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오페라극장 ‘휠던/맥그리거/바우슈’

현대음악을 향한 세 안무가의 오마주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6년 1월 1일 12:00 오전

피에르 불레즈에게 헌정된 파리 컨템퍼러리 발레의 밤. 리게티·불레즈·스트라빈스키의 작품을 녹여낸 움직임의 향연

파리 오페라극장과 발레 안무가 뱅자맹 밀피에가 지난 12월 1~31일 피에르 불레즈에게 헌정한 발레의 밤을 열었다. ‘크리스토퍼 휠던/웨인 맥그리거/피나 바우슈’로 명명된 제목처럼 3인의 안무가 작품으로 공연됐다.

 

 


▲ 리게티 음악이 지닌 분위기를 존중한 안무가 돋보인 휠던의 ‘폴리포니아’

크리스토퍼 휠던의 ‘폴리포니아’

첫 작품 크리스토퍼 휠던의 ‘폴리포니아’는 2001년 가을 뉴욕 시티 발레에 의해 초연됐고 이번 공연을 시작으로 파리 오페라 발레 공식 레퍼토리에 입성했다. ‘폴리포니아’의 음악은 리게티의 에튀드 등 피아노 독주곡에서 발췌한 10곡으로 이뤄졌으며, 피아니스트 미셸 들레탱이 연주했다. 작품은 반복적이고 역동적인 리듬의 8인무로 구성된 ‘무질서’로 시작해 역시 같은 분위기의 ‘카프리치오소’로 귀결해 수미쌍관을 이뤘다.

“나는 이 작품을 낭만 발레라고 본다. 단, 두 무용수의 관계가 좀 더 현대적이라는 점이 다르다”는 휠던의 말처럼 두 번째 작품 ‘무지개’와 이어진 ‘템포 디 왈츠’ ‘인벤션’ 등에서 보다 내면적이고 자연스러운 듀오 연출이 돋보였다. 보라색 의상을 입은 무용수들의 퍼포먼스는 테크닉보다 리게티의 음악이 지닌 분위기를 존중했다. 특히 아홉 번째 ‘슬픔, 엄격함과 의식’이 돋보였다. 곡은 몇 개의 음만으로 긴장과 이완, 침묵과 움직임의 이원론을 극단적으로 승화시켰다. 어느 순간 무용을 보고 있는지 눈을 통해 음악을 보고 있는지 착각이 들 정도로 휠던은 리게티 작품의 본질을 꿰뚫었다.

리게티는 발레를 위한 작품을 쓴 적이 없다. 그럼에도 1960~1970년대 야프 플리르·뤼디 판 단지흐·토르 판 스하이크 같은 네덜란드권 안무가들을 비롯한 현대안무가들이 그의 작품을 빈번히 사용했다. 존 노이마이어가 리게티의 곡에 안무한 ‘한여름 밤의 꿈’이 대표적인 예다. 그러나 ‘폴리포니아’의 안무는 피아노로만 쓰인 작품을 사용했다는 점에서 모험이었다. 복합적으로 엇갈리는 여러 감정을 지닌 리게티 작품의 해석은 머리를 긁적일 정도의 난제이기도 하다. 휠던은 “리게티의 음악은 강렬한 이미지로 내게 말을 건다. 그리고 그 이미지들을 심화하도록 나를 고무시킨다”고 전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두 사람은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휠던은 리게티에게 발레 작품을 위촉했으나 실현되지 못한 채 2006년 리게티가 타계했다. 휠던은 아직까지 ‘내가 얼마나 당신의 발레 작품을 좋아하는지 모를 겁니다’라 적힌 리게티의 편지를 간직하고 있다. 이 편지는 그에게 뿌듯함과 안도감을 주었다는 고백이다.

 

 


▲ 불레즈의 음악에 아크로배틱한 안무를 더한 맥그리거의 ‘알레아 샌즈’

웨인 맥그리거의 ‘알레아 샌즈’

두 번째 작품은 웨인 맥그리거의 전자음향과 바이올린 솔로를 위한 ‘알레아 샌즈’였다. ‘알레아’는 우연을 뜻한다. 우연성이 가미된 불레즈의 기법이기도 하다. 작품이 시작되자 조명이 꺼졌다. 마치 고압으로 인해 샹들리에가 꺼진 듯한 연출이었다. 연속된 저음의 전자 음향에 맞춰 벽의 붉은 램프들이 번쩍거리기 시작했다. 프롤로그는 음향과 빛을 이용한 실험적인 작품을 선보이는 설치 미술가 하룬 미르자의 작품으로 구성했다. 연주에 참여한 바이올리니스트 강혜선은 “안무의 음악으로 사용된 불레즈의 전자음향과 바이올린을 위한 ‘앙템 2’의 길이가 짧아 이를 보충하기 위해 프롤로그를 삽입했다”고 전했다. 원래 작품은 음향이 더욱 강했으나 파리 테러 후 청중이 위협을 느낄 것을 우려해 줄였다고 덧붙였다.

불레즈의 ‘앙템 2’가 이어졌다. 작품 연주를 위해 다니엘 바렌보임의 아들 미카엘 바렌보임과 ‘앙템 2’를 초연한 바 있는 강혜선이 더블 캐스팅됐다. 12월 5일 공연은 강혜선이 연주했다. 그녀는 흑백으로 양분된 옷을 입고 거대한 오케스트라석에 홀로 자리 잡았다.


▲ 불레즈의 음악에 아크로배틱한 안무를 더한 맥그리거의 ‘알레아 샌즈’

작품은 마리 아네스 질로와 오드리크 베자르의 듀오 안무로 시작됐다. 곡예와 같은 기교가 돋보이는 이들의 안무 후 불꽃같은 조명이 때로는 규칙적으로, 때로는 불규칙적으로 움직였다. 7인의 무용수는 3인, 4인으로 유연하게 짝지어 아크로배틱한 안무를 펼쳤다. 강혜선이 연주한 ‘앙템 2’는 고난도 테크닉을 요하는 작품으로 청중의 귀에 강렬한 인상을 심었으며, 여기에 번쩍이는 미르자의 램프 퍼포먼스가 오버랩됐다. 어두운 조명 속, 칙칙한 의상을 입은 무용수들의 안무를 따라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작품은 청중에게 고도의 집중력을 요구했다. 조금은 실망스러웠던 웨인 맥그리거의 안무에 프랑스 언론은 ‘불레즈가 아깝다’라 평했다.

 

 


▲ 스트라빈스키 음악의 불규칙한 박동에 맞춰 강렬한 안무를 선보인 바우슈의 ‘봄의 제전’

피나 바우슈의 ‘봄의 제전’

세 번째 작품은 피나 바우슈가 안무한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이다. 무대 전환 시 커튼을 내리는 관례에도 불구하고 이날의 무대는 열려 있었다. 흙을 담은 철제 트렁크가 등장하고 작업복을 입은 스태프들이 빗자루를 들고 나타났다. 그리고 그 흙을 거대한 사각 도안에 맞춰 펼치기 시작했다. 청중은 무대의 준비 과정을 흥미롭게 지켜봤고, 이렇게 시작된 ‘봄의 제전’은 열광적인 박수와 함께 막을 내렸다.

“서양의 리듬이 규칙적인 박동에서 기인한다면 ‘봄의 제전’의 박동은 불규칙적인 것에 기인한다”라는 불레즈의 말처럼 무용수들은 한 음 한 음에 맞춰 동선을 이어갔다. 그들은 표정부터 손가락의 움직임에 이르기까지, 놀람과 공포로 점철된 동작과 강렬한 표정을 선보였다. 경직된 자세로 35분간의 공연에 임하는 무용수의 집중력은 놀라웠다. 희생을 위해 선정된 처녀 역을 맡은 엘레오노라 아바냐토는 어린 사슴처럼 큰 눈망울을 떨며 아름다운 실루엣과 공포를 연출했다. 연주는 벨로 패흔/파리 오페라 발레 오케스트라가 맡았다.

 

 


▲ 바이올리니스트 강혜선 / 1993년 파리 오케스트라의 최연소, 첫 여성 악장으로 활동했으며 이후 앵테르콩탕포랭의 독주자로서 피에르 불레즈·파스칼 뒤사팽 등 현대 작곡가들의 곡을 초연했다. 현재 파리 국립고등음악원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있다. 1월에는 필리프 마누리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과 협연하고, 3월에는 파리에서 마티아스 핀처의 바이올린 협주곡를 연주하며 10월에 한국에서 동곡 연주회를 가질 예정이다 ©Frank Ferville

‘앙템 2’의 초연자 강혜선을 만나다

지난 12월 10일 파리에 위치한 음악·음향연구소 이르캄(IRCAM) 앞에서 바이올리니스트 강혜선을 만났다. ‘알레아 샌즈’ 공연 소감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나눠보았다.

불레즈의 ‘앙템 2’에 있어 당신의 연주는 많은 이들에게 레퍼런스다.

한 작품을 초연한다는 것은 작곡가와 함께 공부를 한다는 뜻이다. 작곡가는 초연자를 생각하며 곡을 작곡하기 때문이다. 이점에서 ‘앙템 2’를 초연한 것은 운이 좋았다고 본다. 불레즈는 앞에서 칭찬을 하는 타입이 아니다. 그가 좋았다고 말하는 것은 극찬이나 마찬가지다.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내가 연구를 많이 하고 정확성이 뛰어나다고 종종 말했다고 한다. 이에 대한 책임감이 연주 시 부담이 될 때도 있다.

‘앙템 2’ 자필 악보를 보면 기보된 음도 많은 데다 음표 크기가 아주 작다. 악보 읽기가 힘들었을 것 같은데.

불레즈가 원래 음표를 작게 그린다. 1997년 초연 당시 팩스로 자필 악보를 받았고 3일 만에 곡을 연주해내야 했다. 녹음 후 전자음향 파트를 작곡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제는 이 작품을 50번도 넘게 연주해 외울 정도가 됐지만, 녹음 당시에는 참조할 연주가 없어 곡을 외우기 어려웠다. 음 하나 하나를 외운다는 생각으로 임했다. 템포나 표현은 처음에는 불레즈가 제시한 방향에 충실했고, 지금은 내가 원하는 것을 반영하기도 한다.

작품을 연주하며 감정에 중심을 둔 부분과 테크닉을 염두에 둔 부분이 있다면?

현대음악을 연주할 때면 나는 꼭 노래를 한다. ‘앙템 2’는 의외로 멜로디가 있어 노래할 부분이 많다. 테크닉적으로는 굉장히 어려웠다. 고전적인 기법과 현대음악이 원하는 테크닉을 함께 구사해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피치카토 패시지가 어려웠다. 피치카토 때문에 굳은살이 배길 정도였다. 이제는 나만의 테크닉을 찾아 빨리 연주할 수 있게 됐다.

공연 시 어려움은 없었나.

오케스트라석에 카메라 스크린이 있었지만 무용수들이 작게 잡혀 잘 보이지 않았다. 때문에 조명을 통해 사인을 받으며 진행했다. 빨간불은 ‘준비’, 초록불은 ‘연주’와 같은 식이다. 시스템에 익숙해지는 데 많이 긴장했다. 사실 발레를 동반한 연주가 처음은 아니다. 다른 안무가가 안무한 ‘앙템 2’ 등 이미 여러 발레 작품을 했다. 전에는 모두 무대 위에서 무용수의 동선을 보며 연주해 지금과 같은 어려움은 없었다. 더블 캐스팅된 미카엘 바렌보임이 곡을 암보하지 못했다. 그래서 악보를 보기 위해 무대가 아닌 오케스트라석에서 연주하게 된 것이다. 아버지 덕분인지는 모르지만, 오프닝 공연은 그가 맡았다. 누구의 딸도 아니고, 누구의 부인도 아닌 강혜선이라는 이름을 지닌 한국 여성의 한계가 새삼스럽게 느껴져 씁쓸했다.

그렇지만 파리 오페라극장 같은 예외적인 무대에 섰다는 것만으로도 큰 영광이다. 특히 커튼콜 때 에투알(수석무용수)과 함께 무대에 섰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사진 Julien Benham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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