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앙 주앙 피르스의 음악적 발자취가 담긴 두 레이블의 녹음 전집을 통해 그녀가 걸어온 연주의 길을 느낄 수 있다
단순히 웃고 즐기기 위한 TV 프로그램이라도 그 내용이 기억에 오래 남아 의미 있는 감상을 전달할 때가 있다. 언젠가 주말 예능 프로그램에서 출연자들의 운동경기와 체력 등을 기록했다가 1년 후인 현재의 모습과 비교하는 코너를 만들었던 것이 기억난다. 출연자 모두 1년 전 자신에게 지지 않으려고, 혹은 1년 전의 자신을 넘어서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데, 그 모습이 재미있으면서도 참 많은 것을 느끼게 해주었다. 대다수 시청자도 그들의 고군분투를 보며 즐거워함과 동시에 결국 가장 어려운 상대이자 극복하기 힘든 대상은 바로 자신임을 깨달았을 것이라 생각된다.
스포츠처럼 정확한 기록이 수치로 나타나는 것도 아닌 예술 분야에서 나를 넘어서야 하는 일은 지극히 추상적이고 실체가 모호한 대상을 이겨내야 하는 것이다. 게다가 그 시도가 매일, 아니, 매 시간 마땅히 일어나야 하는 일이니 그 어려움이 얼마나 큰지 경험해보지 않고서는 짐작도 불가능하다. 그중에서도 자신의 예술을 무작정 확대시키려 하지 않고 수많은 레퍼토리 가운데 자신만의 영역을 찾아내 파고드는 모습을 지닌 연주자는 평생을 자신과의 숨은 싸움에 바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 독보적인 피아니즘을 소중한 보석처럼 평생 갈고닦아온 마리아 주앙 피르스는 이토록 쉽지 않은 음악의 가시밭길을 헤쳐온 인물이다.
마리아 주앙 피르스의 ‘중간 평가’
마리아 주앙 피르스가 칠순을 맞는 올해 여름, 그녀의 방대한 녹음을 정리한 두 개의 레코딩 박스물이 거의 동시에 발매되었다. 에라토 레이블은 1970년대 초반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의 협주곡과 솔로 녹음들을, 도이치 그라모폰의 박스는 그 이후부터 가장 최근인 2012년 위그모어홀 라이브 실황에서의 브람스 연주까지 담고 있다. 추후 도이치 그라모폰에서 협주곡과 실내악 분야를 따로 소개할 예정이긴 하지만, 평소 한정된 작곡가들의 작품을 연주하는 피르스의 이번 박스 음반 두 종은 피르스의 예전 모습과 2000년대 이후의 해석을 직접적으로 비교하는 자료가 된다. 피르스의 팬들은 물론이고, 피아니스트들의 다양한 면면에 관심이 많은 애호가들에게 이번 기획은 매우 뜻깊다.
피르스가 최근 브뤼셀을 중심으로 한 교육 활동으로 인해 앞으로 연주 활동을 줄일 가능성이 많다. 가족(그녀는 2남 4녀를 두고 있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기를 원하며 포르투갈과 브라질에 있는 농장에도 많은 애정을 쏟고 있는바, 지금까지의 ‘중간 평가’가 더욱 귀하게 보이는 것이다.
1970년, 베토벤 탄생 200주년을 기념해 브뤼셀에서 열린 베토벤 콩쿠르에서 1위를 하며 그 이력을 시작한 피르스의 음악 인생은 그 후 별다른 어려움 없이 성장의 길을 걸어온 듯 보이지만, 피아노를 통한 자신의 ‘목소리’를 찾기까지 그 누구보다 오랜 시련을 견뎌내야 했다. 첫 번째 스승이었던 캄푸스 코엘류는 피르스의 개성과 상관없이 그녀가 비르투오소적인 연주자가 되길 원했고, 스승과의 갈등은 열여섯 살 때 뮌헨으로 자리를 옮겨 공부하면서 비로소 해결되었다. 뮤직 아카데미에서 로슬 슈미트를 사사하며 레퍼토리를 넓혀가던 피르스는 당대의 대표적인 베토벤 연주자 빌헬름 켐프를 만나면서 특유의 탐미적이면서도 투명한 색채의 피아노 음향에 눈뜨게 된다. 켐프는 어린 피르스가 구사하는 ‘피아노 안의 해머가 느껴지지 않는’ 부드러운 터치에 놀라움을 표시했다고 한다. 이후 하노버로 건너가 카를 엥겔을 사사하면서 피르스의 모차르트 스타일이 완성되었다. 따스하고 섬세한 터치에 설득력을 더하고 프레이징 하나하나에 깊은 음악적 메시지를 담아내는 요령을 터득한 피르스는 20대 후반의 나이에 본격적인 연주와 음반 세계에 뛰어든다.
해석의 변화가 돋보이는 두 레이블 음반
무대에 많이 올리지는 않지만 스스로 빌헬름 켐프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는 바흐의 음반이 두 개의 박스 모두 첫 장을 장식하고 있다. 도이치 그라모폰의 1995년 녹음은 파르티타 1번과 영국 모음곡 3번 등을 담고 있는데, 누구도 흉내 내기 어려운 미음가로서의 달콤한 음색과 향취가 강한 페달링이 매력적이다. 바흐의 피아노 협주곡 D단조·F단조 등을 담은 에라토의 녹음은 때때로 미셸 코르보즈의 굴벵키안 오케스트라가 솔로의 음향을 덮는 것을 제외하고는 탄력 있는 리듬감과 유연한 흐름에서 뛰어나다.
피르스의 주력 분야인 모차르트는 역시 양쪽 레이블 박스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대표적인 협주곡들을 싣고 있는 에라토의 음반들은 완성도 면에서 어느 곡 하나를 꺼내기가 어려울 정도로 고른 모습이다. 잘 다듬어진 음상과 관현악 내 솔로 악기들과의 긴밀한 호흡, 단정하면서도 우아한 템포와 리듬 감각은 1970년대 모차르트 협주곡의 이상적 해석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유창한 흐름과 적절한 서정성이 고전미의 전형을 보여주는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1·23·26·27번 등이 피르스가 지속적 애정을 갖고 다루는 작품들이다. 도이치 그라모폰의 모차르트 소나타 녹음들 역시 모나지 않은 아고기크와 미세한 뉘앙스 조절이 탁월하다. ‘터키 행진곡’이 들어 있는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 11번은 비르투오소적인 면모를 살짝 엿보이며, 13번은 지적인 정서를 가득 담고 있다. 만년의 걸작인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 17번은 원숙함을 내세운 음영의 조화가 돋보이는데, 서두르지 않으면서도 매끄러운 진행이 인상적이다. 독주곡 가운데는 모차르트 환상곡 C단조 K475와, 이와 함께 자주 연주되는 피아노 소나타 14번 등이 피르스의 애주곡으로 양쪽 박스에 모두 실려 있다. 과감하고 직선적인 터치는 도이치 그라모폰 녹음이, 작품이 지닌 비극적 정서의 은근한 표출은 에라토 녹음이 좋다.
쇼팽의 작품은 모차르트 못지않게 그녀가 사랑하는 분야로, 데뷔 시절부터 명연들이 이어진다. 에라토에서는 1977년의 협주곡집이 인상적이다. 음악적 고집이 단단하고 명확하게 짚어가는 터치를 통해 한 음 한 음 꼼꼼하게 그려지며, 프레이징의 끝 부분을 정성스레 오므리듯 표현하는 것은 피르스의 장기이다. 이 밖에도 1984년 녹음인 쇼팽 왈츠집은 단정한 율동미와 함께 기교적 패시지들이 외향적인 느낌으로 그려지고 있어 특별하다. 도이치 그라모폰 녹음에서는 다소 평면적인 프렐류드보다는 피아노 소나타 3번과 마주르카, 첼로 소나타(첼로 파벨 곰지아코프) 등 만년의 작품이 담긴 2008년 녹음이 연주자의 개인적인 투병 이후의 작업인 만큼 좀 더 차분하고 달관의 정서가 두드러진다. 또 1996년 발표된 녹턴 전곡은 이미 여러 매체에서 명반으로 소개된 적이 있는 만큼 긴 언급이 필요 없을 듯하다. 라틴 혈통의 생명력과 숨은 정열, 세분화된 루바토에 이르기까지 스물한 곡이 각각 다른 색채의 매력을 발산한다.
나긋나긋한 터치와 맑은 서정성으로 요리하는 슈베르트도 피르스의 또 다른 얼굴이다. 양쪽 레이블에 모두 실려 있는 마지막 피아노 소나타 D960은 에라토의 옛 녹음이 부드러움과 센티멘털의 정서에서 다소 앞선다. 같은 음반에 실린 즉흥곡 Op.90의 3번과 4번은 가볍고 날렵한 손놀림이 귀엽게 다가온다. 도이치 그라모폰의 1989년 음반에는 ‘악흥의 순간’과 피아노 소나타 14번 A단조가 실려 있다. 모범생적인 이미지를 깔끔한 정서로 마무리한 ‘악흥의 순간’에서는 2·4·6번이 하이라이트이며, 어두운 정서와 침착한 템포가 적절히 어울리는 소나타에서는 3악장 알레그로 비바체가 가장 호연이다. 주로 유희적인 이유로 만들어진 슈베르트 듀오곡들에 피르스가 관심을 보여 양 시대에 모두 녹음을 남긴 것도 특이하다. 특히 인기가 높은 환상곡 F단조가 감상의 포인트다. 터키 출신의 휘세인 세르메트와 녹음한 에라토 음반에서는 매끈한 조형과 평탄한 다이내믹이 나타나며, 1993년 리즈 피아노 콩쿠르 우승자인 히카르두 카스트루와 연주한 도이치 그라모폰 음반은 한층 굵어진 음상과 확대된 스케일을 감상할 수 있다.
베토벤 콩쿠르 우승자 출신이나 정작 이 작곡가와 크게 인연이 없는 듯한 피르스의 녹음들과 만나는 반가움도 크다. 에라토 시절에 만든 소나타 ‘열정’ 등은 한계가 있는 손의 크기나 그 외 신체적 제약 등으로 다소 힘에 부치는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장기인 피아노 소나타 30번 등은 양쪽의 녹음 모두에서 탁월하다. 사뿐사뿐하게 시작하는 1악장, 추진력 넘치는 2악장의 스케르초에 이어 텍스트의 숲을 여유롭게 헤쳐나가는 3악장의 변주곡까지 고른 완성도를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