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뷔시 서거 100주년-3 드뷔시 스페셜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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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8년 2월 10일 4:40 오후

발터 기제킹

 

 

 

 

 

 

 

 

 

 

 

 

 

 

 

 

 

프랑스의 인상주의 음악은 낭만주의 음악에 대한 반발에서 나타나게 되었다. 학창시절의 드뷔시는 당시 팽배했던 바그너의 음악에 심취해 있었지만, 이후 관현악과 성악이 끊임없이 전개되고 음악과 시가 강제적으로 설명을 거듭하는 그의 음악에 중압감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시도에 대한 반향으로 다분히 독일적이고 표제음악적인 바그너 음악과는 다른, 순수음악적이고 프랑스적 음악인 ‘인상주의 음악’을 만들어내게 된다. 드뷔시의 음악은 마치 세포가 분열하는 것과 같은, ‘형태적 방식(formulations morphologiques)’이라는 창의적인 표현방식을 색채적인 관현악법을 통해 구사하고 있다.

‘형태적 방식’의 특징은 특정한 선율이 곡의 근본이 되지 않으며, 순간적으로 유동하는 인상이 음악의 기본을 이룬다는 것이다. 드뷔시는 구름·바람·냄새와 같은 움직이는 대상의 순간적 인상을 음악에 담으려 했고, 선율의 움직임이나 운동성보다 음색의 미묘한 변화를 음악을 통해 그려내고자 했다. 특히 드뷔시는 인상파 화가들과 상징주의 문학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프랑스어의 부드러운 억양과 운율, 리듬과 문장의 유연하고 불균형적인 짜임새 등등과 같은 성질을 음악의 멜로디·화성·리듬·음색·형식 등의 모든 면에 적용하고자 했다. 특히 인상주의 음악의 중요한 요소인 색채와 효과가 환기하는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어내기 위해, 전통적인 장단조의 조성과 기능에서 벗어나 비기능적인 화성을 사용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러한 음악적 특성은 드뷔시 이후 음악가들이 표현하고 실천해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음악적 테제로 자리 잡게 되었다.

 


피아노 음악을 중심으로

드뷔시는 다양한 장르에 걸쳐 중요한 작품을 남겼는데, 레코딩을 통한 연주사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야 하는 장르는 바로 ‘피아노’다. 드뷔시 자신이 훌륭한 피아니스트였을 뿐만 아니라 음악사적으로도 이정표가 될 수 있는 중요한 작품이 바로 피아노 작품에서 비롯했기 때문이다. 드뷔시는 레코딩 산업이 막 시작하는 21세기 초반인 1918년에 서거한 만큼 많은 양의 녹음을 남길 수 없었다. 1904년 그는 스코틀랜드 출신의 소프라노로서 자신의 유일한 오페라 ‘펠리아스와 멜리장드’ 초연에서 주연을 맡은 메리 가든의 반주자로 나서서 멜리장드의 아리아 한 곡과 초기 가곡인 ‘잊혀진 노래’ 가운데 세 곡을 어쿠스틱 레코딩으로 남긴 바 있다. 그러나 당시 녹음 기술이 너무 열악했던 터라 더 이상의 어쿠스틱 레코딩은 남기지 않았고, 이후 1913년 말경에 벨테 미뇽(자동재생 피아노)을 통해 자신의 대표적인 피아노 작품 14곡을 피아노 롤로 남겼다. 작곡가는 이 피아노 재생 시스템에 크게 만족했고, 이는 드뷔시 작품을 해석하기 위한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이후 레코딩 산업이 부흥하면서 당대 프랑스를 대표하는 많은 피아니스트가 드뷔시의 작품을 녹음하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 가장 돋보이는 연주자는 단연 알프레드 코르토. 그는 네 차례의 ‘어린이 차지’ 녹음과 세 차례의 전주곡 1권, 자크 티보와의 바이올린 소나타 녹음만을 남긴 바 있다. 작품의 스펙트럼에 있어서는 제한적이긴 하나 동료이자 선배로서 같은 시대를 향유했던 드뷔시의 음악을 가장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던 연주자라고 말할 수 있다. 한편 코르토와 함께 파리 음악원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전문 연주자로 활동했던 동시대 피아니스트들, 즉 이시도르 필리프(Isidor Philipp), 마르그리트 롱(Marguerite Long), 라자레 레비(Lazare Lévy) 또한 드뷔시 연주사의 시작을 연 중요한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만 이들의 레코딩은 대단히 적고 드뷔시 녹음 또한 드물다는 것이 단점.

 


유럽의 스페셜리스트

드뷔시 피아노 연주사에 있어서 최초의 ‘스페셜리스트’라고 부를 수 있는 연주자는 역설적이게도 프랑스가 아니라 독일에서 나왔다. 그 인물은 바로 발터 기제킹(Walter Gieseking)으로, 1950년대 초 레코드 산업이 가장 활발하게 성장한 영국의 컬럼비아 레이블에서 드뷔시 전곡을 녹음했다. 당시로써 가장 완벽한 테크닉과 환상적인 톤 컬러를 구사하며 현대적인 피아니즘의 선봉에 섰던 그는 독일인으로서 프랑스 음악을 프랑스인보다 더 자연스럽고 완전하게 구현했던 피아니스트였다. 그런 까닭에 지금까지도 그의 연주는 타의 귀감이 되며 시들지 않는 생명력을 발산하고 있다.

한편 프랑스인으로서는 1950년대 중반에 로베르 카자드쉬(Robert Casadesus)가 미국 컬럼비아에서 전곡 레코딩을 남겼다. 그리고 카자드쉬와 비슷한 연배로서 2차 세계대전 이후 프랑스 내에서 활동하던 다른 많은 피아니스트, 즉 이본 르페뷔르(Yvonne Lefébure), 마르셀 마이어(Marcelle Meyer), 제르망 티셍 발랑탱(Germaine Thyssens-Valentin), 블라도 페를뮈테르(Vlado Perlemuter), 루세트 데스카브스(Lucette Descaves), 렐리아 구쇼(Lelia Gousseau) 등도 드뷔시 연주에 있어서 일가견을 보여준 피아니스트들이지만 레코딩은 지극히 제한적이었던 탓에 아쉬움을 남긴다. 자크 페브리에(Jacques Fevrier)와 상송 프랑수아(Samson François), 알도 치콜리니(Aldo Ciccolini) 등은 전곡 녹음을 남기며 20세기 중반 프랑스 피아니즘의 자존심을 지켰다. 기제킹의 제자인 독일 피아니스트 베르너 하스(Werner Haas) 또한 훌륭한 드뷔시 스페셜리스트로 평가받는다.

 


20세기, 프랑스 피아니스트의 전성기가 열리다

장 에프랑 바부제

 

 

 

 

 

 

 

 

 

 

 

 

20세기 후반을 대표하는 가장 강력한 드뷔시 스페셜리스트로는 이탈리아 출신의 아르투로 베네데티 미켈란젤리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더 이상의 완벽한 피아노 음은 없다고 단언하는 듯한 결벽증적이고 완벽주의적인 사운드와 컨트롤을 통해 비프랑스적이지만 지극히 드뷔시적이며, 그 자체로 피아노 음악의 새로운 출발점이라고 여겨질 만큼 독창적이고 혁신적인 드뷔시 연주를 역사에 남겼다. 그와 비슷하게 드뷔시 전곡을 녹음해 남기거나 주요하게 다루는 피아니스트는 아니지만, 음반을 통해 드뷔시의 새로운 지평을 연 피아니스트들도 있다. 전주곡 전곡을 녹음한 크리스티안 지메르만과 연습곡을 녹음한 피에르 로랑 에마르도 중요한 드뷔시 연주자로 평가할 수 있다.

이후 프랑스 피아니스트들의 전성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리며 많은 연주자가 드뷔시 스페셜리스트로서 기염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파스칼 로제 장 이브 티보데, 장 에프랑 바부제, 미셸 베로프, 장 필립 콜라르, 알랭 플라네(Alain Planès), 프랑수아 샤플랭(François Chaplin) 등이 대표적인 피아니스트들로 제각기 새로운 감수성과 개성 넘치는 음악성을 선보이며 드뷔시 음악을 풍요롭게 만들었다. 그리고 아직 드뷔시 전집을 녹음하지는 않은 알렉상드르 타로와 베르트랑 샤마유와 같은 젊은 프랑스 피아니스트들 또한 예정된 드뷔시 스페셜리스트로서 손색이 없다.

 

글 박제성(음악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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