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여자는 울지 않는다’

매운 이야기꾼의 등장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5년 3월 1일 12:00 오전

연극 ‘여자는 울지 않는다’
2월 5일~7일
두산아트센터 스페이스111

매운 이야기꾼의 등장


▲ 사진 두산아트센터

올해 두산아트랩 공연 목록에서 낯익은 이름 하나를 발견했다. 지난해 CJ 크리에이티브 마인즈 선정작 공연으로 올라갔던 ‘소년B가 사는 집’을 쓴 이보람 작가의 신작 ‘여자는 울지 않는다’가 그것이다. 단 3일 동안의 공연, 70분의 짧은 독회 공연이다. 그런데도 객석은 다양한 사람들로 가득 찼다. 새삼 최근 낭독극 공연의 인기를 실감했다. 정식 공연은 아니지만 낭독극만이 줄 수 있는 특별한 재미 덕분이다. 낭독극은 정식 공연 이전에 무대화의 가능성을 미리 점쳐보는 기회로 시도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에 따끈따끈한 신작을, 특히 신인의 작품을 남보다 먼저 만날 수 있다는 점에서 관극의 구미를 당기게 한다. 그리고 낭독극의 실제 무대화 가능성을 함께 점치는 일은, 일반인이 쉽게 접근하기 힘든 작품 개발 과정에 동참한다는 은밀한 즐거움과 동시에 연극 골수팬으로서 누릴 수 있는 짜릿함을 느끼게 한다.
이번 공연도 마찬가지다. 이 공연은 낭독극이 보여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보여준다. 무대는 덧마루 위에 놓인 의자 두 개가 전부지만, 배우들이 객석 이곳저곳에서 자유롭게 등퇴장하고 대사를 던진다. 장면과 장면 사이의 짧은 암전도 리듬감 있게 분절, 정리되어 있다. ‘낭독극답게’ 적극적인 액팅은 없지만 등장인물의 시선과 등퇴장의 동선은 확실히 정리되어 있다. 그야말로 공연 올라가기 직전의 상태를 보는 듯했다. 연출가 부새롬의 급성장한 연출력이 장면 곳곳에서 조용하지만 확신에 찬 채로 전달되었다.
작품은 쉽지 않은 주제를 다룬다. 과거의 성폭행 경험과 현재의 연쇄 성폭행 사건 수사의 큰 줄기가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전개된다. ‘여자’는 연쇄 성폭행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의 아내이자, 첫 번째 피해자의 자살을 계기로 재개된 수사의 피해자 진술서 검토를 의뢰받은 심리 상담 전문가다. 그리고 이미 눈치 챘겠지만, 극이 진행되면서 ‘여자’가 자살한 피해자의 진술서를 검토하면서 대면하게 되는 것은 여자 자신의 과거다. ‘여자는 울지 않는다’의 단호한 부정어법의 제목처럼 여자는 자신의 과거를 부정한 채 살아왔다. 젓가락과 포크, 생선회와 횟집, 자살과 임신, 북극성과 구약성서의 욥의 이야기 등 장면을 풀어가는 손끝이 매섭다. 초밥을 쥐기 위해 손가락을 얼음물에 담그는 요리사와 같다.
고통을 이야기하는 일은 마찬가지로 고통스럽다. 이보람 작가는 여자의 고통을 욥의 언어로 말한다. 모든 재산을 잃고 자식도 잃고 온몸에 부스럼이 뒤덮어 고통스러워하는 욥에게 아내는 말한다. “차라리 신을 욕하고 죽어버려라.” 그런데 욥의 이야기는 여자 개인의 목소리가 아니라 객석에 서 있는 배우들이 외치는 군중의 목소리로 들려온다. 눈물이 아니라 분노의 목소리로 들려온다. 사실 성폭력 사건에서 우리가 공감할 감정은 눈물이 아닌 분노다. 피해 여성이 결국 자살한 것은 개인적 고통 때문이 아니라 성폭력 피해가 일어났음에도 1층 길거리 집 창문에 여전히 방범창이 세워지지 않았고, “생각보다 멀쩡하네” “재수가 없어서 그런 거다”라고 말하는 주위의 냉정한 시선 때문이다. 피해자의 자살은 2차, 3차 피해의 결과다. 어머니 강애심과 의붓아버지 김용준 배우가 할 말 대신 노래방 기계에 맞춰 탬버린을 흔들어대듯, 이 세상에는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한 시끄러운 노래방 기계가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차라리 신을 욕하고 죽어버려라”의 저주에도 여자는 울지 않는다. 이보람 작가는 제목처럼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여자의 분노를 제대로 터뜨리고 있으며, 부새롬 연출가는 수많은 욥의 고통의 언어가 탬버린 소리와 끝까지 싸우게 했다. 매운 이야기꾼들이 등장했다.

글 김옥란(연극평론가) 사진 두산아트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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