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투, 아름다운 투쟁-1

Special Feature- #METOO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8년 4월 1일 12:00 오전

2018년 문화예술계 미투 운동 일지

 

막혔던 둑이 터졌다. 곳곳에서 이야기가 쏟아진다. 참담하지만, 꼭 들어야 하는 이야기들이다.

2017년 10월 미국 할리우드의 영화제작자 하비 와인스타인의 성폭력을 고발하면서 시작된 ‘미투(#MeToo)’ 운동은 2018년 1월 29일 서지현 검사의 검찰 내 성추행 폭로를 기점으로 한국에 상륙했다. 연희단거리패 전 예술감독 이윤택을 시작으로 연출가와 배우, 대학교수 등 예술계 전반의 성폭력을 고발하고 있는 ‘미투’ 운동은 이제 정치계를 비롯한 사회 전반으로 퍼지고 있다.

‘객석’은 특별기획을 통해 공연예술계를 휩쓸고 있는 ‘미투’의 물결을 다룬다. 먼저 예술계 ‘미투’ 운동의 기록을 되짚는다. 건조한 나열이지만 긴박했던 하루하루가 타임라인에서 느껴진다. 공연예술계의 성폭력에 대한 구조적 진단과 대책을 논의하며 ‘미투’를 기점으로 변화될 것들을 생각한다. 예술작품에 대한 이야기 역시 중요하다. 공연예술계의 성평등 문제에 대한 단초로서 작품 속 젠더 균형을 논한다.

‘미투’ 운동은 용기의 연대다. 자신과 같은 피해자가 앞으로는 생기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서 용기를 내어 고백하고, 누군가는 그 고백에 용기를 얻어 ‘미투’에 동참한다. 그렇게 하나둘 합류해, 이 연대는 어느새 거대한 파도가 되었다. 이 물결은 생각보다 크게, 오래 지속될 것이다. 쓰라린 고백으로 이뤄지는 ‘미투(美鬪)’는 결국 아름다운 투쟁이다.

덧붙여, 우리나라의 많은 언론이 ‘미투’를 ‘나도 당했다’로 번역하는데, 피해자의 입장에서(모두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로) 결코 좋은 표현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도 겪었다’ 혹은 ‘나도 고백한다’로 표기할 것을 제안한다.

 

(*3월 18일까지의 상황을 정리하였음을 밝힙니다.)

 

 


악의 연대를 끊어낼 시간

 

 

‘공연예술계 성폭력 문제’의 원인과 대책

“(이윤택의 호출을 받으면)안 갈 수 없었다. 그 당시 그는 내가 속한 세상의 왕이었다.”
-이윤택 前 연희단거리패 감독의 성추행을 고발한 연출가 김수희의 글 中

“누구도 끊어 낼 수 없었던 권위주의 문화와 위계에 의한 폭력, 그리고 모든 성차별과 성폭력 문제까지, 이러한 폐단의 고리를 끊어내고자, 우리는 모이고 연대하고자 합니다. 함께 하겠습니다. (…) 우리는 권위가 아닌 수평적인 구조에서 서로를 바라볼 것입니다. 더 이상 성폭력 및 위계에 의한 폭력으로 고통 받고, 연극을 떠나는 피해자가 발생하지 않도록 함께 행동하겠습니다.”
-2018년 2월 22일 ‘성폭력 반대 연극인 행동’ 출범 선언문 中

 

 

누구나 알지만 아무도 몰랐던 것. 예술계 내 성폭력 문제가 ‘미투(#MeToo)’ 운동을 통해 수면 위로 떠 올랐다. 이를 설명해줄 중심어들을 위의 문장들에서 발견할 수 있다. ‘권위적인 위계’로 인한 ‘폭력’이 그것이다. 안개처럼 드리운 악령의 실체가 드러난 지금, 과연 우리는 그것을 제대로 인지하고 있는지, 그것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 고민해야 할 때다.

 


돈과 권력, 벗어날 수 없는 구조

여태까지 밝혀진 여러 비극적인 사건은, 가해자들의 개인적 악행이라고 하기에는 서로 너무나 비슷하게 닮아있다. [원로, 단체의 대표, 학과의 교수]인 가해자와 [나이 어린 배우 혹은 학생]인 피해자. 결국, 이 문제는 그들이 공통적으로 발을 딛고 있는 구조에 기인한다고 볼 수밖에 없다.

‘불안정한 고용과 그에 따른 경제적 어려움’은 공연예술계의 가장 취약한 점이자 권력이 교묘하게 작용하는 구조적 원리다. ‘미투’ 폭풍의 중심에 있는 연극계의 경우를 보자. 문화체육관광부가 2015년 실시한 ‘예술인 실태조사’에서 밝혀진 연극인의 평균 연소득은 1285만원이었다. 스타 배우를 제외한 대부분의 연극인들이 최저생계비 수준의 돈으로 연명하는 상황에서, 극단에 들어가 일자리를 가지는 것은 개인에게 소중한 기회다. 극단 대표와 연출가 및 발언권이 강한 고참 선배 등이 극단 내 인사권과 캐스팅 권한을 가지며, 자연히 이들이 행하는 성폭력 및 각종 위계폭력에 피해를 입고도 피해자들은 침묵할 수밖에 없다.

국악과 무용 등 도제식 수업 방식이 보편화된 다른 예술계 역시 사정은 비슷하다. 앞서 언급한 ‘예술인 실태조사’ 속 국악인의 1년 평균 수입은 1163만원, 무용인은 861만원이었다. 연극계와 마찬가지로, 산업적으로 탄탄하지 못한 공연시장 속에서 ‘양질의 일자리’는 드물다. 한정된 일자리와 공연 기회는 학연을 기초로 한 인맥에 좌우되곤 한다. 선생님, 나아가 ‘선생님의 선생님’으로까지 이어지는 공고한 카르텔 속에서 위계권력은 자연스럽게 형성된다.

“‘미투’ 운동은 결국 위계폭력에 대한 고발”이라고 공연예술계 현장의 사람들은 입을 모은다. 위계폭력의 문제는 과거부터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2017년 8월 열린 공개토론회 ‘연극학과 및 연극계 위계 문화 개선을 위한 대학로 엑스포럼’에서는 연극계 교수의 ‘갑질’ 의혹과 ‘학생 창작물 강탈’ 문제 등을 다룬 바 있다. ‘연극인들의 자기반성과 고백이 필요하다’ ‘우리 모두 가해자이자 피해자이며 방관자’라던 현장의 목소리는 지금의 사태와 많이 닮아 있다.

 


잃어버렸던 가치, 민주주의

권위주의 문화는 공연 제작 환경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폐쇄적이고 수직적인 극단일수록 연출가의 디렉션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질문을 건네기 어렵다. ‘배우는 연출가의 마리오네트에 불과하다’는 배우들의 자조 섞인 고백도 흔하다. 선배 연극인의 경력과 연륜이 순기능적으로 작동하지 않고 일방적인 억압으로 표현되는 경우도 많다. 최근 젊은 연극인들끼리 공동창작 형태로 작품을 제작하는 경우 비교적 수평적인 의사소통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고무적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많은 극단은 ‘예술가 대 예술가’의 상호 동등한 입장이 아닌, 상하주종관계를 바탕으로 복종을 요구하는 것이 현실이다.

성폭력 피해자들의 고백이 쏟아지던 2월 중순, 100명이 넘는 연극인들이 비좁은 극장에 모여 앉아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눴다. 이 모임을 통해 ‘성폭력 반대 연극인 행동(이하 성반연)’이 결성됐다. 피해자 보호와 연극계의 자정을 주장하는 ‘성반연’의 지향점은 수평과 연대, ‘느리더라도 옳은 길’이다.

‘성반연’ 모임의 원칙 중 하나는 ‘남의 말 끊지 않기’다. 이는 실무진회의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때문에 정기모임이든 실무회의든 네다섯 시간은 예사로 넘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서두르지 않는다. 위계폭력의 근저에는 수직적인 조직문화가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성반연’은 인지하고 있다. 위계폭력은 곧 민주주의의 실패다. 이들은 그 실패를 다시 반복하지 않기 위해 조심스럽게 움직이고 있다. 서면 인터뷰의 답변 작성에도 오랜 시간 머리를 맞대어 고민한다. 의견이 서로 다르면 합의를 볼 때까지 천천히 대화한다. 밖에서는 재촉하지만, ‘성반연’은 그들의 페이스를 유지한다. 자신들의 발언 하나하나가 연극계와 사회 전반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절차적으로도 결과적으로도 최대한 수평적인 방식을 선택한다. 그동안 집단 논리에 묻혀 삭제됐던 개인의 목소리가 다시 지워지지 않도록 말이다.

 


이제는 ‘미투’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앞으로 어떻게 나아갈 것인가이다. ‘성반연’의 운영진으로 활동하는 배우 홍예원은 ‘파일 불법 공유와 저작권’ 이슈를 예로 들며 문제 해결의 희망을 이야기했다. 2000년대 초, 영상물과 음원 불법 공유는 전혀 거리낌 없는 일이었다. ‘제 돈 주고 사는 사람이 바보’라는 생각이 만연했고, 저작권에 대한 인식은 ‘샌님 같은 소리’ 취급을 받았다. 창작자의 권리를 고민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십수 년이 흐른 지금, 사람들의 인식은 확연히 달라졌다. 저작권을 보호하는 방향으로 법이 강화됐고, ‘소리바다’와 같은 당시 대표적인 파일공유 사이트들을 유료 이용으로 전환하는 등 강력한 조치가 이뤄졌다. 여러 해에 걸친 사회적 캠페인과 일상에서의 크고 작은 계도 교육은 시민 의식 변화에 기여했다(영화관에서 ‘굿 다운로더’ 캠페인 광고를 한 번쯤 본 적 있을 것이다). 물론 아직도 ‘어둠의 경로’로 불법 공유를 하는 사람들이 존재하지만, 적어도 그것이 더 이상 떳떳한 일은 아니라는 것이 대중의 기본 인식으로 자리 잡았다. 더 나아가, 온라인 음원 수익에서 음악창작자에게 돌아가는 몫이 터무니없이 적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시대가 됐다. 생각의 기준값, 이른바 ‘디폴트(default)’가 바뀐 것이다. 이번 ‘미투’ 운동으로 인한 변화도 작지만 분명히 감지되고 있다. 적어도, 술자리에서 성희롱적 발언을 들었을 때 ‘그건 옳지 않다’고-농담으로나마- 말할 수 있게 됐다. 적어도, 본인의 언행에 문제가 없었는지 한 번쯤 돌아볼 수 있는 계기의 단초가 마련되기 시작했다.

단단하고 오래된 악의 고리를 끊기 위해서는 우선 가해자에 대한 엄중한 처벌이 약속되어야 한다. 수 년 혹은 수십 년 동안 피해자들이 입을 다물어 왔던 이유는, 피해 사실을 이야기해도 가해자에게 응당한 처벌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피해자가 가장 두려워하는 일은 가해자와 같은 공간에서 다시 마주하는 것이다. 그동안은 위계폭력이 일어나도 가해자가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피해자는 직업과 자아실현을 포기한 채 그 자리에서 떠나는 걸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가해자들이 명확한 처벌을 받는 선례를 만드는 것이 중요한 이유다.

피해자에 대한 보호와 지원 역시 필요하다. 유명한 가해자가 아니라서, 끔찍한 수준의 성폭력이 아니라서 폭로하지 못하는 피해자들이 여전히 많다. 일상에 존재하는 미세한 폭력들에도 세심하게 반응해야 한다. 특히 공연 현장의 독특한 구조와 업무 환경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피해자를 이해하는 시선이 필요하다. ‘성반연’은 ‘미투’ 운동 초기부터 연극인 출신 전문상담사가 피해자 긴급상담을 진행해왔다. 문화체육관광부는 3월 12일부터 월 19일까지 100일간 ‘문화예술계 성폭력 특별 신고·상담센터’를 운영하며, 피해상담과 신고 및 법률지원 등이 가능하다.

결국 중요한 것은 문화와 인식의 변화다. 세월호와 촛불을 거치며 시민사회는 ‘가만히 있으라’는 명령에 대한 절대복종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행동으로 사회를 변화시킨 경험이 있는 사람들에게 ‘미투’는 또 다른 계기로 작용한다. ‘미투’ 운동으로 알려진 성폭력은 결국 잘못된 권력이 휘두른 저열한 폭력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 모두 누군가의 윗사람이자 누군가보다는 아랫사람이다. 즉 누구든 가해자가 될 수도, 피해자가 될 수 있다. 가해자를 묵인하지 말고, 피해자를 외면하지 말고, 방종한 권력을 방관하지 말자. 이것은 더 이상 개인의 일이 아니다.

 


최근 영국 사회 역시 ‘미투’ 운동으로 진통과 자정을 겪고 있다. 런던의 유서 깊은 극장인 로열 코트 극장(Royal Court Theatre)는 2017년 10월, ‘성폭력 및 권력 남용을 방지하는 행동 지침(Code of Behavior: preventing sexual harassment and abuses of power)’을 발표했다. 지침은 [1)책임 2)보고 3)인식 고취 및 자각하기 4)적용 범위 5)양식과 패턴]의 5가지 영역으로 구성됐다. 본 지침의 일부를 소개한다. 한글 번역 전문은 ‘한국연극’ 2018년 3월호에서 확인할 수 있다.
-권력을 가진 자는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프리랜서들도 소속 단원들과 동일한 보고 체계를 사용할 권리가 보장되어야 한다.
-공연의 특성상 업무 영역과 친교 영역의 경계가 모호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이를 악용하지 말아야 한다.
-예술의 자유는 필수적이지만, 창작 환경은 안전해야 한다.
-연습실이나 극장에서 누군가의 신체를 성적으로 대상화해 말하는 것은 부적절한 행동이다.

 

글 이정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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