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0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이심전심, 완벽한 모차르트
꽤 오래전인데도 잊을 수 없는 음악회가 있다. 러시아의 유서 깊은 오케스트라와 한국 연주자의 라흐마니노프 협연 무대였는데, 자신들의 위치와 색깔을 오롯이 지키며 ‘맞부딪히는’ 스파크가 매우 흥미로웠다. 감상 내내 ‘이 오케스트라는 결코 움직이지 않겠구나’라는 생각이 맴돌았다. 피아니스트가 고군분투하며 자신의 프레이징과 다이내믹을 관철시키려 해도 절대 무너지지 않는 난공불락의 무언가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마지막 클라이맥스에 가서야 오케스트라는 연주자에게 비로소 마음을 열고 음악을 포용했다.
작곡가가 작품을 만든 같은 음악적 환경 속에서 동일한 언어를 사용하며 교육받은 이들이 만들어내는 ‘고유의’ 오케스트라 사운드는 단순히 인력의 화합 측면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거대한 힘이 존재한다. 이런 ‘거대한’ 움직임은 아무리 능수능란한 지휘자라도 자신의 의지만으로 제어할 수 없을 것이다.
빈 필의 음악적 고향이 모차르트라는 데 이의를 달 사람은 별로 없는 바, 모처럼의 ‘올-모차르트’ 프로그램은 그들만이 지닌, 그리고 그들조차 결코 바꿀 수 없는 절대적 권위의 해석과 음향을 남겼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모차르트 오케스트레이션에 ‘절대적’이라는 형용사가 오히려 무색할 정도였다. 한 가지 단점이라면 너무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연주 때문에 음향이 바로 그 자리에서 만들어진다는 것을 깜빡 잊게 되는 것뿐이었다.
아무리 대가라도 이런 거대함에 정면으로 맞설 수는 없는 일. 지휘에 앞서 협연자로 나선 크리스토프 에셴바흐의 접근은 그런 점에서 현명했다. 전체 음향의 표면을 장식할 피아노 음색에 한껏 윤기를 더함과 동시에 여운이 짙은 뉘앙스를 프레이징 마지막에 배치해 센티멘털한 분위기를 배가시켰다. 선율의 다채로운 표정이 두드러지는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23번을 해석하기에 적절한 선택이었다. 과거 특유의 고집스런 인토네이션과 어눌한 테크닉이 오히려 개성적인 뒷맛을 남겼던 그의 모차르트는 지휘자로서의 시간과 경험이 쌓여 ‘예쁜 연륜’으로 깎이고 변화됐다.
빈 필이라는 진수성찬에 에셴바흐가 수저를 조심스레 움직이며 식사만 하지는 않았다. 후반부의 두 곡은 모차르트 스페셜리스트로서 지휘자와 오케스트라 간의 이심전심을 확인하는 결과물이었다. 백전노장 악장 라이너 퀴흘이 이끄는 모차르트 전문가들은 지휘자의 의견에 신중하면서도 믿음직스럽게 반응했다. 모차르트의 교향곡 40번은 G단조라는 ‘결정적 슬픔’을 머금은 동시에 우아함이 어두운 정서를 살짝 덮고 있다. 어둠과 밝음, 눈물과 미소 사이의 복합적 감정을 이토록 잘 끌어낼 수 있을까. 에셴바흐는 그들이 지닌 모차르트 공감대 속 ‘스위트 스폿(Sweet Spot)’을 정확히 찾았고, 그 결과는 완벽에 가까웠다. 넓은 음폭으로 만들어낸 적절한 공간감과 목관을 배려한 앙상블의 균형, 과도하지 않은 생동감이 감탄을 불러일으켰다.
교향곡 41번 ‘주피터’에서 에셴바흐의 억양이 더욱 두드러졌다. 더 이상의 미세함을 바라기 어려운 교묘한 아고기크가 작품 전체를 지배했고, 일치된 하모니는 청중에게 독특한 여운을 남겼다. 장대함을 강조한 1악장, 자연스런 스윙감으로 빈 전통의 자부심을 은유한 3악장과 치밀한 음의 조합과 비르투오소적 표현을 한껏 발휘한 다성부 4악장까지 우리가 상상하던 모차르트의 모습을 정확히 그려냈다. 지금까지도 ‘늘 옳았던’ 빈 필의 모차르트가 앞으로도 오랜 기간 이상적인 해석의 기준으로 자리 잡을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사진 크레디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