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서울스프링페스티벌에서 이경선이 연주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무표정한 얼굴로 베토벤 실내악 작품을 연주하는 모습은 카리스마가 넘쳤다. 하지만 연주가 끝난 후 환하게 웃는 미소는 봄꽃처럼 화사하고 부드러웠다. 강하고 부드러운 힘. 그동안 솔리스트와 실내악 주자로 무대를 종횡무진 누벼온 그녀는 올해, 자신이 2015년에 결성한 서울비르투오지챔버오케스트라와 함께 새로운 도전을 시작한다
2016년 4월 3일 LG아트센터 리허설 현장. 조명이 꺼지고 젊은 앙상블 주자로 구성된 연주자들이 무대에 올랐다. 곧이어 탱고의 열정적이고 리드미컬한 선율이 다양한 색채로 펼쳐졌다. 서울비르투오지챔버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아스토르 피아졸라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사계’다. 봄, 여름, 가을을 거쳐 고요한 겨울 풍경이 음악의 리듬을 타고 들려온다. 그 뒤를 이어 바이올리니스트 로버트 맥더피가 이끄는 앙상블이 필립 글래스가 작곡한 바이올린과 관현악을 위한 협주곡 2번 ‘미국의 사계’를 연주한다. 미니멀리즘의 다양한 스펙트럼이 사계의 아름다움을 확산시키고 있었다.
이날의 음악 풍경은 변덕스런 날씨에도 봄을 노래하는 꽃들의 향연 같았다. 객석에 앉아 음악 속에 빠져 있는 한 사람. 서울비르투오지챔버오케스트라 예술감독 이경선이다. 서울비르투오지챔버오케스트라는 2015년 창단해 작년부터 올해까지 비발디 ‘사계’, 강석희 ‘평창의 사계’, 피아졸라 ‘사계’, 필립 글래스 ‘사계’ 연주로 평단의 호평을 받았다.
이들의 새로운 도전을 이끌고 있는 바이올리니스트 이경선(서울대 교수). 그녀는 한국 실내악 역사의 중요한 순간을 함께한 연주자로 세종솔로이스트와 금호 현악 4중주단의 멤버로 활동했고 서울스프링페스티벌, 대관령국제음악제를 비롯해 말보로·애스펀·라비니아 페스티벌 등 세계적인 페스티벌에 초청되어 활발한 활동을 펼쳐왔다. 현재 대전실내악축제 예술감독으로 우리나라 실내악 부흥에 힘쓰고 있다.
오벌린 음대와 휴스턴 음대 교수로 재직하다 2009년부터 지금까지 서울대에서 후학을 가르치고 있는 그녀는 올해, 자신이 2015년에 창단한 서울비르투오지챔버오케스트라와 함께 새로운 도전을 시작한다.
봄의 모데라토, 꿈은 아름다워라!
지적이고 아름다운 외모와 음악적 재능을 지닌 이경선은 마산의 딸 부잣집 네 자매 중 셋째 딸이었다. 딸 부잣집에 아들이 없다 보니 부모님은 미래가 보장되고 유망한 것이 무엇일까 고민하다 네 딸에게 모두 악기를 가르쳤다.
“아버지께서 바이올린을 참 좋아하셨어요. 처음엔 피아노를 배웠죠. 그런데 피아노라는 거대한 악기가 워낙 말랐던 저에게는 신체적으로 벅찼던 것 같아요. 피아노는 사이즈별로 제작되는 악기가 아니어서 손이 자랄 때까지 피아노를 잠시 쉬어야 했죠. 그리고 그 틈을 타 시작한 악기가 바로 바이올린이었어요. 그런데 바이올린은 배울수록 재미있는 거예요. 그래서 언니들과 모두 바이올린을 배웠죠. 결국 우린 네 명 다 대학에서 바이올린을 전공했고, 자매끼리 반주를 해주기도 했어요. 중3 때 언니의 이화여대 실기시험 반주를 해주러 서울에 갔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해요. 그렇게 바이올린과 친해지면서 연습에 재미를 붙였어요. 그리고 어린 나이였지만 연주를 하면 할수록 바이올린 소리가 사람의 목소리와 많이 닮았다는 걸 느낄 수 있었죠.”
어린 시절 그녀의 체격이 조금만 더 컸더라면, 약간 통통한 소녀였더라면, 혹은 미니 사이즈 피아노가 있었다면 지금쯤 피아니스트가 되었을까? 뜻하지 않은 계기로 접한 바이올린이 이후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되리라곤 당시에는 상상도 못했다. 인생의 지도에 찍힌 ‘우연’이라는 ‘점’이 ‘인연’이라는 ‘선’으로 완성되는 신비를 미처 깨닫지 못한 것이다.
바이올린을 배우는 것은 재미있었지만 지방에서는 다양한 정보와 교육을 접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았다. 그러던 중 어느 음악 캠프에 참가한 그녀는 인생에 커다란 영향력을 끼치는 한 사람을 만난다. 바이올리니스트 김남윤이었다. 김남윤 교수는 당시 미국에서 막 귀국해 열정적으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선생님은 제가 가진 기본적인 테크닉에 색을 입혀주셨어요. 선생님이 손을 댄 음악과 대지 않은 음악은 너무나 큰 차이가 났죠. 마치 마법처럼 음악에 빠지도록 해주셨어요.”
서울예고 입학을 목표로 열심히 연습하고 공부한 결과, 그녀는 학교에 입학해 본격적인 음악 공부를 시작할 수 있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김남윤 교수는 제자들에 대한 열정과 사랑이 남달랐다.
“처음엔 선생님이 계신 학교로 대학을 지망하려 했는데 운명인지 고3때 갑자기 선생님이 서울대 교수로 임용되시면서 저도 서울대 음대를 목표로 입시를 준비하게 되었죠.”
동아음악콩쿠르와 이화경향콩쿠르에서 우승하며 음악성을 인정받은 이경선은 그후 서울대에 입학했고 김남윤 교수와의 인연도 계속 이어졌다. 학창 시절 이경선은 비싼 악기 값을 충당하기 위해 학생들을 가르치는 아르바이트도 많이 했다. 경제적인 형편상 대학을 졸업하고 늦게 유학을 갔지만 뚜렷한 목표가 있어기에 타지에서도 자신을 균형감 있게 컨트롤할 수 있었다.
여름의 프레스토, 산 넘어 산
유학 시절의 공부는 음악적으로 그녀를 크게 성장시켰다. 워싱턴 콩쿠르 우승 후 레오폴트 모차르트 콩쿠르·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등 잇따른 국제 콩쿠르 수상 소식이 한국에 전해지며 음악계는 정경화 이후 새로운 바이올리니스트의 탄생을 축하했다. 유럽과 미국 무대에서도 그녀를 찾는 곳이 많았다. 세계적인 명교수와의 만남도 그녀를 새로운 음악세계에 눈뜨게 해주는 계기였다.
“피바디 음악원에서는 실비아 로젠버그 선생님에게 줄리아드 음악원에서는 로버트 만과 도로시 딜레이 선생님에게 배웠어요. 모두 세계적인 명교수였죠. 피바디 음악원의 로젠버그 선생님은 굉장히 무섭기로 유명했는데, 전 그다지 무섭지 않더라고요.(웃음) 문제는 영어였죠. 답답한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었어요.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영어를 잘 못했던 것이 유학 생활에 오히려 도움이 되었던 것 같아요. 선생님들이 가르치실 때 은근히 비꼬면서 야단을 치거나 기분 상하게 하는 경우가 있는데, 전 잘 알아듣지 못하고 표현 그대로 이해했을 수 있거든요. 어쨌든 순수하게 음악을 배우려 했던 저를 선생님들이 많이 예뻐해 주셨고, 지금도 종종 찾아뵙고 있어요.”
로젠버그 교수는 기본기를 굉장히 중시하는 교수로 알려졌는데, 스스로 작곡가가 원하는 소리를 찾기 위해 다양한 문헌을 공부하고 다른 분야의 책들을 상당히 많이 읽는다고 한다. 그녀는 연주할 때 다양한 영감을 얻기 위해 음악 듣기와 공연 관람도 많이 강조했다.
“그야말로 음악을 제대로, 깊고 넓게 알아갈 수 있도록 공부시킨 분이었죠. 굉장히 지적인 분이었고 학생들을 사랑하셨어요. 여러 면에서 제가 스승 복이 많은 사람이에요.”
피바디 음악원을 졸업하고 줄리아드 음악원에 들어갔을 때 뜻밖에 슬럼프가 찾아왔다. 스타 연주자가 많았던 탓에 이름 없는 동양인 연주자라는 위축감이 행복해야 할 학창 시절을 어둡게 했던 것이다.
“당시 길 샤함, 사라 장, 데이비드 김 등 최고 스타 연주자들이 학교에 같이 다니고 있었어요. 자꾸 그들과 비교하면서 내 자신을 평가하게 되고 그러다보니 행복과는 점점 더 멀어지게 되었죠.”
우울한 시절을 보내고 있던 2000년이 되던 해, 우연히 한국에서 특별한 제의가 들어왔다. 당시 해외 무대에서도 인정받고 있었던 실내악단인 금호 현악 4중주단의 단원으로 함께 연주해보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1993년 결성된 금호 4중주단은 당시 우리나라 실내악의 간판스타로 활동해온 프로 실내악단이었다. 독주자 양성을 중시하는 국내 클래식 음악계 풍토에서 실력 있는 연주자들이 모인 앙상블은 실내악의 불모지였던 우리나라에서는 그 자체만으로 오아시스 같은 것이었다.
“금호 현악 4중주단이 뛰어난 연주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보니 여러 이유로 이전에도 단원 교체가 몇 번 있었어요. 그래서 제가 실내악단에 들어갈 때 고(故) 박성용 회장님이 ‘앞으로 단원 교체가 또 한 번 있으면 해체하겠다’고 엄포를 놓기까지 하셨죠. 회장님은 실내악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넘치셨어요. 금호 현악 4중주단은 해외 연주 활동이 많았는데, 당시 해외 평론가들에서도 좋은 평을 받을 만큼 명성이 높았죠. 그때의 음악 활동이 이후 솔로나 앙상블을 연주하는 데 좋은 영향을 주었어요.”
하지만 별 기대없이 지원한 미국 오벌린 음대에 교수로 임용되면서 한국에서의 앙상블 활동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졌다.
“그때를 생각하면 돌아가신 박성용 회장님께 너무나 죄송스러운 마음이에요. 지금 우리나라에 이토록 훌륭한 실내악단이 많이 생겨날 수 있었던 것은 아마 그때 뿌린 씨앗들이 자라 이제 열매를 맺고 있는 거란 생각을 해요. 그분은 기다림을 통해 음악이 얼마나 아름답게 피어날 수 있는지를 아셨던 분이고, 그걸 실천하신 분이었죠.”
한국인이 미국 음대에서 교수가 된 경우가 흔치 않은 시절이었기에 그녀는 한국인으로서 더 열심을 다했다. 물론 어려움도 많았다.
“대학 때부터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은 워낙 익숙했기 때문에 힘들지 않았지만, 그 대상이 외국인이라는 건 쉽지 않았어요. 사고방식이 다르고 이해의 차이도 있어서 여러 모로 섬세한 티칭을 해야 하는 경우엔 스트레스가 되었죠. 언어와 문화의 차이는 생각보다 무척 넘기 어려운 장벽이었어요.”
가을의 안단테, 현재를 사랑하며
연주자로 교육자로, 결혼과 출산까지, 그렇게 미국에서 앞만 보며 열심히 뛰다가도 문득 떠오르는 건 한국에 있는 가족과 친구들이었다. 나이든 부모님과 함께 지내고 싶다는 생각이 늘 떠나지 않았다.
“어린 시절부터 외국에서 있었던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사고가 형성된 후 외국에서 공부하고 활동했던 터라 고향에 대한 향수가 있었어요. 딸아이도 이제 제법 자라서 제 손을 타지 않아도 되었고요. 그러던 차에 운명처럼 서울대에서 교수 임용 공고가 났던 거죠.”
그녀는 기회를 잡았다. 연주와 교육 경험이 많은, 실력 있는 바이올리니스트를 모두 반기며 환영했다.
“기회라는 게 뜻밖에 찾아오는 것 같아요. 한 번도 제가 계획한 시간에 온 적이 없어요. 하지만 가장 좋은 때에 늘 행운이 다가왔죠.”
이경선은 뜻밖의 기회라고 겸허히 말하지만, 늘 성실하게 준비해왔기에 또한 가장 필요한 시간에 행운의 주인공으로 낙점될 수 있었다. 서울대의 경우 학부때 부터 외국에서 공부한 교수가 많아 모교 출신의 실력 있는 교수 임용은 당시 후배들에게도 희망을 안겨주는 소식이었다.
“실망을 주지 않도록 열심히 해야겠다고 다짐하면서 2009년부터 서울대 교수 생활을 시작했어요. 모두가 부러워하는 자리였고 그만큼 영향력이 큰 위치여서 책임감이 많이 느껴졌어요. 그때 처음 만났던 학생들이 이제는 성장해 자신의 음악 세계를 펼치고 있는 모습을 보면 뿌듯하고 외국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마음과는 다른 느낌이죠.”
하지만 제자들을 키워 사회에 내보낼 때는 부모가 된 심정처럼 기대감과 걱정이 교차한다. 사실 서울비르투오지챔버오케스트라가 창단된 배경도 선생으로서 제자들에게 새로운 돌파구를 만들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서울대 학생들로 구성된 앙상블을 다른 곳에서 초청하는 경우가 꽤 있거든요. 그런데 몇 년 전, 그 초청 연주가 중간에 취소된 적이 있어요. 학생들이 실망하는 모습이 하도 속상해, 준비했던 연주를 제가 아는 다른 무대에서 연주할 수 있도록 했죠. 그런데 그 공연 반응이 너무 좋았던 거예요. 저도 그날처럼 순수하게 음악의 세계에 빠져본 경험이 드물었어요. 그리고 그 참에 전문적인 앙상블 단체를 하나 만들어 의미 있는 무대를 이어나가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죠. 2009년 스누투오지 앙상블이 그렇게 탄생했어요.”
그런데 문제는 졸업을 하면 그 학생들이 활동을 이어가기 어려운 상황이 오는 것이었다. 그래서 함께 결성된 단체가 바로 서울비르투오지챔버오케스트라였다. 서울대 졸업생과 젊은 신인 음악가들, 서울시향·인천시향·KBS교향악단의 수석과 부수석 단원들, 그리고 음악대학에 재직 중인 교수들로 구성된 서울비르투오지챔버오케스트라의 창단으로 그녀가 이끄는 실내악단은 규모도 커지고 활동도 더욱 활발해졌다. 2015년 8월 대전실내악축제부터 본격적인 연주를 시작한 서울비르투오지챔버오케스트라는 ‘세상의 모든 사계와 세레나데’라는 타이틀로 봄, 여름, 가을, 겨울에 맞춰 총 4회의 공연 시리즈를 진행했고 태안아트센터, 광주 금호아트홀 등 지방 곳곳에서도 초청을 받아 개성있는 연주로 호평을 받았다. 단원들도 무척 행복해했다.
“서울비르투오지챔버오케스트라는 맑은 소리, 깊고 고급스러운 소리를 추구하고 있어요. 요즘은 화려한 사운드를 지향해 자칫 모이지 않는 소리들로 인해 음색과 음정이 거슬리는 무대가 많은데 저희는 오래오래 함께 시간을 두고 빚은 정갈한 소리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요. 그래서 각 파트별 연습을 무척 중요시하죠. 핑거링과 보잉을 통일하고 소리의 질을 가장 우선해서 연습에 임하고 있어요.”
서울비르투오지챔버오케스트라 결성은 그녀가 이루어낸 도전의 결실이었다. 밑바탕엔 제자들에 대한 애정과 지지가 깔려 있었다. 특히 작년과 올해 해남의 땅끝마을 미황사에서 있었던 연주는 그들에게 잊을 수 없는 무대였다.
“미황사에 ‘괘불제’라는 행사가 있는데, 18세기에 스님들에 의해 그려진 초대형 부처 그림을 일 년에 한 번 불자들과 대중에게 공개하면서 밖에서 해를 보게 하는 행사라고 해요. 그러면서 모든 불자가 한 해의 축복을 비는 불공을 드리며 기도하는 날이죠. 그 행사에 저희 단체가 초청되어 갔었는데, 마침 그 곳이 세월호 사건이 일어난 근처여서 그들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작곡된 김지영씨의 ‘파도의 자장가’라는 곡을 연주했어요. 함께 한 사람들과 단원 모두에게 무척 의미있는 시간이었어요.”
음악적으로 최고 실력을 키우면서 새로운 기획으로 다양한 무대와 사람들을 찾아가는 것. 서울비르투오지챔버오케스트라는 훌륭한 연주로 음악이 주는 감동을 진정성 있게 전하는 것이 최종 목표다. 말은 쉽지만 실현하기 쉽지 않은 일이다.
“단원으로만 활동하다 이제는 전체를 책임지는 입장에서 단체를 이끌다 보니 어렵고 힘든 점도 있어요. 하지만 저는 리더라고 해서 권위적인 관계보다는 서로 성장을 지지해주고 지켜봐주는 관계가 되기를 원해요. 그래서 되도록 젊은 사람들의 생각을 존중해주고 자발적으로 자신들의 음악적인 아이디어를 표현할 수 있도록 팀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어요. 다양한 생각과 경험이 섞여 넓고 깊은 음악을 만들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죠.”
따뜻하고 자상한 성품을 지닌 그녀이지만 음악을 만들어갈 때는 한 치의 양보도 없을 만큼 정확하고 섬세하다. 단원이자 동료인 바이올리니스트 김수현은 그녀가 한 작품을 보는 눈이 무척 넓고 깊다고 말한다.
“어떤 작품을 대하든 굉장히 공부를 많이 하죠. 연주자로서도 워낙 뛰어나, 연주 자체로 전해지는 메시지가 강렬하고 명쾌해요. 그러면서도 단원들의 음악적 의견을 충분히 반영하기 위해 귀를 여는 리더죠. 음악을 전공하면서도 무대에 서기 쉽지 않은 현실에서 서울비르투오지챔버오케스트라의 존재는 분명 의미있다고 생각해요.”
서울비르투오지챔버오케스트라는 정기공연 때마다 베토벤의 바이올린 소나타를 바이올린과 스트링으로 편곡하여 한 악장씩 앙코르로 연주하고 있다. 반응도 좋고 작품을 해석하고 공부할 수 있는 기회여서 앞으로도 시리즈로 계속 연주할 예정이다.
“실내악은 음악을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분야예요. 그런 면에서 이런 오케스트라 경험이 훗날 그 사람이 어느 분야에서 일하게 되든지 음악적으로 많은 도움이 될 테고요. 교육과 직업이 다른 음악전공생들에게도 서울비르투오지챔버오케스트라 활동이 좋은 역할 모델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축제 때마다 빠지지 않고 무대에 서는 이경선은 5월 17일 서울스프링페스티벌에서 모차르트의 오보에 4중주 K370을, 5월 28일 구미의 봄 축제에서 비발디의 사계 중 ‘여름’을 연주한다. 돌아오는 6월 13일에는 예술의전당 IBK챔버홀에서 사랑하는 동료들과 ‘이경선과 친구들’이라는 무대도 갖는다. 이날은 라벨과 쇼송 등 프랑스 음악으로 레퍼토리를 구성했다.
겨울의 아다지오, 사람을 향하여
이경선은 국제 콩쿠르 수상자가 흔치 않던 시절, 한국의 음악성을 세계에 알린 연주자였다. 어느덧 중견이 되어 음악계의 큰 나무가 된 지금, 이제는 그 푸른 잎들이 많은 후배들의 그늘이 되어주고 있다.
“경쟁이 음악을 압도해선 안 되죠. 음악가의 길은 다양해요. 그런데 스타 위주의 자본주의식 마케팅은 예술을 힘들게 공부하고 있는 음악도들을 좌절하게 만들곤 하죠. 많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지금까지 왔지만 성공이라는 건 다른 사람의 평가나 시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 안에 있다는 걸 요즘 더 느껴요.”
그녀는 성공의 가장 중요한 조건을 작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자세라고 말한다. 돌이켜보면 그녀에게 다가온 행운도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게 아니었다. 하루 종일 연습하고 밤에는 아르바이트로 악기 값을 충당하고 익숙지 않은 언어를 밤새워 공부하며 하루하루 쌓은 결과였다.
“제가 확신하는 건 작은 일에 정성을 다하는 사람이 큰일도 잘할 수 있다는 거예요. 성실한 자세는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이 시대에도 변함없이 소중한 가치죠. 그리고 더 중요한 건 ‘사람’인 것 같아요. 모두가 원하는 성공이라는 건 어쩌면 신기루 같은 거죠. 인생에서 나의 기쁨과 슬픔을 진정으로 함께 나눌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다면 그걸로도 충분히 성공한 인생이 아닐까요.”
요즘 그녀는 미래에 대해 많이 생각하고 있다. 클래식 음악계의 성장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도 많이 고민하고 있다.
“연주를 다니다 보면 클래식 음악계를 위해 후원을 하고 싶어도 방법을 모르는 분들이 꽤 있었어요. 그런 기업을 위해서도 문화예술 후원을 통한 지속적인 교류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좋은 방안을 만들어보고 싶어요. 후배들이 좋은 환경 속에서 연주할 수 있도록 사회적인 기반도 마련해 주고 싶고요. 그리고 음악가로서 계속해서 좋은 연주도 해야겠죠. 그동안 해왔던 베토벤·브람스의 작품은 물론 프랑스·스페인 음악과 같은 색채가 다양한 작품, 그리고 우리 시대의 현대음악도 관심을 갖고 꾸준히 무대에 올리고 싶어요.”
음악은 물과 같은 존재. 그녀는 물처럼 맑고 순수한 음악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치유할 수 있다고 믿는다.
“연주자와 청중이 함께 힐링이 되는 시간을 공유할 때 진정한 음악의 존재 가치가 부여될 수 있을 거예요. 물론 하나밖에 없는 딸에게도 엄마로서 좋은 추억을 많이 남겨주고 싶어요. 딸은 미술을 전공하다 지금은 뉴욕대학교에서 영화를 전공하고 있는데, 굉장히 창의적인 아이예요.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찾아 열심히 사는 모습을 보면 흐뭇하죠.”
무대와 교단에서 많은 결실을 거두며 인생의 풍요로운 가을을 한창 보내고 있는 그녀. 언젠가 이 풍성한 계절이 지나면 맞게 될 겨울은 화려한 것들이 다 가라앉은 맑고 고요한 시간일 것이다. 이경선은 지금 그 아름다운 시간을 기다린다.
“나이 든 연주자의 무대를 지켜보는 것처럼 감동적인 순간이 없는 것 같아요. 여든이 넘은 노장 피아니스트 호로비츠가 연주하는 슈베르트 소나타를 들은 적이 있는데 문득 나도 먼 훗날 저런 연주를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연주가 삶을 닮아간다는 것은 그런 면에서 두렵기도 하고 설레기도 해요.”
인생은 계획대로 흘러가진 않지만 겸허한 마음으로 온전히 자신을 바치는 사람을 결코 외면하지 않는다. 믿음은 언제나 우리를 폭풍우가 몰아치는 인생의 갑판으로 나아가게 한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친구가 했던 이야기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나요. 우린 너무 늦었다고요. 전 그때 ‘뭐가 늦었다는 거야?’ 하고 속으로 반문했어요. 우리 삶에 늦었다는 건 없어요. 인생의 시간표는 내 자신이 만드는 것일 뿐 세상이 만드는 게 아니니까요. 자신의 지금 계절을 사랑하는 사람이 앞으로 다가올 계절도 온전히 누릴 수 있겠죠. 늘 연주하는 ‘사계’ 속에 단 한번 뿐인 인생의 그 찬란함이 담겨졌으면 해요.”
어느덧 계절이 새로운 시간을 향해 채색되고 있다. 저마다 다른 계절을 사는 우리. 자연은 우리가 어느 계절에 있든 매순간 사계의 아름다움 속으로 인도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필요로 하고 원하는 일이 모두 지금 여기에, 이 부족한 풍요 속에 있음을 깨닫는 순간 우리를 둘러싼 아름다움은 매일 다시 태어날 것이다. 이제 찬란한 5월의 ‘사계’를 들을 시간이다.
사진 박진호(studio Bo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