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로스 아코스타의 클래식 발레 은퇴 갈라 ‘클래식 셀렉션’

선구자가 남긴 발자국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6년 1월 1일 12:00 오전

카를로스 아코스타의 지난 26년을 되돌아보는 클래식 발레 무대


▲ ©Johan Persson

2014년 여름, 소속 발레단의 영국 투어를 위해 런던에 온 마린스키 발레 수석무용수 김기민은 “유색 인종이 앞으로 메이저 발레단에 지속적으로 진입하려면 각 피부색을 대표하는 선구자 같은 무용수가 필요하다”고 인터뷰했다. 그가 거론한 인물은 1973년 쿠바 태생 무용수, 카를로스 아코스타였다. 아코스타가 미국과 영국을 오가며 클래식 발레에서 월등한 기량을 선보였기에 이제 로열 발레에 흑인 무용수(에릭 언더우드)가 무대에 올라도 예전처럼 부자연스럽지 않다는 논지였다.

김기민의 견해를 황인 무용수와 로열 발레에 대입하면, 1990년대 수석무용수에 오른 요시다 미야코·테츠야 구마카와의 후광은 지금도 유효하다. 현재 퍼스트 솔로이스트인 최유희·히라노 료이치·고바야시 히카루·다카다 아카네가 꾸준히 주역과 준주역에 캐스팅되고 있다. 피부색이 아닌 실력 위주로 주역을 캐스팅하여 발레단이 다양성을 기반으로 작품과 흥행 양면에 모두 성공하는 사례를 만들어낸 발레 남성 무용수의 경우, 단연 아코스타다. 사반세기 동안 일세를 풍미한 거물 클래식 발레무용수의 현역 인생이 막바지에 다다르고 있다.

2014년 5월, 아코스타는 “마지막 클래식 발레 작품으로 로열 발레에서 ‘카르멘’을 안무하고 춤추면서 은퇴하겠다”고 밝혔다. 2015년 10월말과 11월초, 아코스타는 플라멩코 뮤지션을 기용하면서 알베르토 알론소 버전과는 또 다른 라틴 느낌의 ‘카르멘’을 제작했고, 전회 매진을 기록하며 관중의 기립박수와 함께 전막 주역에서 내려왔다. 2015년 12월 8~13일에는 그가 26년간 무용수로 활동하며 흥미로워 하던 단편을 망라해 ‘클래식 셀렉션’ 갈라를 런던 콜리세움에서 상연했다. 2006년 올리비에상을 수상한 ‘아코스타와 로열 발레의 친구들’의 수정 보완 버전이었다.

 

 


▲ ‘디아나와 악타이온’에서 호흡을 맞춘 카를로스 아코스타와 마리아넬라 누녜스

탁월한 몸놀림과 집중력의 소유자

아코스타는 13남매 중 열한 번째로 태어났다. 아바나에서 트럭을 운전하던 아버지는 선머슴 같던 아코스타를 발레 클래스에 보냈다. 사회주의 국가여서 발레를 비롯한 모든 교육이 무료였지만 교육의 질이 좋았고, 쿠바 국립 발레학교로 전학가면서 아코스타는 점차 춤에 몰두하게 됐다. 1990년 로잔 콩쿠르에서 금상을 탔고 이듬해 잉글리시 내셔널 발레에 초청되면서 영국 관객과 만났지만 부상을 입고는 쿠바로 돌아갔다. 아바나에서 알리시아 알론소가 이끄는 쿠바 내셔널 발레에 입단했고 곧바로 수석무용수에 올랐다. 1993년 11월 휴스턴 발레의 예술 감독 벤 스티븐슨 초청으로 도미한 이후 같은 발레단의 흑인 발레리나 로런 앤더슨과 함께 주요 클래식 발레를 소화하면서 미국에 흑인 발레 듀오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1998년 앤서니 다월이 로열 발레 입단을 제안했고, 즉시 실비 기옘과 함께 수석 객원 무용수에 올랐다.

로열 발레 초기에는 요시다 미야코·타마라 로호와 자주 파트너가 됐고, ‘돈키호테’ ‘백조의 호수’ ‘지젤’ ‘라 바야데르’에서 요한 코보르·조너선 코프와 주역을 나눠 가졌다. 2000년대 중반 들어 ‘마농’ ‘리즈의 결혼’ ‘잠자는 숲 속의 미녀’ ‘메이얼링’ 등 로열 발레 특유의 색채가 짙은 전막에 올랐다. 브리티시 전통의 프레더릭 애슈턴과 케네스 맥밀런의 안무작에선 개막 공연의 주인공보다, 주로 노련한 발레리나들과 합을 맞추며 매진을 기록했다. 마흔을 전후한 2010년대 들어서면서 영국의 신진 안무가 작품보다는 잉글리시 내셔널 발레(ENB)를 오가며 자신이 마음에 들어 한 클래식 발레 전막에 오르며 사실상 은퇴 로드쇼를 이어갔다. 2014년엔 원형극장인 로열 앨버트홀에서 ENB 버전 ‘로미오와 줄리엣’에 올랐다. 현재 국적은 영국이고, 2014년엔 3등급 대영제국훈장인 CBE 작위를 받았다. 무용수를 관둔 이후엔 런던과 아바나에 개관한 발레 학교를 오가며 제2의 무용 인생을 살 것으로 보인다.


▲ ‘디아나와 악타이온’ 중 한 장면

20, 30대 시절 아코스타의 장기는 고무처럼 탁월한 스프링 점프였다. 거대한 몸집으로 너무도 가볍게 도약과 착지, 스텝 워크를 이어가는 과정 하나하나가 무용수와 관객의 눈을 사로잡았다. 아메리칸 발레 시어터에선 로베르토 볼레와 함께 유연하지만 절도 있는 무브먼트가 요구되는 발란신 작품에 중용됐다. 야성적인 인상이지만 작품에 진지하게 몰두하는 집중력은 발레단 단장들이 빠짐없이 칭찬하던 미덕이다.

여름이 되면, 자신의 어린 시절 쿠바에서의 일상을 발레로 옮긴 ‘토코로로’(2003)를 런던에서 자주 공연했다. ‘토코로로’를 통해 런던 관객은 작품에 출연한 쿠바 내셔널 발레 단원들을 볼 수 있었다. 작품성이 보강된다면 정서적 차원에서 카리브해와 영국 문화권의 거리를 좁히는 데 발레가 어느 정도 역할을 담당할 수 있을 것이다.

 

 


▲ 카를로스 아코스타와 발레리 흐리스토트가 열연한 ‘마히시모’

무대의 이면을 콘셉트로 펼쳐진 ‘클래식 셀렉션’

‘클래식 셀렉션’에는 아코스타와 로열 발레에서 가깝게 지낸 마리아넬라 누녜스·세나이다 야노스키·최유희·치아구 소아리스·발레리 흐리스토프·네헤미아 키시 등이 함께했다. 2008년 콜리세움에서 열린 동명의 쇼와 비교하면 리엄 스칼렛의 안무작이 추가됐다. 갈라는 오케스트라 음악에 맞춰 아코스타와 동료들이 클래스를 위해 발레단으로 출근하는 풍경으로 시작됐다. 그들이 향한 곳은 바가 설치된 무대 뒤편이었고 무용수들은 음악에 맞춰 트레이닝복 차림에 레그 워머를 차고 각자 스트레칭으로 몸을 데우면서 공연 차례를 기다렸다. 열두 작품 가운데 여섯 개가 공연된 전반부 내내 ‘무대 뒤에서’ 콘셉트가 이어졌다.

아코스타와 누녜스가 ‘아곤’ 파드되로 서막을 열었다. 아코스타의 유연성은 예전 같지 않았지만, 고대 석상처럼 거대하게 서 있는 중량감만으로 무대를 압도했다. 노련한 발레 커플이 서로 단점을 커버하는 모습이 연륜을 말했다. 이어진 부르농빌 버전 ‘라 실피드’ 2막 파드되에서 놀라움을 던진 건 최유희였다. 로열 발레에서 포킨과 코보르 스타일을 섭렵했지만 파트너 흐리스토프와 마찬가지로 발레단 안팎에서 부르농빌식 무브먼트를 교정하고 평가해줄 코치가 없다는 게 그녀가 밝힌 불편함이었다. 그러나 목에서 팔로 이어지는 날카로운 라인이 다양한 레벨의 감정을 포르드브라로 분화시키는 장면만으로 갈라의 맛을 돋웠다.

치아구 소아리스와 티어니 헵이 나선 맥밀런 ‘겨울 이야기’는 절대적인 연습 부족이 의심되는 순서였다. 연인 관계에서 좀처럼 보기 어려운 무덤덤함이 작품 내내 이어졌다. 야심차게 노장 야노스키가 준비한 ‘빈사의 백조’ 역시 로파트키나, 김지영의 기량과 비교하면 비(非)바가노바 스타일의 한계가 드러났다. ‘디아나와 악타이온’ 파드되에서 아코스타는 무심한 듯 최선을 다하지 않은 자세로 점프와 연착륙을 이어갔지만, 관객은 환호했고 기량도 훌륭했다. 이런 기량에 은퇴를 하는 것이 아쉬움을 남길 즈음 전반부가 끝났다.

후반부는 아코스타가 어린 시절 자신을 미국으로 불러준 벤 스티븐슨에게 바치는 헌사를 시작으로 발레 갈라에서 흔히 보는 컨템퍼러리 단편들이 이어졌다. 연기와 기교의 수준을 검증 받기보다 ‘토코로로’의 분위기처럼 결국 모든 작품이 아코스타 1인의 주목을 위해 수렴했다. 마침내 모든 작품이 끝나고, 무대엔 아코스타만이 남아 있었다. 연습실에 혼자 앉아 주위를 살펴보고 자신의 몸을 돌아보다가 짐을 챙기고는 불을 끄고 걸어 나갔다. 이렇게 공연이 끝난 것인지 관객들이 잠시 의문에 빠져 있을 때, 갑자기 홀의 조명이 환하게 켜졌다. 객석에선 웃음이 터졌고 그제야 출연자 모두가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무대로 들어와 커튼콜을 받았다. 끝날 듯 끝나지 않던 아코스타의 마지막 클래식 발레 무대가 그렇게 막을 내렸다. ‘가디언’지, ‘더 타임즈’지, ‘파이낸셜 타임즈’지가 ★★★★, ‘텔레그래프’지가 ★★★을 매겼다.

아쉽게도 아코스타는 2005년 로열 발레의 한국 투어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그래도 댄서로서 인생은 계속된다. 그는 2016년 1월 코번트 가든 린버리 스튜디오에서 셰익스피어 탄생 400주년을 기념하는 컨템퍼러리 성향의 ‘엘리자베스’에 야노스키와 함께 출연한다.

Back to site top
Translat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