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프라이드’
11월 2일까지 대학로 아트원씨어터 2관
“운명의 연인을 만났는데 그가 알고 보니 재벌이더라.”
신데렐라 이야기를 무궁무진하게 변주하는 TV 드라마 제작자들의 항변이다. 사실 맞는 말이다. 사람이 누군가에게 사랑을 느낄 때 중요한 건, 서로가 교감하는 사랑의 감정이고 그를 둘러싼 조건들은 그 이후의 일이다. 동성애자도 마찬가지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는데 알고 보니 그 상대가 동성일 뿐이다. 사랑의 방식을 놓고 보면 이렇게 간단한 것임에도 동성애는 여전히 문제적 범주 안에 놓여 있고, 사회적 인식의 장벽 또한 쉽사리 소멸되지 않고 있다. 연극 ‘프라이드’는 바로 이 동성애의 과거와 현재를 매우 영리한 방법으로 그려내고 있는 작품이다.
무대 위에는 1958년과 2014년이 겹쳐 있다. 필립·올리버·실비아 세 사람이 50여 년의 시간을 오가면서 사랑과 인간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영국에서 1958년은 여전히 동성애가 금지된 상황이지만, 동성애를 범죄행위로 보면 안 된다는 울펜던 보고서가 출간된 다음 해이기도 하다. 부정의 제도와 긍정의 인식이 공존하던 시대인 셈이다. 2014년은 세계 곳곳에서 동성애자들의 결혼이 합법화되었고, 그들의 시위 ‘프라이드’가 축제로 여겨지는 지금 현재다.
1958년의 필립과 올리버는 그들의 정체성에 괴로워하며, 변태나 정신병자로 취급하는 사회와 제도에 대해 굴복하고 이별한다. 이에 반해 2014년의 필립과 올리버는 보통의 연인처럼 싸우고 이별하며 또다시 사랑의 근원으로 합일이 된다. 겹쳐 있는 1958년과 2014년의 서로 다른 모습은 50여 년 동안 힘겹게 그들의 목소리를 내어온 동성애자들의 역사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고통의 과거, 그 속에서 미약하나마 “괜찮아질 거야”라는 위로로 소리 내어온 그들의 세월이 쌓이면서 역사가 되고, 그 역사를 통해 그들의 존엄성, 즉 프라이드가 존중받게 된 것이다.
‘프라이드’의 영리함은 이렇게 과거와 현재를 무대 위에 겹쳐놓음으로써 동성애자들의 프라이드가 어떤 과정을 통해 역사가 되고 그들의 침묵이 소리로 변화하는지를 확연하게 제시했다는 점이다. 거기에 시간의 이동이 어색하거나 무리가 가지 않게 한 장치들—무대를 함께 쓴다거나 배우들이 관객 앞에서 다른 시대의 옷을 갈아입는다거나—은 매우 연극적으로 진행되어 더디지만 조금씩 또렷해진 그들의 목소리들을 효과적으로 들을 수 있게 했다. 또한 동성애를 다룬 작품들에서 흔히 나타나는 과도한 정사 장면도 한결 가벼워져 동성애에 대한 표피적이고 말초적인 흥미와 관심이 아닌 동성애 자체, 나아가 사랑의 근원에 대한 고민을 객관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겹쳐진 시간대를 오가는 구성에 따라 배우들도 각 시대에 맞게 다른 성격들을 적절하게 연기했고, 세 배우의 앙상블도 안정적이어서 1958년과 2014년이 서로 다르면서도 같다는 것을 효과적으로 보여주었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두 시대를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키워드인 그들의 ‘사랑’이 감정으로 전달되지 않아서 1958년 필립의 고통도, 2014년 올리버의 외로움도 그 무게가 덜했다는 점이다.
사랑이 무슨 죄가 있을까? 세상이 무서운 건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미워하고 무관심해지는 것이다. 상대가 누구든 사랑은 좋지 아니한가? 뜨거운 여름을 지나 가을로 넘어가는 길목, 우리 모두 사랑이 필요할 때다.
글 배선애(연극평론가) 사진 연극열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