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 치는, 글 쓰는 손열음의 손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5년 7월 1일 12:00 오전

피아노 치는, 글 쓰는 손열음의 손
‘하노버에서 온 음악 편지’ 출간에 이어 하프시코드 주자로 데뷔! 건강한 도전을 이어가는 그녀의 열 손가락

‘글 쓰는 손열음’이 ‘피아노 치는 손열음’만큼이나 자연스러워진 것은 꽤 오랜 일이다. 2007년부터 종종 자신의 연주회 프로그램 북을 직접 썼고, 2010년부터 5년간 ‘중앙선데이’지에 칼럼을 기고하고 있다. 그렇기에 그녀가 그동안의 칼럼을 엮어 ‘하노버에서 온 음악 편지’(중앙북스)를 발간한다고 했을 때 새삼스레 놀랍지는 않았다.
손열음과 글쓰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생각이 든 건 지난 5월 27일, 일신홀에서 열린 출간 기념 음악회를 통해서다. 그녀는 이곳에서 자신의 독자들과 첫 대면을 했다. 자신이 글의 소재로 삼은 여러 작품을 연주하며 중간중간 자신의 경험과 철학을 이야기했다. 피아노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 마이크를 들고 독자들의 질문에 답하는 그녀의 표정에 연주할 때와는 또 다른 행복감이 묻어났다. 출간 기념 음악회를 마치고 그녀는 자신의 SNS에 ‘무대에서 깨고 싶지 않은 꿈을 꾸는 듯했던 건 차이콥스키 콩쿠르 본선에서 차이콥스키 협주곡 1번 1악장을 연주할 때 이후 처음’이라고 적었다.
그녀의 밝은 얼굴을 보며 그녀가 ‘음악 칼럼니스트’라는 제2의 직업 활동을 적극적으로 시작하는 건 아닐까 궁금했다. 수년 전 ‘객석’과의 인터뷰에서도 그녀는 ‘전문 작가가 될 생각은 없지만 슈만처럼 평론은 하고 싶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무엇보다 바쁜 연주 일정 속에 어렵게 써 내려온 소중한 이야기를 한 권의 책으로 받아든 그녀에게 축하 인사를 건네고 싶었다. 독일로 돌아갈 채비를 하고 있는 그녀의 강원도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글을 새로 쓴 건 아니어서 출판 과정이 수월했을 거라 예상했는데, 의외로 고생을 많이 했다고 들었어요.
네, 글을 무척 많이 고쳤어요. 시제 맞추고 검토만 하면 될 줄 알았는데 한번 손대니 도무지 끝이 안 나더라고요.(웃음) 2010~2011년에 쓴 글들은 조금 딱딱한 편이에요. 실제로 그때는 형식적으로 갖춰진 글을 쓰려고 노력하던 시기였어요. 지면에 실릴 글 자체에 압박을 느꼈던 것 같아요. 독자들을 떠올리며 솔직하게 저를 드러내게 된 건 근래에 들어서죠. 글을 오래 쓰니 ‘네 음악 잘 듣고 있어’만큼 ‘네 글 잘 보고 있어’라는 말을 주변에서 듣게 됐고, 저희 엄마도 ‘진짜 네 이야기를 해야 독자들이 친근하게 느낄 것’이라고 조언하셨어요. 소통이라는 목적을 가지니 계속 손보게 되더군요. 책을 받아들었을 때는 그동안 애쓴 것을 보상받는 것 같아 감회가 깊었어요. 올해 한국 나이로 서른인데, 저의 20대가 오롯이 담긴 것 같아 감동스럽기도 해요.

언어는 음악보다 직접적이고, 직설적이고, 어떤 면에서는 자신을 더 많이 드러내야 하죠. 글을 고정적으로 쓰기로 결심했을 때, 필력에 대한 긴장보다는 (물론 무척 뛰어나지만) 개인적인 이야기를 세상에 내보이는 것에 대한 긴장이 더 컸을 것 같아요.
맞아요. 저는 제 자신을 드러내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거든요. 최근에 제 이야기를 더 하려니 부담이 커졌어요.

특히 ‘대한민국 음악 교육의 현실’ ‘콩쿠르에 목숨 거는 사회’ 등 주장이 강하게 담긴 글을 쓸 때는 좀 더 조심스러워질 것 같은데요.
아뇨. 그런 글들은 일종의 ‘기회’로 삼아요. 생각이 확고하니 고민될 것이 없죠. 누군가 해줬으면 하는데 아무도 안 하니 나라도 해야겠다는 심정으로 써요. 오히려 사적인 이야기가 힘들어요. 비행기가 연착됐다거나 연습 때 해프닝이 생겼다거나 하는 사소한 일들요. 친구에게도 안 하는 개인적인 이야기를 글로 쓰는 제 자신을 보면 신기하기도 해요.

어머니가 음악 외에 글에 대해서도 조언을 많이 해주시나 봐요.
엄마가 문학 선생님이시거든요. 그래서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는 송고하기 전 매번 엄마한테 먼저 보여줬어요. 제가 결론을 못 내리고 헤매고 있으면 ‘이렇게 해보면 어때?’ 하면서 아이디어를 많이 주셨죠. 최근에는 주로 여동생에게 보여줘요. 음악을 전혀 모르는 애라서 ‘혹시 이해 안 가는 부분이 있어?’ 하면서 검토를 부탁하죠. 클래식 음악을 잘 모르시는 분들도 쉽고 재미있게 읽으셨으면 하거든요.

지난 5월 27·28일에 치른 출간 기념 음악회는 슈베르트의 가곡 ‘봄에’를 직접 편곡한 버전으로 연주하고, 에른스트 슐체의 시를 직접 의역해 낭송하는 등 색다른 형식으로 진행했죠. 특히 마지막 곡으로 연주했던 라흐마니노프의 ‘교향적 춤곡’이 무척 인상 깊었어요. 한 대의 피아노로 연주하니 슬픈 감정이 더 응축돼 여운이 오래 남더군요.
보통 연주회를 하면 전체적 균형과 흐름을 고심해 프로그램을 구성하지만, 이번에는 순서에 상관없이 제가 좋아하는 곡을 골라 쳤어요. 슈만의 어린이를 위한 음반 Op.68 중 21·26·30번, 알캉의 ‘이솝의 향연’, 모차르트의 론도 K.511 등 모두 제가 소중히 여기는 곡이고, 책에 담긴 작품이니 읽는 분들에게 선물이 되길 바라며 연주회를 마련했어요. 그런데 오히려 제가 선물을 받는 느낌이었죠. 제 글을 오랫동안 지켜보며 좋아해주신 분들을 직접 만나니 놀랍기도 하고, 무척 행복했어요.

라흐마니노프 최후의 작품이 바로 ‘교향적 춤곡’이다. (중략) 이 곡의 시작은 내가 보기엔, 그때 그가 탄 그 썰매의 종소리다. 이윽고 썰매가 출발하고, 험난한 여정의 시작이다. 그런데 쉬지 않고 내달리며 공격적인 음표들이 한층 더 사나워질 때쯤, 갑자기 음악이 조용해진다. 곡이 시작된 지 3분도 채 안 됐는데. 각종 목관악기가 돌아가며 연주하는 반주 음형이 막처럼 드리워지면, 주인공 발레리나 같은 멜로디가 홀연히 등장한다. 이 애달픈 멜로디를 연주하는 악기는 바로, 색소폰. 다름 아닌 미국의 상징. 아! 음악이 순식간에 25년을 지나 현재 시점으로 돌아온 거다. 가장 러시아스러운 멜로디를 부르는 이 미국 악기는 조국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바뀌어버린 그 자신이었다.
– 하나뿐인 고향에 보내는 마지막 인사

예전에 쇼팽·브람스·리스트 같은 작곡가들을 글로써 살린 슈만처럼 언젠가 평론을 하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죠.
네, 정말로 하고 싶어요! 그런데 제가 조금 놀란 것이, 제가 연주평을 하면 사람들은 제 연주와 비교해서 생각하시더라고요. 예를 들어 ‘A라는 피아니스트의 어떤 해석은 별로인 것 같다’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은 ‘본인이 그렇게 연주하지 않으니 별로라고 하는 것 아니야?’ 하고 반응하는 거죠.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평론은 제가 하는 말이 객관적 근거를 가질 수 있을 만한 위치에 갔을 때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어쩌면 자연스러운 거 아닐까요? 열음 씨는 음악가고, 당연히 작품마다 본인만의 철학이 있을 테니까요.
그럴지도 모르죠. 그런데 제가 하고 싶은 평론은 좀 새로운 방식의 평론이거든요.

어떤 방식인데요?
음… 그러니까 저는 세부적인 것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비평, 주관적인 생각을 마치 그것이 정답인 것처럼 독자에게 주입하는 비평이 싫어요. 저는 그야말로 음악회에 가지 못한 사람들에게 간접적으로 전달해주는 역할을 하고 싶어요. 그날의 분위기가 어땠는지, 연주자의 내면은 어떤 방향을 향해 있었는지 알려주고 싶어요. 물론 이것도 주관적이겠지만, ‘이 부분은 이렇게 쳐서 좋지 않았다’는 식의 접근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요.

예술을 평가한다는 것 자체에 회의가 있는 건 아니죠?
그럼요. 예술가가 지닌 철학과 그 사람들이 내놓은 결과물에 대해서는 충분히 이야기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연주도 그렇기 때문에 하는 거고요.

가치 있는 글이란 어떤 글이라고 생각해요?
잘 모르겠어요. 너무 어려운 질문이네요. 다만 저는 어떤 음악에 대해 글을 썼을 때 그 글을 읽은 누군가가 그 음악에 관심을 갖고, 찾아 듣고, 좋아하게 되는, 그런 글을 쓰고 싶어요.

어차피 내가 작가도 아니고 내 필력은 지극히 제한적인 수준에 알아서 머물러주거늘 허황된 욕심을 부릴 이유도 없지 않은가. (중략) 내 글이 공공의 이익에 이바지할 만한 유익한 지식을 전달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누가 보고 감동의 눈물을 흘릴 만한 글도 아닌데. 한참을 스스로와 씨름하다 결국 내놓는 핑계의 키워드가 있다. 진부하게도, ‘소통’이다. 혹시 내 글을 읽고 조금이라도 공감하는 사람이 생기지 않을까? 나만의 생각을 여럿과 나눌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더 나은 소통의 통로가 되지는 않을까?
– 나의 글쓰기

한 편의 칼럼을 쓰는 데 보통 몇 시간쯤 걸리나요?
6~7시간쯤. 컴퓨터를 켜고 4~5시간쯤은 딴짓을 하고요.(웃음) 실은 제가 무슨 일을 해도 항상 비생산적으로 하는 경향이 있어요. 정확하게 끊고, 이런 것들을 잘 못해요.

비행기가 연착돼 공항에서 휴대폰으로 쓴 적도 있다면서요?
안정적인 환경에서 쓴 적이 거의 없어요. 외국에 나가면 밖에서 인터넷이 잘 안 되니까. 리허설 시간에 쫓기고, 연주 시간에 쫓기고… ‘그만둬야지’라고 생각한 게 벌써 5년째네요.

그럼에도 그만두지 않은 이유는 뭐예요?
소통할 수 있는 창구를 잃는 것이 아쉬워요. 고통스러워하면서 쓰는데, 다 쓰고 나면 뿌듯하고 애틋하죠.

음악 외에 다른 주제로 글을 쓴다면?
기자님처럼 인터뷰하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아요. (조)진주가 얼마 전부터 ‘객석’에 연재하고 있는 인터뷰 시리즈 ‘The Art of Practice’도 잘 보고 있어요. 진주한테 ‘오, 나도 그런 것에 관심 많았는데 재미있겠다! 열심히 해라’ 하고 격려했어요. 주변 인물에 대한 자서전도 쓰고 싶어요. 제 자서전을 쓸 생각은 전혀 없지만, 제가 잘 아는 인물에 대해서는 잘 쓸 수 있을 것 같아요.

인간사의 가장 큰 화두 두 가지를 꼽으라 한다면 단연코 사랑과 죽음이 아닐까. 언뜻 보면 전자가 인생의 명(明), 후자가 암(暗)을 의미하는 것 같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자. 죽음이 삶의 끝에 비로소 이루어지는 그 어떤 ‘완성’이라면, 사랑은 끝끝내 그조차 허락되지 않는 번뇌의 연속이다. 하물며 그것이 스스로를 파괴하고 타인에게 고통을 안길 때에야. 단, 그 어떤 나쁜 사랑일지라도 예술만은 그것을 껴안는다. 심지어 열매도 맺는다. 불공평하다고 불평할 사람들을 향해 모차르트는 말했다. “예술가의 영혼을 채우는 것은 그 첫째도 사랑, 둘째도 사랑, 셋째도 사랑!”
-예술가의 영혼을 채우는 것은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사랑

손열음은 7월 23일부터 열릴 대관령국제음악제에 맞춰 한국에 돌아온다고 했다. 대관령에서 그녀는 관객을 깜짝 놀라게 할 준비를 하고 있으니, 바로 하프시코드 주자로의 데뷔다. 평소 꿈꾸던 바흐 ‘골드베르크 변주곡’에 도전한다는 그녀는 “악기가 없어서 어쩌나 고민했는데 허승연 선생님이 빌려주신다고 해서 선생님 댁으로 계속 출근할 것 같다”며 호탕하게 웃었다. 건강한 힘으로 행복한 도전을 이어가는 그녀가 부럽다.

사진 이은비(studio Bob)·중앙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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