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9~11일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
합리화와 무신경의 기로에서
20세기 프랑스의 최고 소설로 회자되는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는 연극·영화·발레·오페라 등 다양한 매체로 각색된 바 있다. 그 대열에 한국의 국립현대무용단이 가담한다는 소식은 기대감과 우려를 반반씩 갖게 했다. 새떼를 타고 여러 행성을 여행하는 것까지야 문제가 없지만 신하가 한 명도 없는 왕 이야기로 시작되는 교훈, 집에 두고 온 장미에 대한 사랑, 여우의 성찰, 사라진 왕자를 찾는 조종사의 인정, 게다가 “사람들은 마음으로만 명확히 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등의 명언을 어떻게 다룰지 궁금했다.
‘가족 공연’을 표방하며 초연한 ‘어린 왕자’는 보기에 딱했다. 동화도 아니고 해석적 작품도 아닌 어정쩡한 외양, 내용을 담지 못한 춤, 수없이 막을 올리고 내렸으나 맥이 없던 영상, 특히 소설에 담긴 따뜻한 교감과 삶의 지혜를 방기했다는 점이 고루 아쉽다.
막이 오르면 비행기가 추락하는 영상이 보인다. 추락한 남자가 일어나는 긴 솔로 안무 후, 영상에 초록 상의를 입은 남자가 나타난다. 어린 왕자는 금발도 아니고, 긴 코트나 스카프를 걸치지도 않았고, 사랑스런 미소를 짓지도 않았다. 어린이용은 아니라는 메시지 같다. 반대로 소설의 동화적 이미지를 배경 화면에 쏟아내니 균형감이 없다. 영상에 빨간 장미가 뜨면 빨간 의상의 군무가 펼쳐지는데, 세상에 못 다룰 작품이 없을 만한 편리한 연출법이다. 그렇다고 춤이 독창적이지도 않았다. 모리스 라벨의 ‘볼레로’처럼 증폭되는 음악에 맞춘 몸짓은 다른 여러 무용단에서 볼 수 있는 평범한 춤집을 넘지 못했다.
장미들이 퇴장하면 흰 새떼 영상과 소설 고유의 모자·물고기·차·오토바이·구름·나무·여우 등의 그림이 스쳐 지나간다. 번쩍이는 우주 한쪽에 자리한 왕자의 모습도 보인다. 세 쌍의 군무가 곡예 포즈를 취하고, 투명하고 커다란 공들이 춤에 활용된다. 네 사람이 모이고 떨어지는 포즈들, 숫자 영상, 왕자와 조종사의 만남, 현대의 회색 도시, 거리에서 뛰는 사람들, 집 안에 머무는 사람들의 영상, 조종사와 만난 양복 정장의 현대인들, 승천하는 왕자와 그곳을 향하는 조종사의 모습으로 끝난다.
왕자 앞에서의 춤들이 행성 여행을 다룬 장면일 수 있지만 알아서 짝지어 보기조차 어려운 축약은 문제다. 특히 원작에 대한 의무를 버리고 현대인을 투입시킨 도피적 전개는 어처구니없는 비약이다. 모든 동화 주인공이 현대에 있을 수 있으니 이 역시 편리한 합리화다. 이도저도 아닌 눈치 보기, 뜻깊은 명작을 뭉개는 오만한 무신경을 목도했다.
이번 ‘어린 왕자’는 영화감독 김지운이 구성·대본·영상을 담당했고, 드라마투르그 김재리가 소설의 명언을 나름대로 해석했다. 예술감독 안애순이 안무를, 정재일이 음악을 담당했다. 이들 제작진의 역할로 보면 안애순 예술감독이 지닌 안무 개념은 타 예술가의 보조인 것처럼 보인다. 연극 안무는 연출자의 지도 아래, 연출자가 허락한 공간과 시간을 춤으로 채우는 역할이다. 안무가가 작품 해석이나 구성에 관여할 필요가 없고, 할 수도 없으며, 해서도 안 된다. 그러나 무용에서는 안무가가 반드시 그 역할을 해야 한다. 장르 혼합을 하되 모리스 베자르의 ‘토털 시어터’ 방식을 벗어나면 곤란하다. 융·복합을 한다면 각각의 예술가가 제작비를 분담하고 커튼콜을 함께 해야 옳다. 안무가가 구성이나 각색 같은 ‘결정할 책임’으로부터 발뺌한다면 무용단이 따로 존재할 이유가 없다.
사진 국립현대무용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