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린스키 발레, 미하일로프스키 발레와 함께 백야의 도시를 발레 성지로 일구는 상트페테르부르크 발레 시어터(이하 SPBT)가 지난해 ‘백조의 호수’ ‘라 바야데르’로 흥행했던 런던 콜리세움에 1 년 만에 돌아왔다. 작품명은 ‘그녀의 이름은 카르멘이었다(Her Name Was Carmen)’로 발레단의 간판, 이리나 콜레스니코바가 8월 25일부터 28일까지 전 공연의 주역을 맡았다.
발레 소재로서 ‘카르멘’은 명망 있는 안무가들의 단골작이다. 멀게는 롤랑 프티·알베르토 알롱소·존 크랑코·마츠 에크가, 최근에는 카를로스 아코스타가 지난해 로열 발레 은퇴작으로 자신이 안무한 ‘카르멘’을 올렸다. ‘그녀의 이름은 카르멘이었다’는 독일 유학 후 벨라루스 국립 오페라 발레 안무가로 활동 중인 1980년생 올가 코스텔이 맡았다.
1980년 상트페테르부르크 태생인 콜레스니코바는 1998년 바가노바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2002년 페름 콩쿠르에서 준우승했다. 바가노바 아카데미에선 김지영(국립발레단)보다 두 학년 아래였고, 이리나 페렌(미하일로프스키 발레), 안톤 코르사코프(마린스키 발레)와 동기다. 볼쇼이 발레와 마린스키 발레 오디션에 탈락한 사실을 본인이 여러 차례 서방 언론에 밝혔다.
SPBT는 전직 소련군 장교 출신의 여행업계 CEO 콘스탄틴 타츠킨이 1994년에 설립한 단체로 본토에서의 활동뿐 아니라 2000년대부터 활발하게 외국 투어를 나가고 있다. 타츠킨은 영국과 일본을 거래처로 색다른 러시안 클래식을 원하는 수요에 맞춰 투어를 조율하지만, 결국 자신과 부부의 연을 맺은 콜레스니코바가 주역을 전담하는 모양새다.
콜레스니코바에게 런던은 영광과 슬픔을 함께 안겨준 도시다. 2005년 로열 앨버트홀 원형 무대 버전의 ‘백조의 호수’로 영국 내셔널 댄스 어워드 최우수 후보로 꼽히며 스타덤에 올랐지만, 2년 후 같은 공연을 준비하다가 유산을 경험했다. 전후 사정을 모르는 런던 비평가들의 따가운 비판이 뒤따랐고, 콜레스니코바는 “모든 공격에 초연하다”고 ‘데일리메일’지와 인터뷰했다.
지난해 가을부터 ‘카르멘’의 개작을 구상하던 콜레스니코바는 지난 4월 국제 구호단체 옥스팜을 통해 마케도니아와 세르비아의 난민촌을 나흘간 방문했고 그곳에서 받은 충격과 연민을 작품 설계에 응용했다. 난민 캠프가 공간적 배경이 되었고, 난민촌 경비대장 호세와 인신매매범 가르시아가 카르멘을 사이에 둔 연적으로 분했다.
결과적으로 SPBT의 컨템퍼러리는 클래식 발레에서 거둬온 성과와 비교해 큰 차이를 드러냈다. 발칸의 난민 문제를 발레로 그릴 때 어떤 한계가 드러나는지에 관한 교과서 같았다. 인권과 관련된 특수한 현실을 발레에 투과하는 방식이 현대물로 보기 어려울 만큼 고루했다. 극 중 난민을 담당하는 군무진이 서로 몸을 비틀면서 자아내는 비둘기의 날갯짓이 평화를 희구(希求)하는 몸부림이라는 식이다.
올가 코스텔의 아마추어적 안무는 주역의 몸을 다루는 방식에서도 마찰을 일으켰다. 173㎝의 신체를 장점으로 활용하는 의도가 지나치다 보니 파트너들은 늘 카르멘의 허벅지에 유린당하는 연약한 존재로 구현되었다. 선정성이 물씬한 성애 장면이 이어지다가 캠프 현실에 신음하는 난민의 삶이 이어지는 구성은 근래 런던에서 보기 어려운 전개였다. ‘가디언’지는 “충격적으로 부적절하다”, ‘타임’은 “안무가 힘겨웠고, 잔뜩 긴장됐다”면서 별 하나를 매겼다.
SPBT는 콜레스니코바 은퇴 이후에도 지속 가능한 발전을 이룰 수 있는가. 콜레스니코바는 ‘안나 카레니나’로 다시 런던을 찾고 싶다 했지만, 그녀의 사진이 작품 해설보다 먼저 등장하는 프로그램북 제작과 같은 관행이 앞으로도 컴퍼니에 만연하다면, 이 단체의 미래는 정해진 것이다.
사진 Foteini Christofilopoulo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