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4일~5월 16일
두산아트센터 Space 111
자본에 따라 움직이는 패권주의에 대한 통찰
올해 두산아트센터는 ‘예외’를 키워드로 삼아 세 편의 연극을 기획했다. 이미 앞서 레바논 출신 연출가 라비 므루에의 ‘구름을 타고’를 통해 전쟁과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다큐멘터리적 수법으로 풀어낸 작품을 선보였다. 이번에는 두 번째 작품인 영국 작가 루시 커크우드의 2013년 신작 ‘차이메리카’를 무대에 올렸다. 1989년 중국의 천안문 사태 당시 줄줄이 늘어선 탱크 앞에 혼자 서서 행진을 제지하는 한 남자의 사진. 이 작품은 이 사진에서부터 제국과, 자본과, 인권과, 사랑을 추적해나간다.
천안문 사태 당시 중국에 출장을 온 사진기자 조는 우연히 탱크 앞의 남자(일명 탱크맨)를 찍게 되고, 20여 년이 흐른 뒤 탱크맨이 살아 있는지 탐문한다. 그 당시 중국에서 사귄 친구 장린의 도움으로 실마리를 얻어 뉴욕의 차이나타운까지 찾아가지만 조가 추적한 사람은 탱크맨을 피해 탱크를 운전한 군인이었고, 그가 총살되었음을 확인한다. 그 과정에서 신문사는 대선을 앞두고 중국과의 관계가 경색될 것을 우려해 중국에서 지워버린 천안문 사태와 탱크맨이 기사화되는 것을 막았다. 중국의 장린은 베이징을 뒤덮은 스모그에 대한 글을 올렸다가 공안에게 잡혀가 고문을 받는다. 편린처럼 산재했던 장린의 과거는 천안문 사태 당시 아내를 잃고, 죽은 아내의 옷가지를 검은 비닐봉지에 담은 채 슬픔에 젖어 있던 탱크맨으로 수렴되면서 작품은 끝이 난다.
미국과 중국이라는, 현재 세계를 쥐락펴락하는 제국들이 자국의 이익과 자본의 논리에 따라 야합하는 과정은 물론, 그러한 권력의 논리 아래 철저히 배제되는 인권과 인간에 대한 문제를 어느 한쪽에 경도되지 않은 채 균형 있게 포괄적으로 담아낸 작가의 통찰이 놀랍다. 또한 오랜만에 만난 거대담론의 무게와 깊이가 반가웠다.
원작의 의미가 선명해진 데에는 연출을 맡은 최용훈의 역할이 컸다. 두산아트센터의 작은 무대를 좌우로 확장해 무대 왼쪽과 오른쪽을 각각 미국과 중국으로 설정했다. 가운데 공간은 중국과 미국의 경계에 선, 혹은 그 어디에서도 보호받지 못하는 인간들이 존재하는 곳으로 활용했다. 건조하게 두 세력을 응시하게 하는 효율적인 공간 구조다. 거기에 1989년과 현재를 오가는 시간의 역동적 흐름을 영상으로 투사해 역사가 곧 현재임을 가시화했다.
배우들의 균형 잡힌 연기도 주목할 만하다. 조 역할을 맡은 서상원의 발랄하면서 지적인 연기는 지극히 미국적인 휴머니즘을 체현했고, 장린 역의 최지훈은 본원적 슬픔과 원죄 의식을 안고 살아가는 캐릭터를 효과적으로 표현해 배우로서 한 단계 성장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멜 역의 최용민과 테사 역의 전현아는 발랄하면서 편안한 연기로 작품의 진지함을 받쳐주었다. 다양한 캐릭터를 연기한 홍성경과 남기애, 성노진 그리고 젊은 배우들의 앙상블은 간결한 무대만큼 군더더기 없이 구현되어 작품의 주제 의식을 도드라지게 했다.
탱크맨의 사진은 지금도 큰 울림을 준다. 탱크로 은유된 거대 권력 앞에 선 한 인간. 다윗과 골리앗이 대면한 듯한 긴장감과 무모함이 교차하는 이 사진은, 배제되고 소외된 인간이 품고 있는 혁명의 에너지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세계 질서를 주조하는 제국의 패권주의에 대한 통찰을 보여주는 ‘차이메리카’는 그러한 인간의 힘을 연극의 언어로, 예술의 언어로 그려낸 작품이다. 영국 작가가 그려낸 미국과 중국. 세계는 이렇게 움직이는데, 제국이 아닌 식민지의 경험이 있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이들을 타산지석 삼기엔 지금 우리는 너무 많이 반목하고 분열된 것은 아닌지, 가슴이 답답해진다.
사진 두산아트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