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램 머피 안무, 유니버설 발레단 ‘지젤’
6월 13~17일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한국적 색채를 덧입힌 지젤의 등장
유니버설발레단 초청으로 그램 머피가 안무한 ‘지젤’은 그간 이 발레단이 쌓아온 신뢰의 크기를 가늠하게 했다. 전염병 메르스에도 불구하고 세계 초연을 함께하려는 열성 팬들이 객석을 가득 메웠고, 아낌없는 갈채를 보내주었다. 그램 머피와 조안무가 재닛 버넌, 작곡가 크리스토퍼 고든, 무대 배경을 조성한 제라드 매니언, 의상디자이너 제니퍼 어윈, 조명디자이너 데이미언 쿠퍼 같은 외국인 제작자들이 함께 무대에 등장한 커튼콜은 세계 초연의 영광을 기념하는 역사적 순간으로 각인됐다.
고전을 깨부숴 유명해진 안무가로는 마츠 에크·마크 모리스·매슈 본·마기 마랭·앙줄랭 프렐조카주 등을 꼽을 수 있는데, 그램 머피도 몇 작품을 통해 그 대열에 합류했다. 보통은 시대나 주인공이 처한 상황에 변화를 주어 개작하나, 이번 ‘지젤’의 생경한 특징은 음악을 새로 작곡했다는 것에 있다. 원작 음악을 거의 고수하면서 줄거리에 변화를 주는 일종의 규약을 무시한 신작이라 완성도나 창의성을 논하기에 앞서 우선 당혹스럽다.
그램 머피의 ‘지젤’은 안무가가 유니버설발레단의 한국 스타일 창작 관행을 지나치게 의식했다는 느낌을 준다. 음악 작곡에 한국 타악기와 농악 장단을 사용했으며, 그에 반응하는 자연스러운 굴신이 한국 춤을 연상시켰다. 심지어 강강술래 장면까지 등장했다. ‘자연친화적 지젤 집단’의 의상은 한국무용 농부 의상과 유사해 국립무용단 작품을 연상시켰다.
안무자가 고안한 줄거리에 현대성이 결여된 점도 음악의 부재를 좀 더 악화시켰다. 지젤의 부모인 울탄과 베르트, 그리고 밤의 악령 미르트가 삼각관계였고, 패배자 미르트가 연적의 딸 지젤에게 복수하기 위해 알브레히트를 죽이려 하나 신성한 무구 크리스털 덕에 악령을 물리친다는 내용이다. 또 지젤이 죽는 상황의 개연성도 약하다. 알브레히트가 ‘바틸드와의 원치 않는 약혼에 지친’ 상태라면, 지젤이 바틸드와의 우정에 금이 간 것만으로 배신과 실연에 충격받아 죽는다는 전개에 순순히 공감하기 어렵다.
이런 갈등적 요소에도 불구하고 그램 머피의 ‘지젤’이 지닌 고유한 매력이 없지는 않다. 우선 무대장치가 상황 설명에 효과적이다. 동굴과 절벽, 고목 등을 거대한 규모로 제작해 그곳에서 주인공들의 액션이 이뤄진다. 1막 마지막에 지젤이 미르트의 수중으로 넘어갈 때, 스스로 산을 향해 달려가는 지젤의 색다른 모습이 흥미롭다. 2막에서는 흰머리를 길게 풀어헤친 밤의 악령들이 시선을 끈다. 다양한 2인무 동작과 비틀기 포즈, 뛰면서 다리를 부딪치는 카브리올과 구르기를 섞은 기교, 마지막에 지젤이 하늘로 올라가는 플라잉 기법까지, 각 장면의 내용을 형상화하는 안무자의 재능은 탁월하다. 황혜민과 콘스탄틴 노보셀로프가 두 주역을, 예 페이페이가 미르트 역을, 검은 의상이 화려한 바틸드 역을 한상이가 맡아 열연했다. 장대나 횃불을 든 남자 군무는 원작과 사뭇 다른 분위기를 연출했다.
그램 머피의 ‘지젤’은 클래식 발레에서 음악이 차지하는 비중을 되새기게 했다. 음악성 향상을 추구했던 한 극장장 덕에 차이콥스키의 3대 발레가 현존하며 오늘날 주요 개작 대상이 됐다. 마리우스 프티파는 한 공연에서 관객이 모두 음악만 칭찬하자 “오케스트라를 무대에 올리고 발레가 오케스트라 피트로 가야겠다”는 자조적 발언을 하기도 했다. 그에 더해, 무용은 기록법이 약하고 음악은 명확하니 고전 명작의 생명줄은 음악이 주도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니버설발레단이 원래는 ‘지젤’을 계획했으나 결과적으로 ‘그램 머피의 지젤’이 탄생했다는 점은 상당히 아쉽다. 원작 음악을 삭제하고 줄거리까지 변화시킨 결과 새로운 ‘지젤’이 아닌 동명이인의 사랑 설화와 마주하게 됐다.
사진 유니버설발레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