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위그모어홀 데뷔 소프라노 황수미

기품으로 그리는 새로운 지도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5년 12월 1일 12:00 오전

2014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우승자 황수미의 행보가 차세대 이끌 실력파 리릭 소프라노 탄생의 기대를 부풀게 한다

2014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우승자 황수미의 행보가 차세대 이끌 실력파 리릭 소프라노 탄생의 기대를 부풀게 한다

지난 10월 28일, 2014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우승자 소프라노 황수미가 리트 반주자 헬무트 도이치와 함께 위그모어홀에서 리사이틀을 가졌다. 성악 전문 기획사 로젠블랫 시리즈로 황수미의 영국 데뷔가 이뤄졌다. 변호사 겸 프로모터인 이언 로젠블랫은 2001년 후안 디에고 플로레스를 소개했고 한국계 소프라노 니콜 카벨, 테너 김우경도 같은 시리즈로 선보였다. 위그모어홀(550석)의 유료 좌석은 90퍼센트 가까이 찼다.

2012년, 벨기에 공영방송 RTBF는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를 휩쓰는 한국 참가자들의 성공 요인을 한국의 교육열과 교육 시스템으로 분석했지만 황수미를 기른 건 한국 교육만이 아니다. 그녀는 서울대에서 윤현주를 사사했고, 2010년 건너간 뮌헨 음대에선 오페라와 리트, 오라토리오 최고 연주자 과정을 거쳤다.

황수미가 거둔 우승 후 최대 소득은 심사위원으로 참가한 헬무트 도이치와의 만남이었다. 유럽에선 리트 반주자와 성악가가 짝으로 이동하면서 공연을 만드는 관계로 도이치의 마음을 산 것은 콘서트 연주자로 향후 전망을 밝히는 일이다. 도이치는 현재 요나스 카우프만의 리트를 전속 반주하고 있으며, 율리아네 반제·디아나 담라우·안젤리카 키르히슐라거 등의 여성 성악가와 함께한다.

황수미는 지난 4월 도이치 헬무트와 함께 대구와 서울에서 리사이틀을 열었고, 예술의전당 교향악축제와 대관령국제음악제에 참가했다. 부산시향과 함께 푸치니 ‘라 보엠’ 중 ‘내 이름은 미미’, 구노 ‘로미오와 줄리엣’ 중 ‘아, 꿈속에 살고 싶어라’, 슈트라우스 ‘세실리아’를 선보였고, 대관령에선 포레 ‘레퀴엠’을 소화했다. 일각에선 홍혜경의 젊은 시절을 연상케 한다는 리뷰도 있었다.

2014년 하반기에 입단한 독일 본 오페라의 배역을 보면 모차르트 ‘마술피리’의 파미나, ‘코지 판 투테’의 피오르딜리지, 푸치니 ‘투란도트’의 류, 베토벤 ‘피델리오’의 마르첼리네가 주요 역할이다. 국내 콘서트에서 잠시 선보였던 레퍼토리를 포함한다면 홍혜경이 지난 30년간 메트오페라에서 부른 미미·줄리엣·류·마르첼리네가 황수미의 지금 역할과 겹친다. 1986년생 황수미의 목소리가 앞으로 서른을 지나 완숙기에 접었을 때, 어떤 형태의 리릭을 유지할지에 따라 마흔 이후 운신의 방향도 정해질 것이다.

황수미의 여러 공연에서 돋보인 건 주역의 기품이었다. 전막은 아녔지만 음질이나 음역대를 떠나 홍혜경의 품위를 떠올리게 하는 실력파 리릭 소프라노가 드디어 한국에도 탄생했다는 기대를 부풀게 하는 퍼포먼스였다. 매력적인 외모와 이지적인 보이스 톤은 세상이 그녀를 알아보고 다시 찾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 황수미와 헬무트 도이치의 위그모어홀 공연 ©Jonathan Rose

신선한 충격과 강렬한 몰입으로 가득했던 무대

이번 위그모어홀 프로그램은 올 초 한국 리사이틀과 대동소이했다. 전반부 슈베르트 리트를 시작으로 푸치니 ‘라 보엠’ 중 ‘내 이름은 미미’, 라흐마니노프 가곡 4곡이 전반부, 베르크의 리트 7개, 마스네 ‘마농’ 중 ‘우리들의 작은 식탁이여, 안녕’과 R. 슈트라우스 리트 5개가 후반부를 채웠다.

슈베르트 ‘가니메트’로 공연을 시작한 황수미의 목 컨디션은 쾌적하지 않았다. 도이치가 즐겨 반주했던 바바라 보니도 현역 시절 보통은 중·후반부에 슈베르트 리트를 배치했는데, 관객이 찬 홀의 어쿠스틱 컨디션에 순응하기에 첫 곡으로 ‘가니메트’는 호흡 컨트롤 면에서 난해했다.

그러나 ‘물레 잣는 그레첸’ ‘클레르헨의 노래’ ‘쉼 없는 사랑’으로 리스트들이 이어지면서 황수미의 탄탄한 기본기가 순차적으로 드러났다. 특히 ‘물레 잣는 그레첸’에서 섬세하게 진심을 담는 황수미를, 영롱하면서 절제된 타건으로 서포트하는 도이치의 조응 과정은 한 폭의 그림이었다. 앞으로 황수미와 도이치가 어떤 수준에서 조화를 이룰지 가늠케 하는 쇼케이스 같았다.

뜻밖의 놀라움을 던진 건 라흐마니노프 가곡이었다. ‘노래하지 마오, 아름다운 이여’ ‘잠’ ‘이곳은 얼마나 평화로운가’ ‘봄의 물’로 이어지는 곡들에서 황수미는 어두침침한 음상을 그대로 관객에게 전달하는 내성적인 어프로치가 신선한 충격을 줬다. 독일 리트에서 보이기 어려웠던 풍성한 성량이 드러났고, 어두운 패시지를 깊은 여운으로 읽어내는 몰입이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후반부 베르크, R. 슈트라우스 리트에서 본격적으로 황수미의 재능이 터졌다. 씹어 먹을 듯 기운찬 패시지를 이어가다 살짝만 입을 열어도 단아하게 퍼지는 여운까지 황수미는 위그모어의 관객을 다각도로 유인했다. 영국 런던 공연을 마치고 독일 본으로 떠난 황수미와 전화 인터뷰를 가졌다.

리사이틀 프로그램의 순서가 흥미롭다.

작곡가의 곡목 안 세부 순서는 도이치가 정했는데 곡들 사이의 조성에 균형을 맞춰 배치했다. 기획사 요청으로 오페라 아리아를 가곡들 사이에 넣었는데, 도이치는 처음에 이게 누구 생각이냐고 나에게 묻기도 했다. 내 생각엔 전·후반부 마지막에 아리아를 불렀다면 어땠을까 싶다.

독일어뿐 아니라 러시아어 딕션도 놀랍다.

서울대 대학원 시절 ‘러시아 문헌’ 수업을 들으면서 관심을 갖게 됐다. 도이치가 지인인 러시아인 건반 주자를 리허설에 불러 내 옆에 앉혀놓고 딕션을 교정해줬다. 독일어 딕션에 관해선, 다른 아시아권 가수들보다 한국인 성악가들이 확실히 발음이 좋다. 도이치와 작업하면서 많이 깎고 다듬었다.

베르크 리트의 경우 확실히 슈베르트·리하르트 슈트라우스와는 다르게 들렸다.

현대곡이어서 그런데, 도이치는 빈 스타일로 부르라고 요구했다. 나는 오스트리아의 오페레타 스타일로 과장하고 다이내믹을 더 넣어 표현해봤다. 딕션에도 컬러를 넣어 과장을 강조했다. 기회가 된다면 빈 스타일의 오페레타를 본고장 악단 연주로 한국에서 공연하면 좋겠다.

리트에 적합한 이상적인 독일어 딕션은 어떠한가?

특정 지역의 발음으로 들리지 않는 듣기 편안한 독일어여야 한다. 예를 들어 보통 독일인들과 대화를 하면 ‘r’ 발음을 굴리지 않는데, 베르크에선 ‘r’ 발음을 일부러 잘 들리게 발음하는 식이다.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이후 헬무트 도이치와 많은 부분을 상의하고 있는데.

공부를 위해 빈을 찾아갔는데 도이치 선생님이 아무 말도 안할 때, 긴장하게 된다. 지난번보다 내가 못해서 그런가, 스스로 의심해본다. 그런 긴장감이 심장을 뛰게 한다. 사실 극장 생활이 루틴한 삶의 연속인데 도이치와의 리허설이 내겐 스스로를 조율하는 시간이다. 그가 손을 내밀어주어 이런 기회를 얻었다. 내가 도이치의 명성에 누를 끼치면 안 된다. 조력자 역할을 하는 데 대해 발전을 보여야 하는 책임감이 있다. 그런 만남이 나에겐 행운이다.

독일에 살면서 본 슈타츠오퍼를 택한 이유는?

지난해 4월 솔리스트 오디션을 보고 10월에 합류했다. 흔히 ‘오픈 스튜디오’라 불리는 영 아티스트 프로그램을 독일 오페라 극장들이 많이 운영하는데 일종의 인턴십이다. 본은 인턴을 거치지 않고 바로 솔리스트가 될 수 있는 게 매력적이었다. 위그모어홀 같은 외부 연주도 최대한 배려해준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본 슈타츠오퍼에서 롱런할 수 있을까?

나는 동양인이고 소프라노다. 동양인 테너들은 나와 같은 조건에 비해 무대에 오를 기회가 좀 더 많다. 본에서 일하는 게 기쁘지만 어느 날 보니 스스로 서양인들 앞에서 주눅이 들어 있더라. 뭐든지 남들보다 열심히 하는 게 신조였다. 그래서 리허설도 먼저 가고 아파도 빠지지 않고 모든 걸 ‘예스’로 답했다. 실은 위그모어홀 공연 한 주 전에 굉장히 아파서 이러다 독창회를 취소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도이치가 ‘절대로 남은 기간 노래하지 말고 쉬라’고 했다. ‘네가 그렇게 열심히 부르는 것에 감사하게 생각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네 목소리는 스스로 지켜야 한다’고 말했다. 서양인들과 벌이는 일종의 싸움터에서 나는 무조건 ‘열심히 하자’였는데 이제는 좀 바뀌어야 할 것 같다.

오페라극장에서 보는 황수미의 음역은 어느 쪽인가?

내 생각이나 극장 모두, 리릭이다. 콜로라투라나 하이 콜로라투라는 당연히 아니고, 아직 나이가 있으니 리릭 레제로까지는 극장에서도 권유하는데 궁극적인 목표는 리릭이다. 푸치니의 여러 작품을 하고 싶다.

베르디 ‘리골레토’의 질다는 어떤가?

내 생각에 질다를 가벼운 소프라노만 부르는 건 아닌 것 같다. 이끌어내야 할 극적인 부분이 많아서 많은 에너지를 요구한다. 언젠가 도전하고픈 역할이어서 트레이닝을 해야 한다. 파미나(‘마술피리’), 수잔나(‘피가로의 결혼’), 레일라(‘진주조개잡이’), 알미레나(‘리날도’)도 모두 천천히 오래하는 게 목표다. 오랫동안 조금씩 발전하려면 욕심을 자제하고 멀리 보는 시야가 중요하다.

앞으로 한국에서의 활동 비중은 어떻게 생각하나?

계획적으로 얼마나 자주 가야 할지, 무슨 공연을 할지 계산이 서진 않았다. 무엇보다 프로젝트의 질이 중요한 것 같다. 내년 10월 프랑스 고음악 연주 단체인 마테우스 앙상블과의 협연이 한국에서 추진 중이다.

사진 아트앤아티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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