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페리클레스’
5월 12~31일 예술의전당 CJ 토월극장
캐주얼과 모던함
지난 4월 국립극단과 명동예술극장이 통합해 제작극장 2기 체제를 맞고 있다. 제작극장 체제에서 ‘3월의 눈’ ‘단테의 신곡’ 등 레퍼토리 정착, 큰 무대에 서는 ‘배우 파워’의 확인 외에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전쟁을 방불케 하는 무대 스펙터클의 경쟁이다. 명동예술극장 ‘리어왕’(윤광진 연출, 이태섭 무대)의 폭풍 장면에 쏟아부은 2톤의 물이 화제더니, 예술의전당 ‘페리클레스’(양정웅 연출, 임일진 무대)에서는 50톤의 모래를 무대에 깔았다.
‘페리클레스’는 셰익스피어의 후기 낭만극으로 지중해 연안의 시리아·레바논·터키를 배경으로 영웅의 모험과 고난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아라비아와 페르시아 고대 도시의 이국성과 천상의 목소리로 사람들의 마음을 치유하는 셰에라자드 같은 신비로운 여주인공, 달의 여신의 신전 등 온갖 신기한 이야기가 가득한 작품이다. ‘페리클레스’는 셰익스피어 당대에 가장 인기 있던 작품이지만 거대한 스케일로 인해 그동안 공연이 쉽지 않았다고 한다.
양정웅 연출은 셰익스피어 원작의 대중성을 현대적으로 살리는 전략을 적극적으로 구사한다. 해설자 가우어와 늙은 페리클레스를 유인촌에게 맡기고, 신비로운 노래를 부르는 마리나 역에 뮤지컬 배우 최우리를 캐스팅했다. 이른바 ‘골든 캐스팅’이다. 무대의 스펙터클은 임일진 무대디자이너에 의해 초현실적 무대가 완성되었다. 토월극장 뒷무대까지 완전히 개방해 무대 전체에 모래를 깔고, 거대한 대리석 석상인 ‘다이아나 여신’의 머리가 모래 바닥에 누워 있다. 무대 뒤쪽에는 야자수 몇 그루와 거대한 달이 박혀 있다. 극단 여행자의 배우들은 무대 끝에서 끝까지 마치 100m 달리기를 하듯 전력 질주하는가 하면, 깊은 바닷물 속으로 사라지는 사람들을 연기한다. 의상은 터번과 차도르를 둘러 이국성을 강조하지만, 찢어진 청바지와 집업 후드 티의 현대적 캐주얼 복장이다. 사막의 달밤, 낯선 이방인의 도시, 향과 양탄자, 심플하면서 가슴을 울리는 기타 반주 등 양정웅 연출의 캐주얼하면서 모던한 미적 감각이 쾌감을 준다. 양정웅 연출과 임일진 무대미술, 장영규 음악감독이 ‘페르귄트’ 이후에 만들어낸 또 하나의 캐주얼하고 모던한 고전 대작이다.
‘이 희망 속에서 나는 살아간다.’ 양정웅 연출이 공연을 통해 전하고자 한 단 한마디다. 페리클레스는 아름다운 공주를 얻기 위한 수수께끼에 숨겨진 위험을 피해 방랑을 시작한다. 그는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바다에서 표류하다 아내와 딸을 얻지만, 바다 위에서 모두 잃고 만다. 온갖 모험이 가득한 1부의 이야기에 비해 2부는 모든 것을 잃고 말조차 잃은 페리클레스가 바다를 떠도는 이야기다. 대작의 스케일에 비해 텅 빈 듯 보이는 2부의 시간을 유인촌이 지탱해준다. 혹자는 이 공연의 주인공이 인간이 아닌 시간이라 했듯이, 이 작품은 실제로 인물들의 스토리나 드라마에 충실하기보다는 그야말로 무자비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한 인간이 얼마나 망가지는지, 아내와 딸, 모든 것을 잃은 자가 다시 바다로 나가 무엇을 붙잡으려 하는지 등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그렇기에 늙은 페리클레스 역에 유인촌 전 장관이 캐스팅된 것에 대해 불편해하는 관객이 많다. ‘페리클레스’는 역사가 만든 아이러니의 공연이 되었다.
우리에게도 깊은 바닷물에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어린 딸이 살아 돌아오길 간절히 바라는 늙은 아비들이 있다. 페리클레스처럼 말을 잃었으면서 여전히 그 바다를 떠도는 늙은 아비들이 있다. 눈먼 아비 심봉사와 심청이의 상봉처럼, 늙은 아비 페리클레스와 바다에서 살아 돌아온 딸 마리나의 상봉처럼, 이들의 상봉은 우리가 얼마나 간절히 바라는 일인가. 심청이의 인당수, 페리클레스의 지중해, 세월호의 팽목항. 이 폭풍 속에서 우리는 끝까지 어떤 희망을 가져야 할까. 깊은 바닷속에 잠긴 문 안에서 우린 어떤 희망을 만들어야 할까. “이 희망 속에서 우리는 살아간다.”
사진 예술의전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