의 초청작 중 ‘꼭 봐야 할 공연 10편’에 선정된 이 작품은 콜롬비아 보고타 현지의 뜨거운 주목을 받았다. 연희단거리패는 연극제 기간 동안 한국의 신명을 제대로 선보이기 위해 야외 퍼포먼스인 길놀이를 기획했다. ‘피의 결혼’ 백스테이지를 방문한 날은 마침 길놀이 연습으로 한창 분주하던 날이었다.
한 여자를 두고 결투를 벌인 두 남자 주인공이 결국 피바람으로 죽임을 당한다는 비극적인 작품이기에 무대 뒤의 풍경 역시 전반적으로 어두운 편이었다. 의상과 소품, 심지어 조명까지도 모든 것이 ‘피’와 ‘죽음’을 암시하는 것처럼 짙고 강렬했다. 그러나 길놀이 연습만큼은 밝고 활력이 넘쳤다. 길놀이는 사물놀이·사자놀음·탈춤 등 한국 전통예술 중에서도 극적인 효과를 주는 여러 요소를 조합해 구성됐다. 배우들은 신 나게 승모를 돌리기도 하고, 손에 든 인형으로 짧은 인형극을 펼치기도 하며 무대를 활보했다. 명동예술극장 무대 가득히 꽹과리 소리와 함께 “얼쑤!” 하는 추임새가 넘쳐 흘렀다.
오전 내내 진행된 길놀이 연습이 끝나자 배우들은 무대 곳곳에 널브러졌다. 사자 탈을 벗은 배우 둘은 땀으로 온통 범벅이었다. 그 와중에 무대의 한 쪽에서는 배우 이승헌과 최용림의 서커스를 연상케 하는 묘기 연습이 한창이었다.
“날 믿어! 네가 편해야 나도 편해.”
이승헌의 어깨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찾아가는 최용림의 두 팔이 곧 안정을 찾았다. 연기뿐만이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재능을 발휘해야 하는 배우들의 땀방울이 고스란히 느껴진 순간이었다.
잠깐 찾아온 휴식 시간, 배우들은 무대 뒤 분장실에 삼삼오오 모여 앉았다. 휴식은 길지 않았다. 분장 전까지 무대의상을 챙기고 틈틈이 개인 연습까지 하기에도 시간이 빠듯했기 때문이다. 남녀 가릴 것 없이 각자의 의상은 각자가 꿰매고 다렸다. 재봉틀 앞에 아예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레오나르도 역의 배우 윤정섭은 의상 수선에 여념이 없었다. 신부 역의 김하영은 하얀 드레스를 다리고 있었다. 극중에 피를 묻히는 장면이 있기 때문에 드레스는 똑같은 옷으로만 두 벌을 준비했다.
분장 역시 각자의 몫이었다. 색색의 메이크업 팔레트를 거울 앞에 펼쳐놓고서 아이라인을 그리고 눈썹을 다듬었다. 남자 배우들의 숙련된 손길은 웬만한 여자보다 더 섬세했다. 특수분장이 필요한 경우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분장을 도왔다. 아티스트의 손을 거치자 배우 김미숙은 스무 살은 더 늙어보이는 얼굴로 바뀌었다. 거울을 마주보고 있는 그녀에게 인터뷰를 청하고 잠깐 돌아선 찰나, 꾸벅꾸벅 조는 그녀가 보였다. 김미숙의 얼굴을 다듬는 아티스트의 손길이 더욱 조심스러워졌다.
“뭐 하고 있어! 빨리, 지금 무대로!”
오전의 길놀이 연습이 길어진 탓에 본 공연 리허설은 군무 위주로만 짧게 진행됐다. 배우장 김미숙의 호통에 다들 분장을 하다 만 채 허겁지겁 무대로 뛰었다. 배우 김아라나는 얼마나 급했는지 머리에 롤을 만 채 그대로 나왔다. 배경음이 흐르고 플라멩코의 박자를 맞추는 12박의 박수 소리가 들리자 여배우들이 탭댄스를 추듯 치마를 펄럭이며 박자를 밟아나갔다. 도망친 신부와 레오나르도가 숲으로 숨어들 때 등장한 벌목꾼 세 명의 허리춤엔 북이 매달려 있었다. 벌목꾼은 도끼를 채로 삼아 북을 내리치며 긴장감을 고조시켰다.
“이 부분에서는 장구가 조금 빨라져야 돼.”
연극의 배경음악을 담당하는 퓨전 국악 그룹 반(VANN)은 무대 앞에 자리를 잡았다. 배우들이 리허설을 하는 동안 악단은 그곳에서 자유롭게 연습을 하거나 장면에 대한 의견을 주고받았다. 극의 음향 효과까지 담당해야 했기에 연주자의 손에는 방울이나 박 등의 낯선 악기도 들려 있었다. 배우 김미숙은 극중에서 소리를 하는 장면에서 무대 앞으로 나와 악단의 의견을 물었다. 그녀는 같은 대목을 거듭 반복해 부르며 소리의 빠르기나 장단을 세심하게 조절해나갔다.
“공연 20분 전입니다! 관객 입장합니다!”
관객이 입장하고 연주가 시작되자 음향과 조명 스태프들이 일사불란하게 본인의 자리를 찾아갔다. 반나절 꼬박 몸을 움직인 배우들은 피곤할 법도 한데 오히려 눈에 반짝반짝 생기가 흐르기 시작한다. 무대 앞에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피리와 기타 소리를 들으며 배우들은 분장실에서 나왔다. 긴장감 속에 조금씩 몸을 푸는 그들의 몸짓 속에서 이미 핏빛 축제가 시작되고 있었다.
글 이채은 인턴 기자(chaelee@gaeksuk.com) 사진 이규열(라이트하우스 픽쳐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