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통과 실험이 공존하는 프랑스 아베누아 하프 페스티벌 현장을 둘러보았다
정통과 실험이 공존하는 프랑스 아베누아 하프 페스티벌 현장을 둘러보았다
오늘날 음악 사회에서 하프가 지니고 있는 위치는 여러 면에서 상징적이다. 강렬한 소리를 내지 못하는 하프는 점점 주류에서 밀려나는 악기 가운데 하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피아노는 시간이 흐를수록 소위 악기의 왕으로서 자리를 더욱 굳건히 지켜나가는 반면, 하프에는 피아노가 지니고 있는 강렬함이 없다. 하지만 피아노가 악기의 왕 자리를 지킬 수 있는 이유는 섬세함 때문이라기보다는, 웅장함과 화려함 때문일 것이다.
물론 사람들은 빠르고 화려한 악장에 더 쉽게 환호한다. 그러나 음악적으로는 내용과 음색이 있는 피아니시모의 소리를 만들어내는 것이 강렬한 포르티시모를 만들어내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렵다.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아름답고 감동적인 악장은 대부분 느린 악장이다. 정말로 깊은 음악은 느린 악장에서, 음과 음의 공간이 넓고 깊어지는 데서 만들어진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하프는 진정으로 내적인 악기라 할 수 있다. 손가락으로 직접 현을 뜯어 울림을 만들어내는 하프는, 하나의 심장에서 다른 하나의 심장에 직접 호소할 수 있는 소리를 만든다.
올해 22회를 맞이한 아베누아 하프 페스티벌(Festival International Harpe en Avesnois)은 하프의 이러한 특성을 되살리는 역할을 하는 동시에, 하프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시도하는 실험의 장이기도 하다. 페스티벌을 기획하는 대표인 장 듀프리는 열정적인 음악 애호가다. 그는 소아과 의사이자 아마추어 피아니스트로, 청소년 시절부터 하프에 대한 사랑을 시작했다. 또한 그는 음악의 창작 정신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이는 자연스럽게 현대음악과 새로운 곡들을 위촉하는 것으로 이어져서, 아베누아 하프 페스티벌에서는 매년 세계 초연이 이루어지고 있다. 오늘날 수많은 음악 페스티벌이 연주자들의 명성에 의존하는 다소 손쉽고, 경직된 방향으로 흐르고 있는 것을 고려하면 음악에 대한 듀프리의 생각과 이 페스티벌이 지니고 있는 가치를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아베누아 페스티벌, 2월의 모습
첫날 2월 26일에는 하프와 비올라의 만남이 있었다. 하피스트 아나이스 고드마르와 비올리스트 에마뉘엘 프랑수아가 슈베르트의 ‘아르페지오네 소나타’와 벤저민 브리튼의 ‘눈물(Lachrymae)’ 등을 들려주었다. 하프를 위해 피아노 파트를 편곡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음악적인 부분을 ‘어떻게 살려내는가’는 쉽지 않다. 이날 슈베르트 ‘아르페지오네 소나타’ 편곡은 그다지 성공적이진 못했지만, 브리튼의 ‘눈물’은 편곡과 연주 모두 매우 좋았다. 에마뉘엘 프랑수아는 정말로 다채로운 음색으로 마음을 사로잡는 연주를 들려주었고, 하피스트인 아나이스 고드마르 역시 클라우디오 아바도, 에마뉘엘 크리빈과 같은 지휘자들과 함께 작업해온 폭넓은 음악적 역량을 보여줬다.
페스티벌 둘째 날인 2월 27일에는 켈트 음악을 연주하는 하프 앙상블의 공연이 있었다. 하피스트 재닛 하비슨은 켈트 하프를 연주하는 세 명의 젊은 연주자와 소프라노 한 명, 그리고 무용수 한 명으로 앙상블을 구성해 인간적이면서도 매우 흥겨운 공연을 만들어냈다. 영국 태생 음악가인 재닛 하비슨은 서투른 프랑스어로 자신의 삶을 관객들과 나누고, 연주 도중 영국식 농담을 던지곤 했는데, 그의 조금은 엇나간 듯한 독특한 유머 감각으로 매번 프랑스 청중을 웃기는 데 성공했다. 이날 연주회는 일찌감치 매진되었는데, 프랑스에서 켈트 음악에 대한 일반인의 애정과 열정은 단순히 유행 수준을 넘어서 조금 부정적인 관점에서는 지나치게 상업화되었다고도 말할 수 있다. 아무튼 이들은 자신들이 연주하는 모든 음악을 악보 없이 연주했다. 심지어 소프라노가 부르는 노래를 반주할 때에도 악보가 없었다. 켈트 음악은 특성상 일정한 화음의 반복으로 곡이 구성되기에, 암보 혹은 처음부터 악보 없이 익히는 것이 아주 어려운 일은 아닌 듯하지만, 하비슨이 리더가 되는 네 명의 하피스트는 완벽한 앙상블로 연주를 하기 위해 그래도 제법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야 했을 것이다.
2월 28일 셋째 날에는 테너 새뮤얼 보든이 하피스트 이리 토로시앙과 영국·프랑스 작곡가들의 작품들을 들려주어, 관객으로부터 매우 큰 박수를 받았다. 아베누아 하프 페스티벌은 프랑스의 대표적인 작곡가 가운데 한 사람인 필리프 에르상에게 이 두 명의 음악가를 위한 ‘블레이크 노래(Blake Songs)’를 위촉했고, 이날 세계 초연되었다. 페스티벌은 매년 최소 한 곡의 작품을 세계 초연하는 것을 자신들의 중요한 음악적 정체성으로 여기는데, 올해도 이 신념은 지켜졌다. 한편 또 다른 페스티벌의 전통인 마스터 클래스도 젊은 연주자들을 위한 하피스트 플로랑스 시트럭의 프로그램으로 채워졌다.
잔잔한 진동이 주는 아름다움
개인적으로 하프만의 매력은 현들을 아무런 중간 매체 없이 직접 손가락으로 뜯고 튕기는 것에 있다고 생각한다. 손가락에 의해 진동하는 현들은 공기 중으로 직접 울려 퍼져나간다. 강렬하지는 않지만 현들의 파장은 공기를 울리고, 이 울림은 다른 어떤 것보다 우리에게 가장 자연스러운 파장이라 할 수 있다. 하프에 관한 회화나 조각이 수없이 많이 존재하는 것도 결코 우연은 아니다. 한 예로 파리 페르 라세스 공동묘지에 있는 쇼팽의 무덤에는 천사가 현이 모두 끊긴 하프를 안은 채 고개를 떨군 조각상이 있다. 쇼팽의 죽음으로 인한 손실을 시적 상징을 통해 아름답고 감동적으로 표현한 작품이기는 하지만, 어쩌면 이는 우리 인간 모두에게 해당하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죽음은 우리 내면의 진동과 울림이 멈추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주 작은 생각 하나가 미치는 파장으로 감정과 기분 전체가 순식간에 바뀔 수 있는 존재다. 하프라는 악기와 우리의 존재는 이러한 관점에서 유사하다. 매일 같이 조율을 하고, 적절한 음을 적절한 방식으로 울릴 때 하프는 가장 아름다운 소리를 만들어낸다.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부정적이거나 공격적으로 가지지 않고, 수용하는 방식으로 가지는 것은 하프의 줄들을 가지런히 조율하는 것에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수많은 생각은 바로 이 조율된 음들을 어떤 방식으로 연주할지 선택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조율되지 않는 현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아름다울 수 없다. 또한 아무리 정확하게 조율돼 있더라도 거친 손길로 연주한다면, 역시 마찬가지로 아름다운 연주가 만들어질 수 없다. 몸과 영혼을 조율하고, 빛에 근접하는 아름답고 다채로운 생각을 간직한다면 우리의 몸은 어쩌면 음악처럼 아름답게 빛날 수도 있지 않을까란 생각을 아베누아 하프 페스티벌에서 해보았다.
사진 Festival International Harpe en Avesnoi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