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티마 베스의 ‘육체가 기억하지 않는 것’

영국 12개 도시 투어 진행 중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5년 3월 1일 12:00 오전


▲ ⓒDanny Willems

벨기에 현대무용 안무가 빔 판데키부스가 자신의 무용단 울티마 베스와 올린 첫 작품 ‘육체가 기억하지 않는 것’(What The Body Does Not Reme-mber, 1987)이 2월과 3월 영국 12개 도시 투어를 진행 중이다. 2월 10~11일 런던 새들러스웰스에서 투어가 시작됐다. 판데키부스가 남긴 21세기 작품들은 국내 팬에게도 익숙하다. 2003년 내한작 ‘블러쉬’(Blush)에서 개구리를 산 채로 믹서에 넣어 갈아 마시는 장면이나 2005년 내한작 ‘순수’(Puur)에서는 무용수들이 무릎 연골이 손상될 만큼 과격한 동작으로 몸을 헤아리는 벨기에 현대무용의 일단을 선보였다. 2008년에도 울티마 베스는 판데키부스의 초기작을 옴니버스로 묶은 ‘슈피겔’(Spiegel)로 한국을 찾았고, ‘육체가 기억하지 않는 것’도 발췌 버전으로 한국 관객과 만난 적이 있다.

에스파냐어로 ‘마지막 순간’이라는 의미의 울티마 베스는 정제된 무용 동작이 아닌 의도되지 않은 거친 몸짓을 무대 위에 수놓는 것으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내세운다. 유럽의 대다수 평론은 가공된 동작이 아닌, 극한 상황에 직면한 인간의 동물적 행위를 사유하는 판데키부스의 방식에 매료되어 20년 넘게 그의 작품을 지지하고 있다. 서로의 몸을 밟거나, 압살을 피하기 위해 바닥을 기어 다니다 숨이 차오른 무용수가 침 흘리는 장면은 자연스레 동물의 거친 호흡을 연상시킨다. 이런 점들은 수의사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다양한 동물과 접촉했던 판데키부스의 배경을 떠오르게 한다.

평소 ‘안무가’라는 호칭을 꺼려하는 판데키부스는 과거작을 리바이벌하면서 ‘화재가 난 빌딩에서 아기를 소방관에게 집어던지는 엄마의 모습’을 무용수들에게 사진으로 보여주며 생명을 위한 행위에 이성이 개입하는지, 본능에 충실한 동물의 움직임이 결국은 생명을 갈구하는 몸짓이 아닌지를 무용수들과 공유했다. 1987년작의 현재적 의미는 무용 동작은 아름다워야 한다는 관성적 편견과 작품에서 아름다움을 유추하려는 수용자들을 배반하는 방식으로 충격을 던져준 그동안의 패턴을 성찰하는 방식으로 구체화됐다.

자극을 위한 자극에 머물지 않고 관객을 배려하는 아량이, 안무가로부터 움튼 단서를 통해 작품 곳곳에서 관찰됐다. 울티마 베스의 역사를 통해 이들의 동작이 결국엔 계산된 움직임이라는 것을 관객도 이제 알게 됐다. 작품을 관조할 여유가 생기다 보니 근원적 욕망을 유머러스하게 풀어내는, 연기력이 뒷받침된 무용수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특히 2004년 서울국제무용콩쿠르에서 현대무용 부문 1위를 차지한 마리야 콜레고바는 남성 무용수를 희롱하는 태연자약한 연기로 웃음을 자아냈다. 티에리 드 메와 페터 페어메르슈의 현대음악을 라이브로 반주한 익투스 앙상블의 연주가 작품에 새로운 논리와 탄력을 불어넣었다. 과거에는 충격적이었지만, 이제는 아픔의 지점이 희미해지면서 ‘육체가 기억하지 않는 것’은 현재성을 얻게 됐다. 리바이벌을 위한 리허설 감독으로 에두아르도 토로하가 무용수들과 음악가들 사이를 조율한 결과다. ‘슈피겔’ 이후 7년 만에 새들러스웰스를 방문한 울티마 베스에 대한 영국 언론의 반응은 호의적이었고, ‘가디언’은 ★★★★를 부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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