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햇빛샤워’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5년 8월 1일 12:00 오전

’7월 9~26일
남산예술센터 드라마센터

한 줌의 햇빛조차 허락되지 않은 이들에게 보내는 연가(戀歌)포스터의 문구가 매우 도발적이다. ‘광자는 썅년입니다.’ 입에 올리기도 민망한 욕설이 작품 제목 옆에 선명하게 적혀 있다. 관객은 이 문구로 추리를 시작한다. 광자는 도대체 무슨 짓을 했기에, 어떻게 살기에 왜 ‘썅년’이 되었나? 남산예술센터와 극단 이와삼이 공동 제작한 ‘햇빛샤워’는 담담히 광자가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관객의 질문에 답을 해나갔다.

백화점 직원인 광자는 매니저를 꿈꾸는 젊고 발랄한 여성이다. 그녀가 남들과 조금 다른 점은 고아라는 것, 남자와 쉽게 잔다는 것, 반지하에 산다는 것, 그리고 이름을 바꾸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빛을 품은 사람의 ‘광자’가 아닌 아름다운 꽃봉오리인 ‘아영’이 되고 싶은 광자의 욕망은 곧 반지하에서 나와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싶은 욕망이다. 그러기 위해 더 많은 실적을 쌓고자 물품 택배기사와 자고, 빠른 승진을 위해 과장과도 잔다. 전과자라서 이름을 바꾸는 데 돈이 더 많이 들자 그 담당 공무원과도 잔다. 이런 광자에게 신경 쓰이는 사람이 있는데, 주인집의 양자 동교다. 어려운 사람들에게 자신의 월급으로 연탄을 기부하는 동교는 그 순수함으로 광자와 만나고, 맡아보지 못한 엄마의 냄새를 그녀에게서 찾는다. 구청의 기부사업이 기획되면서 양부모와 갈등을 겪던 동교가 결국 죽음을 선택하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매니저가 된 광자는 동교의 죽음에 충격을 받는다. 마침내 광자는 집주인 여자를 칼로 찌르고 남자와 실랑이를 벌이다 죽고 만다.

2014년 희곡 발표의 기회가 있었던 덕분에 광자의 죽음에 대한 주변인들의 증언이 첨가되는 등 작품은 한층 매끄러워졌다. 너무 많은 이야기로 밀어붙이던 작가 장우재의 전작들과 비교해도 광자와 동교에 서사가 집중되면서 작품의 밀도가 훨씬 촘촘해진 양상이다. 거기에 장우재 작가의 전매특허인 사회 현실에 대한 적극적 반영이 고스란히 담겨 있으니, 불필요한 것은 제거하고 중요한 것은 강조하는 선택과 집중이 효과적으로 이루어진 셈이다. 물론 동교가 자살한 것과 거기에 반응한 광자의 폭주는 개연성이 약하다. 동교의 선택지가 극단적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충분히 설명되지 않았고, 광자가 죽음으로 치닫는 것이 이해될 만큼 두 사람의 관계와 시간이 축적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느닷없고 돌발적이며 급하게 몰아친 결말이지만, 광자의 죽음을 둘러싼 증언들이 작품 곳곳에 배치된 구성은 이 급박함을 다소 완화시켰다.

‘햇빛샤워’는 작가 장우재보다 연출가 장우재가 더욱 돋보인다. 광자의 반지하 방을 무대 중앙에 배치하고 높이를 낮춤으로써 최근 빈번하게 발생한 싱크홀을 만들어냈다. 부지불식간에 발생하는 공포의 공간 싱크홀 그 자체가 광자로 은유된다. 모두가 주변을 돌며 경계하고 불안해하는 싱크홀처럼 광자도 그렇게 경계의 대상이 되고 꺼려지는 존재다. 그러나 싱크홀을 들여다보면 그 원인이 바로 보이듯, 광자의 삶을 조금만 들여다보면 광자를 싱크홀로 만든 사회 구조와 현실 논리가 보여 광자는 연민의 대상이 된다. 여기에는 전작인 ‘환도열차’에서 인상 깊은 연기를 보여준 김정민의 연기가 한몫했다. 그녀의 편하고 자연스러운 화술과 연기는 세상 풍파를 다 겪은 허무함과 성공을 향한 야비한 욕망이 공존하는 광자를 현실의 존재로 만들어냈다. 조연 배우들의 안정된 연기와 조화를 이루면서도 여주인공으로서 작품을 이끌고 나가는 연기의 내공을 아낌없이 보여주었다.

광자라는 캐릭터는 사실 새롭지 않다. 1920년대 ‘이영녀’의 이영녀부터 1970년대 ‘영자의 전성시대’ 영자와 ‘별들의 고향’ 경아에 이르기까지 바닥으로 내몰린 여성들은 이미 우리들에게 충분히 낯익다. 이런 익숙한 캐릭터를 다시 불러온 이유가 무엇일까? 시대가 달라져도 밑바닥 인생은 똑같다는 뻔한 이유는 아닐 것이다. 이영녀·영자·경아가 그러했듯, 광자는 21세기 대한민국을 비추기 위한 거울이다. 구별 짓고 편 가르는 데 익숙한 우리가 경계하고 불안해하는 실체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 결과가 얼마나 참담한 것인지를 광자를 통해 보여주는 것이다. 광자가 햇빛을 풍성하게 쪼이지 못한 것은 결국 사회 구조의 문제이고, 연극 ‘햇빛샤워’는 그 구조 속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비추는 한 줌의 햇살이었다.

사진 남산예술센터 드라마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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