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작가·연출가 미타니 고키

예술은 꼭 심각해야 하나요?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6년 2월 1일 12:00 오전

연극 ‘웃음의 대학’, 뮤지컬 ‘오케피’의 극작가 미타니 고키. 웃어본 사람만 안다는 고키의 예술세계

최근 공연을 보고 큰 소리로 웃어본 일이 있는지? 채플린식의 눈물겨운 코미디는 찾아보기 어렵고, 고소(苦笑)를 자아내는 블랙코미디만 매우 드물게 무대에 올랐던 것 같다(물론 TV에서 방영하는 콘서트 형식의 개그 쇼는 대학로 어딘가에서 공연되고 있는 것으로 안다). 이러한 가운데 참신한 희극 두 편이 관객들의 뜨거운 반응을 얻고 있다. 지난 1월 24일 막을 내린 연극 ‘웃음의 대학’과 현재 순항 중인 뮤지컬 ‘오케피’다. 이 두 작품을 탄생시킨 이가 바로 극작가이자 연출가 미타니 고키(Mitani Koki)다.

고키는 국내에서 영화 ‘웰컴 미스터 맥도날드’(1997)로 처음 이름을 알렸다. 이후 연극 ‘너와 함께라면’(1995) ‘웃음의 대학’(1996) ‘술과 눈물과 지킬앤하이드’(2014)와 영화 ‘매직 아워’(2008) ‘멋진 악몽’(2011) 등이 번역되며 ‘고키표 코미디’로 한국에서 마니아층을 형성했다. 미타니 고키는 누구인가. 웃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르는 고키만의 세계를 조명한다.

연극에 뿌리를 내려 꽃을 피우다

1961년 도쿄에서 태어난 미타니 고키는 어린 시절 대부분을 TV를 보며 보냈다. 특히 추리물을 좋아한 그는 셜록 홈즈를 그린 책과 영상물을 사 모았고, 콜롬보의 빅 팬이 되었다. 빌리 와일더의 코미디 영화를 탐닉하며 성장한 그는 니혼대학 예술학부 연극학과에 진학했고, 1983년 극단 도쿄 선샤인 보이스를 결성했다.

일본 TV 드라마 ‘역시 고양이가 좋아’라는 시리즈물의 각본을 이어 쓰는 것으로 프로 데뷔를 한 고키는 이후 연극 ‘12명의 마음 약한 일본인’ ‘라디오의 시간’ ‘도쿄 선샤인 보이스의 함정’과 드라마 ‘료마에게 맡겨주세요!’ ‘후루하타 닌자부로’ 등을 작·연출하며 드라마와 연극계에서 입지를 다진다. 극단 선샤인 보이스의 공연 티켓은 구하기 어렵다는 말이 생길 정도로 큰 성공을 거두지만, 1994년 고키와 단원들은 각자의 길로 뿔뿔이 흩어지며 긴 휴지기를 보낸다(고키는 2024년 극단 선샤인 보이스 활동을 재기할 것이라 공언했다).

고키의 첫 영화 연출작 ‘웰컴 미스터 맥도날드’(1997)는 그의 작품 세계를 세상에 알리는 계기를 마련한다. 자신의 연극 ‘라디오의 시간’을 각색한 이 작품은 평범한 주부 미야코가 라디오 드라마 공모전에 당선되어 첫 라디오 생방송을 앞두고 벌어지는 소동을 그린 작품. 리허설은 무사히 끝나지만, 주인공 여배우 놋코가 자신이 맡은 배역의 이름이 촌스러우니 바꿔달라 우기면서 아슬아슬한 상황이 시작된다. 그녀의 주장을 들어주다 보니 전체 배역의 이름이 모두 바뀌고, 여주인공은 주부에서 변호사로, 남주인공은 어부에서 파일럿으로 바뀌며 배경은 일본에서 미국으로, 다시 우주로 뒤바뀐다. 프로듀서는 투자자의 눈치를 보고, 엔지니어는 음향 사고를 내는 등 개개인마다 좌충우돌 사고를 일으키며 엉망진창의 생방송을 이어간다. 영화에는 실제 드라마 작가로 일하던 고키의 관찰력과 생동감이 그대로 담겨 있다. ‘뉴욕 타임스’지는 ‘우리들의 인식을 뒤엎는 일본 코미디. 미국 영화가 잃어버린 전통적인 웃음을 꽃 피워낸 수작’이라 호평했다.

영화 ‘웰컴 미스터 맥도날드’ 이후 잇달아 흥행에 성공한 ‘모두의 집’(2001)과 ‘더 우쵸우텐 호텔’(2006)은 설정부터 공간 활용, 전개 방식까지 모든 부분에서 연극에 뿌리를 두고 있다. 2002년에 그가 각본을 쓴 TV 시트콤 ‘HR’은 100명의 청중을 두고 30분 간 카메라 7대로 논스톱 촬영을 하는 연극적 기법을 도입하기도 했다. 고키는, 비평은 자신의 창의력을 저하시킨다는 이유로 보지 않는다고 밝힌 바 있지만, 2015년 영화 ‘갤럭시 가도’의 개봉을 앞두고 ‘이번에도 분명 연극적이라고 비판받겠지. 무대에서 보고 싶었다든지’라고 적은 것으로 보아 평단에도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고키에게 연극이란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다.

한참을 웃어도 허무하지 않은 이유


▲ 연극 ‘웃음의 대학’ 중 검열관 역의 서현철

미타니 고키의 연극 중 한국어로 번역된 작품은 ‘너와 함께라면’(1995) ‘웃음의 대학’(1996) 그리고 그의 최신작인 ‘술과 눈물과 지킬앤하이드’(2014)다. 그중 ‘웃음의 대학’은 2008년 한국 무대에 처음으로 올라 8번 재연됐다. 1996년에 일본에서 초연되었고 러시아와 영국에서 장기 공연된 바 있으며, 2004년 호시 마모루 감독이 영화화했다.

연극 ‘웃음의 대학’은 극작가와 검열관, 단 두 명이 출연해 극을 이끈다. 극작가는 자신의 희극을 무대에 올리기 위해 검열관을 찾아가지만, 어렵고 힘든 시대니만큼 희극은 불필요하다고 여기는 엄격한 검열관을 만나 고군분투한다. 웃음이 터지는 장면은 모두 삭제하라는 검열관을 설득하기 위해 작가는 검열관의 지시 사항을 모두 반영하지만, 대본을 고치면 고칠수록 극은 더 큰 웃음을 유발한다. 7일간 같은 상황이 반복되며 두 사람의 관계는 가까워지고, 객석의 웃음은 증폭된다. 고키 특유의 훈훈한 여운이 감도는 작품이다.

지난 24일 폐막한 이번 무대에는 서현철·남성진이 검열관을 맡고, 박성훈·이시훈이 작가 역을 맡았다. 고키의 한국어 연극에 모두 출연한 바 있는 서현철은 축적된 경험 덕인지 작품에 대한 이해력 덕인지(물론 둘 다일 수도 있지만), 고키와 닮은 느낌마저 든다. 무뚝뚝한 아저씨 같다가도 시치미를 뚝 떼고 웃기는 뻔뻔함으로 캐릭터의 매력을 충분히 표현했다.

고키의 필모그래피는 영화 ‘매직 아워’(2008)로 이어진다. 이 영화는 국내에서도 큰 인기를 누렸다. 1920년대 미국 도시 시카고를 재연한 항구도시 ‘수카고’는 도쿄의 도호스튜디오 세트장 세 개를 합친 것으로, 1천 평 규모를 자랑한다. 일상과 동떨어진 판타지를 만들고 싶다는 고키의 바람대로 고풍스럽고 낭만적인 비현실적 세계가 탄생했다.

보스의 여자 마리와 밀애를 나누다 들킨 빙고는 전설의 킬러 도가시를 데려오면 살려준다는 보스의 말에 무명 배우 무라타를 데려와 도가시라 속인다. 평생 진심 어린 연기를 꿈꾸던 무라타는 대본 없이 즉흥적으로 이루어지는 실험극이라는 빙고의 거짓말에 속아 킬러 도가시 역에 완전히 몰입한다. 죽음까지 불사하는 무라타의 열연은 보스와 조직원들을 속이는 데 성공하고, 보스의 신임까지 얻는다. ‘자신의 작품 중 가장 재미있다’는 고키의 말대로 관객은 이들의 동상이몽에 박장대소한다.

이 영화는 그동안의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캐릭터에 대한 고키의 강한 애정을 보여준다. 작품에 대한 순수한 열정을 지닌 단역 배우 무라타의 감정을 중심으로, 한 번도 빛을 보지 못한 촬영 스태프들을 차례차례 조명한다. 이들은 사실과 허구가 교차하는 결말을 함께 완성하며 빛나는 순간을 만들어낸다. 해가 사라졌지만 여전히 빛이 남아 있는 순간, 아름답고 신비한 순간을 일컫는 ‘매직 아워’를 그리며 각자의 가슴에 온기를 전하면서도 ‘매직 아워를 놓쳤다면? 내일을 기다리면 된다!’는 명쾌한 해답을 제시한다. 내내 웃다가도 허무하지 않고 경쾌한 기분이 드는 것이 바로 고키의 작품의 특징이다.

고키의 첫 뮤지컬 ‘오케피’, 한국에 착륙하다


▲ 뮤지컬 ‘오케피’ 도입부의 한 장면

고키의 행보를 보면 그의 첫 뮤지컬 ‘오케피’의 형식은 자연스럽다. 귀에 꽂히는 아리아도, 극적인 클라이맥스도 없고, 이야기를 책임지는 주인공도 존재하지 않는다. 뮤지컬 공연장 오케스트라 피트에서 연주 활동을 하는 13명의 연주자들의 일상을 비출 뿐이다. 주인공의 컨디션에 따라 공연 당일에도 악보가 바뀌고, 뮤지컬이 크게 성공해도 오케스트라에는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지만 이들은 각자의 사연을 가지고 연주를 이어간다. 무대 위쪽, 오케스트라 피트를 표현하기 위해 살짝 내려온 천장은 관객을 오케스트라 피트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하고, 특별할 것 없는 이들의 사연은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간단하게 말로 하면 30분이면 끝날 이야기’ ‘춤 안 추고 가뿐하게 걸어가면 30초 만에 갈 수 있잖아’라며 뮤지컬 장르를 풍자하고, ‘가면 쓰고 여자한테 노래시키고(오페라의 유령)’ ‘주사 맞고 갑자기 성격 바뀐(지킬 앤 하이드)’ 고전 뮤지컬을 비웃는 장면은 참신하고 통쾌하다. ‘여기는 원숭이 우리가 아니야’ ‘관객, 졸지 마. 부스럭거리지 좀 마’라고 소리칠 때는 한 번도 당한 적이 없는 지적에 뜨끔해하며 시원하게 웃을 수 있다.

이번 한국어 초연은 배우 황정민이 연출과 주연(오만석과 더블 캐스팅)을 맡았다. 2008년 연극 ‘웃음의 대학’에 출연했던 황정민이 고키의 매력에 반해 5년간 ‘오케피’ 초연을 준비했다고 한다. 배우로서 황정민은 만족할 만하지만, 연출력에는 다소 아쉬움이 남는다. 여러 개의 에피소드로 엮인 시트콤 형식의 스토리는 정돈되지 못하고 사방으로 흩어졌고, 무엇보다 야단법석 소동이 벌어졌을 때와 느린 솔로 넘버가 연주될 때 완급의 차이가 별로 없어 작품의 매력이 극대화되지 못했다. 하지만 각 캐릭터가 내포하고 있는 각각의 감정들이 얽힌 관계 속에서 공유되며 따스한 웃음을 자아냈다.

미타니 고키는 수년 전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관객을 만나는 데 예술성이라는 것은 방해물만 될 뿐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이는 오로지 많은 관객을 웃게 하겠다는 순수한 의도에서 비롯된 말인 듯 보인다. 하지만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치밀함과 성실함, 또 탁월한 감각은 그의 작품이 예술성을 가질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자극적이거나 억지스러운 웃음이 아닌, 자연스럽고 따뜻한 웃음이 그립다면 그의 행보를 주목하라.
(*작품의 초연·개봉 연도는 제작 국가를 기준으로 기입했다.)

사진 적도·샘컴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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