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배수의 고도’

직설화법으로 마주한 마술적 리얼리즘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4년 7월 1일 12:00 오전

6월 10일~7월 5일 스페이스111

‘배수의 고도’—‘배수진(背水陣)’을 친 것과 같은 처지의 ‘외로운 섬(孤島).’ 이렇게 절박한 제목이 또 있을 수 있을까. ‘배수의 고도’는 2011년 3월 동일본 대지진으로 인한 후쿠시마 원전사고를 다룬 일본 작품이다. 초연은 원전사고의 여파가 생생한 2011년 9월에 이루어졌다. 작가 나카쓰루 아키히토가 대지진 당시 가장 피해가 컸던 도호쿠 지방 미야기 현의 이시노마키 시를 직접 취재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극장의 불빛이 꺼져서는 안 된다.” 대지진 이후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전철의 배차 간격이 느려지고 연극이 중단되는 사태가 속출하는 가운데 도쿄예술극장 예술감독 노다 히데키는 대지진 나흘 만에 공연을 재개하며 이러한 선언문을 발표했다. 세월호 침몰사고 이후 일상이 멈추고 방송에서 댄스음악이 사라지고 공연 취소가 잇따랐던 우리의 상황과도 겹쳐지는 대목이다. 우리의 연극인들도 지금 무엇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6월 중순까지 실종자 수는 열두 명. 우리는 여전히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

‘배수의 고도’의 원전사고와 세월호 침몰사고는 단순한 천재지변이나 사고에서 더 나아가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을 적나라하게 목격하게 해주었다는 점에서 우리 모두에게 절박한 문제로 다가왔다. ‘배수의 고도’는 동시대 문제에 대해 인문학적 성찰의 질문을 던지는 ‘두산아트센터다운’ 공연이었고, 연출가 김재엽 또한 ‘제대로 임자를 만난’ 공연이었다.

무엇보다 이번 공연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객관적 거리를 유지하고 냉정하게 공연을 바라보려는 태도이다. 나카쓰루 아키히토의 원작이 원전 사고 직후와 10년 후의 디스토피아적 암울한 가상 현실을 다룬다는 점에서 작품 자체에 과잉된 감정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런데 연출가 김재엽은 원작의 격양된 감정을 걷어내고 포장하지 않은 채 맨 목소리의 직설화법으로 관객에게 말을 건넨다.

먼저 주인공을 원작의 피해자 가족인 10대 소년 다이요(김시유 분)가 아니라 다큐멘터리 감독 고모토(이윤재 분)를 중심으로 삼아, 다큐멘터리 감독의 블로그 속 내레이션으로 1부와 2부의 프롤로그를 시작하고 있다. 마지막 장면은 한국의 원전 상황에 대해 새로 삽입한 김재엽 연출의 에필로그로 마무리되고 있다. 마치 액자 틀 구성처럼 고모토의 내레이션을 배치하고 객관적 관찰자인 고모토의 시선으로 극을 바라보게 한다. 일본 원작의 10대 소년 다이요가 10년 후 방사능 테러를 일으키고 친환경 태양광 발전소를 제안하는 흡사 SF만화 같은 설정을 객관화시키는 것과 동일하게 정치권·언론·재계·피폭자 모임·원전 반대 시위대 등 상반된 입장 모두를 만화경처럼 제시하고 있다. 원전반대 피폭자 단체의 10만 인 서명을 전달하는 자리에서 정치권의 ‘인증 카메라’ 못지않게 반원전 단체 간부가 기계적으로 외치는 구호 역시 동시에 풍자하고 있다.

공연은 원전사고 직후와 10년 후 가상현실에 동일하게 등장하는 인물들로 인해 마치 1인2역의 공연을 보는 듯한 극적 재미를 보여준다. 그 과정에서 영화보다 강력하고 소설보다 더 거짓말 같은, 그야말로 현실이 비현실로 느껴지는 ‘마술적 리얼리즘’이라는 역설적인 말이 떠올랐다. 공연 속 10년 후 가상현실의 SF 만화 같은 장면은 현대판 ‘마술적 리얼리즘’이라 할 수 있다. 쓰나미 이재민 가족의 아버지 역을 맡은 선종남, 피폭자 노자키 역의 하성광의 연기는 이 가짜 같은 상황에 실체감을 부여해주는 중요한 역할을 해냈다.

사진 두산아트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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