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은숙 오페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2007)가 초연 당시의 연출가를 바꾸고 콘서트홀 규격의 세미 스테이지 규모로 경량화해 3월 8일 런던 바비컨 센터에서 초연됐다. 2월 27~28일 미국 로스앤젤레스 월트 디즈니 홀에서의 수산나 말키/LA 필 공연이 ‘LA타임스’지를 비롯한 현지 언론의 극찬을 받은 것에 탄력을 더해 BBC 심포니의 이날 공연도 매진을 이뤘다.
현대음악으로 이번 시즌 2000석 규모의 콘서트홀이 매진된 건 1월, 사이먼 래틀/런던 심포니의 베베른·베르크·리게티 시리즈 이후 두 번째이며, BBC 심포니 정규 공연으로는 올해 첫 매진이다. 지휘는 올해 포르투 카사 다 무지카 오케스트라 감독으로 부임한 발두어 브뢰니만이 맡았다. 브뢰니만은 2009년 서울시향 아르스노바 공연에서 진은숙 ‘로카나’ 한국 초연 때 지휘한 인연이 있다. 70세 생일을 맞은 마이클 틸슨 토머스도 이날 관객으로 공연을 함께했다.
진은숙은 2008년 금호아트홀에서 열린 렉처 콘서트에서 초연을 맡은 아힘 프라이어의 연출이 이야깃거리를 전달하는 데 실패했다고 밝힌 바 있다. 때문에 심리적 긴장을 즐기는 프라이어 스타일의 표현주의 추상을 멀티미디어 아티스트 네티아 존스로 대체했다. 존스는 2010년대 이후 영미 오페라·연극계에서 비디오아트를 이용한 무대 디자인으로 호평 받는 인물이다. 문학 텍스트의 핵심을 시각화하는 방법이 대중의 기호를 단숨에 사로잡았고, 대체 현실을 인터랙티브 매체로 드러내는 존스의 방식이 진은숙의 음악과 어떻게 조화를 이룰지 관심을 모았다.
이번 작품에서 연출·의상·조명·디자인을 총지휘한 존스는 프라이어 버전의 공간 활용은 계승했다. 등장인물이 45도 각도의 경사면과 그 앞에 뚫린 구멍, 무대 위 허공의 세 차원으로 움직이는 동선을 존중하면서 곡의 순서에 따라 자연스럽게 관객의 시선이 이동하는 미덕을 살렸다. 비주얼 아티스트로서 존스의 미적 감각은 스크린에 영사된 비디오아트를 통해 극대화되었다. 주인공 앨리스의 심상이 스크린에 투사됐고, 관객은 스크린과 스테이지에서 벌어지는 사건의 대립을 순하게 지켜볼 수 있었다.
이날 공연을 두고 ‘텔레그래프’지는 ★★과 함께 “연출과 랄프 스테드먼의 삽화가 원작의 정체성을 훼손했다”면서 “신나기보다는 탈진했다”고 평한 반면, ‘인디펜던트’지는 “진은숙은 자신의 모자 안에서 무궁무진한 관현악적 트릭을 끄집어냈다”면서 ★★★★을 부여했다. ‘가디언’지는 주역인 소프라노 레이철 길모어와 래빗 역의 카운터테너 앙드레 와츠 등 성악진의 수연을 평가하면서 개작 역시 원작의 ‘영국적 향수’를 조명하지 못했다는 아쉬움과 함께 ★★★을 부여했다.
개작의 또 다른 중요성은 버전의 경량화다. 작품의 공연 주체가 LA 오페라가 아닌 LA 필이나 BBC 심포니다. “진은숙의 오페라 전막은 한국에 시기상조”라는 기존의 국내 오페라 제작진의 반응에 대해 적어도 진은숙은 예산 부분을 절감하는 노력을 실천적으로 보였다.
지난해 BBC 프롬스에서 서울시향이 진은숙의 생황 협주곡을 연주한 이후 진은숙의 공연은 비평가들의 관심을 초월해 대중의 실질적인 티켓 구매로 이어지고 있다. 그녀에 대한 런던의 관심은 2018/2019 시즌 로열 오페라 초연을 예고한 ‘거울 속의 앨리스(Alice Through the Looking Glass)’에서 정점을 찍을 것이다. 래틀이 런던 심포니로 직장을 옮기고 ‘진은숙의 뮤즈’나 다름없는 소프라노 바바라 해니건의 거점 역시 런던이다. 4월에는 사우스 뱅크 센터에서 진은숙의 관현악 신작 ‘마네킹’을 초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