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m의 관을 통해 자연으로 퍼지는 따뜻한 숨
“요사스런 화장으로 좀 더 눈에 띄려고 기를 쓰는 추한 것들이 널려 있는 한쪽에 비켜서서 우수의 짙은 그림자에 가려 적적하게 노래하고 있는 호른의 아름다움을 무엇에 비기랴.(중략) 누룩 자체가 술은 아니다. 누룩이 발효작용을 유인할 때만 술은 빚어진다. 호른은 종종 음악이라는 ‘오묘한 비약’을 빚을 수 있는 신비의 누룩으로 작용한다”
(‘객석’ 1993년 3월호 음악평론가 이순열).
악기 탐구 시리즈 열다섯 번째 주인공은 바로 호른. 목관·금관악기뿐 아니라 현악군과도 잘 어울리는 부드러운 음색을 지녀 오케스트라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존재다. 다른 한편으로는 태생적으로 컨트롤하기 어려워 잦은 실수를 하는, 물가에 내놓은 아이같이 여겨지는 악기이기도 하다.
호른에 대한 진실과 오해를 확인하기 위해 악기의 기원을 들여다보자. 호른은 뿔피리에서 시작됐다. 인간이 자연 속에 살던 시절, 동물의 뿔에 구멍을 뚫거나 끝을 자른 다음 입술에 대고 불어 신호용으로 사용했다. 너른 들판에 흩날리는 소리에 염원의 메시지를 담아 보낸 악기. 자연은 호른의 본성이다.
초기의 내추럴 호른에서 현재 널리 사용하는 밸브 호른으로 진화하는 동안 호른이 연주할 수 있는 음악의 폭은 크게 넓어졌지만, 3.7m의 관을 통해 소리를 내기란 여전히 쉬운 일이 아니다. 관의 길이가 길고, 소리가 나오는 벨의 위치가 뒤쪽에 있어 호르니스트는 청중에게 소리를 전달하기 위해 다른 연주자에 비해 0.3초간 빨리 연주한다. 수치로 계산하기 어려운 찰나의 시간이다. 또 입술의 힘 조절과 네 개의 밸브만으로 모든 음을 소리 내야 하기에 기본기와 체력은 물론 민첩함과 섬세함도 필요하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이석준 교수는 “천국에 가면 호른 주자들이 많을 거라는 이야기를 평소 농담처럼 한다. 단원들의 기도를 가장 많이 받기 때문”이라며 웃었다. 이석준은 서울대학교 졸업 후 독일 에센의 폴크방 음대에서 수학하고, 부천시향 부수석·KBS교향악단 수석과 팀프 앙상블 단원 등을 거치며 활발한 연주 활동을 해왔다. 교향악단·실내악단부터 솔리스트까지 다양한 편성으로 무대에 서온 이석준에게 은근하지만 치명적인 호른의 매력에 대해 들었다.
호른의 진화① 내추럴 호른
현대에 사용하는 호른의 정확한 이름은 ‘프렌치 호른’이다. 1660~1670년대 프랑스에서 원형의 호른(내추럴 호른)을 처음 개발했기 때문이다. 1700년 이후 오케스트라에서 사용했는데, 이때의 악기는 거의 자연 배음만 연주할 수 있었다. 1715년 변조관(크룩, crook)을 개발해 악기에 부착함으로써 비로소 조옮김과 조바꿈을 할 수 있게 되었다. 18세기 중반에는 벨 안에 오른손을 넣어 음정을 조절하는 게슈토프트 주법을 개발했는데, 안정적인 소리를 내지는 못했지만 음색을 부드럽게 하고 반음계 연주가 가능했기에 일반적인 주법으로 자리 잡았다.
호른의 진화② 밸브 호른
19세기에 이르러 오늘날의 호른인 밸브 호른이 탄생했다. 내추럴 호른에 세 개의 밸브를 부착해 만든 밸브 호른은, 입술로만 음을 조절하던 내추럴 호른에 비해 훨씬 많은 음을 보다 정확하게 연주할 수 있었다. 밸브 호른의 개발은 혁신적 사건이었지만, 50여 년간은 내추럴 호른과 밸브 호른이 공존했다. 당대 음악가들이 밸브 호른은 야성적 기질이 없는 기계적인 악기라 치부했기 때문이다. “사람은 원래 익숙한 것이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잖아요. 부드러운 소리만 내던 호른이 강한 느낌과 화려한 기교를 갖게 되었으니 거부감이 들었을지도 모르죠. 브루크너도 초기에는 내추럴 호른을 고집했지만, 후기 작품에서는 기술적인 부분이나 다이내믹에서 밸브 호른만이 소화할 수 있는 범위까지 요구하고 있어요.”
다양한 종류의 밸브 호른
현대에 가장 널리 사용되는 악기는 F 호른과 B♭ 호른을 하나로 합한 F/B♭ 더블 호른이다. F관과 그보다 4도 높은 B♭관이 구분되어 있으며 키를 누르면 B♭ 섹션이, 키를 놓으면 F 섹션이 된다(반대로 설정할 수도 있다). 작곡가가 악보에 따로 기입하지는 않고, 연주자가 편한 방법을 택해 연주한다. 트리플 호른은 높은 음역을 잘 내기 위해 개발됐는데, 무거운 편이다. 이외에도 높은 음역만을 위해 개량된 데스칸트 호른, 바그너의 작품에서 처음 사용한 바그너 튜바 등 종류가 다양하다.
빈에서만 볼 수 있는 호른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에서만 사용하는 악기가 따로 있다. 크룩과 밸브가 모두 달려 있는, 내추럴 호른과 밸브 호른의 중간 단계인 빈 호른이다. “워낙 전통을 중시하는 관현악단이니 정통 스타일을 고집하는 것 같아요. 세계에서 유일하죠. 빈에서만 제작하고, 빈에서만 볼 수 있어요. 저도 한 번 연주해봤는데, 목가적 느낌이면서도 풍부한 사운드를 내더라고요.”
목관 5중주 vs 금관 5중주
호른은 특유의 부드러운 음색으로 금관 5중주와 목관 5중주 모두 편성된다. 각 악기군의 성격이 다른 만큼 연주에 임하는 태도도 달라진다. “숨을 불어넣는 테크닉이 다르다고 할까요. 목관 5중주는 난이도가 높은 테크닉인 고음을 여리게 연주하는 부분이 자주 나와서 어렵고, 금관 5중주는 다른 금관악기만큼의 사운드를 내야 하니 지치는 경향이 있어요. 어떤 편성으로 연주를 하든 가장 중요한 것은 다른 악기들과 밸런스를 맞추는 것이죠.”
브랜드
좋은 악기는 어떤 악기인가요, 물으니 “자신에게 잘 맞는 악기”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가격 차이가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제작 연도나 브랜드에 따라 천차만별인 현악기에 비해 호른은 대부분 비슷한 수준이라고 한다. “관악기는 대부분 새것을 사죠. 얼마나 오래 사용할 수 있는지 묻는다면, 관리에 따라 달라요. 5년에 한 번씩 악기를 바꾸는 사람이 있는 반면 저는 현재 20년 된 악기를 사용하고 있거든요.” 브랜드로는 독일의 알렉산더·슈미트사, 영국의 팩스먼사, 미국의 S.W.루이스·콘사 등이 유명하다. “연주자들이 사용하는 더블 호른은 1500만 원 정도고요. 취미로 시작하는 분들은 60만 원부터 괜찮은 악기를 고를 수 있을 거예요.”
추천 음반
“가장 좋아하는 호르니스트는 데니스 브레인입니다. 불의의 사고로 요절해 안타깝게도 더 많은 연주 기록을 남기지는 못했지만, 살아 있을 때는 누구보다 뛰어난 음악성을 자랑했죠. 작품마다 음악을 표현하는 방식이 전혀 다를 만큼 완벽하면서도 다채로운 연주를 선보였어요. 이 음반뿐 아니라 R. 슈트라우스 호른 협주곡 1·2번이 담긴 EMI 클래식스의 음반도 추천하고 싶어요. 슈트라우스가 60년의 간극을 두고 작곡한 두 개의 호른 협주곡을 데니스 브레인의 연주로 듣다 보면 호른의 진가를 알 수 있을 겁니다.”
왼손만큼 바쁜 오른손
밸브를 누르는 왼손만큼 오른손도 바쁘다. 밸브 호른이 개발되기 전 널리 사용하던 게슈토프트는 벨 안에 손을 집어넣어 구멍을 완전히 막으면 반음이 내려가고, 반만 막으면 반음이 올라가는 주법이다. 음정을 조절하는 기능뿐 아니라 음색을 부드럽게 하는 역할도 한다. 손을 사용했을 때 음정이 불안해지는 것을 보완하기 위해 게슈토프트 뮤트(약음기)를 사용하기도 한다.
마우스피스
마우스피스는 연주자의 숨으로 음색을 만드는 중요한 부분이다. “연주자마다 자신에게 가장 잘 맞는 마우스피스를 찾기 위해 고심하죠. 가장 왼쪽의 것은 바람이 시원하게 훅 나갔으면 해서 따로 제작한 마우스피스예요. 림(가장자리) 부분은 스톡 커스텀사의, 나머지 부분은 존 P사의 제품입니다. 가운데 것은 알렉산더사, 오른쪽은 슈미트사의 제품이에요. 호른은 다른 금관악기에 비해 마우스피스의 곡선이 매끈해 부드러운 소리가 나는 것 같아요.”
의외의 조합
호른은 현악기와도 의외의 하모니를 자랑한다. 브람스는 교향곡 1번 2악장에서 호른 솔로가 바이올린 선율을 약 두 옥타브 간격으로 중복하도록 작곡해 호른이 바이올린의 가느다란 선을 감싸는 듯 포근함을 표현했다.
R. 슈트라우스는 ‘돈키호테’에서 네 대의 호른이 독주 첼로를 서로 다른 음역에서 중복하도록 작곡해 하나의 선율이 다채로운 성격을 띠도록 했다.
다양한 효과
프랑스어 퀴브레(Cuivr?)는 ‘금속성의 빛깔로’라는 뜻의 악상기호다. “호른이 부드러운 면도 있지만, 금관악기만의 차가운 얼굴을 가질 때도 있거든요. 입술의 긴장도를 높여 표현하는 독특한 효과예요.” 독일어 샬트리히터 아우프(Schalltrichter Auf)는 벨 부분을 공중으로 향한 채 연주하라는 뜻이다. “매우 크고 세게 연주하라는 뜻인데, 음악적 변화뿐 아니라 시각적 효과를 위한 모션이기도 해요. 사실 벨을 위로 올리지 않고도 세게 연주할 수 있거든요.(웃음) ‘우리가 지금 엄청 큰 소리를 내고 있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제스처라고 할 수 있죠.”
생김새만큼 어려운 관리법
긴 길이의 관이 둥글게 말려 있는 호른은 생김새만큼 관리하기도 어렵다. 부식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악기를 한쪽으로 기울인 후 고인 침을 모으고, 슬라이드를 뽑아 수분을 제거한다. 쇠가 접촉하는 부분에는 전용 오일을 바른다. 여기까지는 연주자들이 한 달에 1~2회, 직접 하는 관리법. 본격적인 ‘청소’는 대부분 전문가한테 맡긴다. 나사를 풀고, 플라스틱 망치를 이용해 밸브를 빼낸 후 물·초음파 세척액·구리환원제가 혼합된 전용 용액에 담그는 등 여러 과정을 거쳐 꼼꼼히 관리해야 좋은 상태의 악기를 오래 사용할 수 있다.
사진 박진호(studio Bo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