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하의 편지는 지금 이 시점에서 제가 기대하고 있는 말씀, 그리고 최고의 친구가 사려 깊은 도움을 주겠다는 말씀을 담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나 자신, 최선을 다하겠다는 것과 그동안 완전히 엉망이 되어버린 일은 이제 잊기로 노력하겠다는 걸 귀하에게 약속합니다. 어떻게든 빈에서 귀하를 만나고 싶습니다. 상트 안톤에 차를 타고 지나치거나 기차로 통과하실 때, 귀하를 만나고 싶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귀하가 도착하는 정확한 날짜라도 알려주십시오.”
1947년 초여름 EMI의 프로듀서 월터 레그에게 쓴 편지에서 카라얀은 나치 부역 혐의로 인한 음악 활동 금지령에서 자신이 벗어날 수 있도록 도움을 달라고 애끓은 하소연을 하고 있다(앨런 샌더스의 ‘월터 레그의 글과 음악’). 이런 호소가 먹혀들었는지 그해 가을부터 그는 음악 활동을 재개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탈출한 그는 1960년까지 자신을 세계 최고의 녹음 아티스트로 만들어준 EMI 제1기 시대를 구가한다.
이번에 워너 클래식스에서 내놓은 총 35장에 달하는 네 개의 음반 세트는 몇 달 전에 나온 세 개의 박스 세트와 함께 EMI 제1기에 나온 그의 녹음 작업을 망라하고 있다. 이 시기의 녹음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은 새로운 시대가 필요로 했던 ‘만능 음악가’ 카라얀의 면모다. 레그는 EMI와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를 중심으로 하여 전후(戰後) 글로벌 음악 산업 최강자의 자리에 영국을 올려놓고자 했다. 레그의 야망을 달성하는 데 있어서 카라얀은 오스트리아·독일의 정통 고전·낭만 레퍼토리뿐만 아니라, 로시니·구노·레온카발로·비제·베를리오즈·오펜바흐·시벨리우스·드뷔시, 그리고 차이콥스키를 비롯한 러시아 레퍼토리에 이르기까지 시대와 조류, 그리고 작곡가의 국적을 가리지 않고 거의 모든 레퍼토리를 만능으로 소화해내는 전천후 지휘자였던 것이다.
그리고 EMI 제1기에서 드러나는 것은 카라얀이 음악 애호가들 또는 음반 소비자들의 수없는 반복 감상에도 신선미를 잃지 않는 음악 메시지를 녹음으로 보존하고 전달하는 새로운 연주 스타일을 이미 확립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어느 작품에서든 텍스트에 담긴 핵심 메시지를 균형·절제·조화에 기반을 둔 정연한 음향으로, 이른바 카라얀 사운드로 연출하는 음악의 연금술사 같은 능력을 이들 음반 세트에서 확인할 수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최고의 녹음 아티스트 카라얀이 푸르트벵글러·첼리비다케·요훔 같은 대표적인 콘서트 지휘자들과 궤를 달리하는 존재라는 사실이 분명하게 떠오른다.
카라얀의 EMI 제1기 녹음들을 시기와 주제별로 묶어내고 있는 워너 클래식스의 작업은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글로벌 음반 산업의 기틀을 다진 지휘자 카라얀의 초기 작업(간혹 이 시기를 두고 ‘성실한 카라얀’의 시대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다)을 집대성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역사 자료로서의 가치가 남다르다고 할 수 있다. 월터 레그가 자신의 자서전에서 정리한 바 있는 ‘세련되게 다듬어낸 것으로서 여기에 아름답지 않은 것은 전혀 없으며, 광채가 번뜩이기도 하고, 어택을 하는 기미도 없이 포르티시모에 도달하는’ 카라얀 사운드의 원형을 이들 음반 세트에서 우리의 귀로 직접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❶바흐·베토벤·브람스 합창음악(1947~1958)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지휘)/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 Warner Classics 0825646336296 (4CD, ADD)
❷‘오케스트라의 화려함, 헨델부터 버르토크까지’ 관현악곡집(1949~1960)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지휘)/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 Warner Classics 0825646336210 (13CD, ADD)
❸무소륵스키·차이콥스키·보로딘·발라키레프·스트라빈스키 관현악곡집(1949~1960)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지휘)/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 Warner Classics 0825646336203 (7CD, ADD)
❹모차르트·슈베르트·브람스·요한 슈트라우스·바그너·R. 슈트라우스 관현악곡집(1951~1960)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지휘)/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 Warner Classics 0825646336234 (11CD, AD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