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놀이 탄생 40주년-1 사물놀이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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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8년 4월 1일 12:00 오전

신명과 흥으로 세상을 두드리다

‘사물놀이가 생긴 지 40년밖에 안 됐다고?’ 올해가 사물놀이 탄생 40주년이라는 사실을 일러주면, 대부분 위 같은 반응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족히 100년은 더 되었을 것 같은 모양새. 그러나 사물놀이는 생각보다 젊고, 보기보다 오래되지 않았다. 꽹과리·징·장구·북을 연주하는 단체를 일컫는 고유명사로 세상에 처음 등장한 이후, ‘전통 타악기로 연주하는 음악’이라는 보통명사로 확장되면서 격변하는 시대와 세대를 아우르는 대표 전통문화로 굳건히 자리 잡았다. 남사당의 마지막 후예들이 남긴 위대한 유산이 지나온 40년, 그 유산을 또다시 창조적으로 발전시켜 나가는 2세대 예인들을 통해 사물놀이의 과거와 현재를 반추하며 미래를 전망해보고자 한다.

 


사물놀이란 무엇이냐

본래 사물이란 불교의식에서 사용하는 범종·법고·운판·목어를 뜻했다. 동틀 무렵과 해 질 녘에 두드려 소리 냄으로써 모든 뭍의 생명에게 부처의 법을 전하는 데 쓰였다. 사물은 후에 범패승들이 제를 올릴 때 자주 사용하던 태평소·징·북·목탁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다가 절 걸립(사찰을 위해 공연을 다니는 행위)을 다니는 걸립패, 그리고 장터와 마을을 다니며 춤과 노래, 곡예를 선보이던 사당패들이 풍물과 굿에 주축으로 두던 꽹과리·징·장구·북을 의미하게 되었다.

사물은 각각 소리의 특징에 따라 의미하는 바가 달랐다. 꽹과리는 천둥과 번개, 징은 바람, 장구는 비, 북은 구름을 상징했다. 4계절과 1년 12달, 365일 24절기를 담당하기도 했다. 하늘을 상징하는 쇠로 만든 악기(꽹과리 징)와 땅을 상징하는 가죽으로 만든 악기(장구 북)는 음양의 조화를 이루듯 하나로 어우러져 사람이 두드려 만들어낸 소리의 공간, 그 안에 신명을 담아냈다. 사람들은 네 악기가 하나로 울려 퍼질 때 비로소 자신들의 목소리가 신에게 닿을 수 있다고 믿었다. 함께 두드려 내는 울림은 하늘과 땅, 사람과 신을 잇는 장단이자 소통수단이었던 것이다.

한국은 예로부터 마을을 중심으로 공동체 문화를 형성한 농경사회였다. 고된 노동 중에 힘을 북돋고 일의 능률을 높이기 위해 다 같이 노래를 불렀고, 누군가는 곁에서 악기를 연주했다. 풍물은 그렇게 민중의 땀방울 속에서 태어나 24절기 내내 그들과 함께했다. 축제와 장터에선 즐길 거리로, 농사철엔 노동요로, 전시엔 군악으로, 제천의식에선 제악으로써 관혼상제를 통틀어 사람이 모이고 희로애락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에나 풍물이 있었다. 민중으로부터 생겨나 민중에 의해, 민중을 위해 울려 퍼진 그들의 소리이자 삶, 그 자체였던 셈이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 점차 상업이 발달하자, 전국에 장터가 활성화됐다. 사람이 모여 활기는 띠는 마당에는 풍물이 울려 퍼졌고, 그 중심엔 언제나 꽹과리·징·장구·북이 있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방방곡곡을 다니던 예인집단 중, 공연예술로서 전문적으로 연희를 파는 남사당패가 생겨났다. 이들은 기존의 집단과 차별화를 두기 위해 각종 재주와 기술을 연마해 연희의 수준을 한층 끌어올렸다. 남사당은 노래와 춤, 풍물 연주는 물론, 버나(접시 돌리기), 살판(땅재주), 덧뵈기(탈놀이), 덜미(꼭두각시), 줄타기(어름) 등 다양한 놀이를 선보이며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사물놀이의 이야기는 이 남사당패에서 시작한다. 사물을 들고 무대에 오른 김덕수·김용배·이광수·최종실은 한국 전쟁으로 인해 서민의 놀이문화가 뒤안길을 걷게 되기 직전까지 남사당에 적을 두고 연희를 배우며 재주를 익힌 이들이었다. 그 결과, 풍물 가락의 주축을 이르던 사물이 남사당의 연희 전반을 품게 되면서 ‘사물’과 ‘놀이’를 결합한 사물놀이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때문에 사물놀이를 단순히 ‘야외에서 이뤄지던 풍물을 무대 위에 앉아서 하는 형태’라고 정의하긴 어렵다. 음악뿐만 아니라 그 시대 민중이 즐기던 연희적 요소를 고스란히 계승했기 때문이다. 사물놀이는 보고 즐기는 시각예술로서의 역량이 두드러졌던 풍물과 달리, 전통 타악이 이끄는 순수한 소리의 세계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그 누구도 겪어보지 못한 신선한 체험의 장을 열었다.

사물은 혼자 울리는 법이 없었다. 늘 여러 악기가 함께 어울렸다. 그러므로 사물 안에는 보이지 않는 배려가 존재했다. 합을 맞추다가도 각각 치고 나오는 부분에선 돋보일 수 있도록 부드럽게 호흡을 가다듬고 기운을 몰아주었다. 서로를 돕고, 보듬으며 상생의 조화를 꾀하던 풍물의 맥을 이어받은 사물놀이는, 예술의 한 장르로 성장하며 전 세계에 한국인의 장단을 전하고 있다.

 


남사당의 마지막 후예들, 시대의 두드림에 답하다

광복 이후에도 여전히 우리나라는 국민의 80%가 농사를 짓고 살았다. 전쟁의 상처가 회복되지 못해 삭막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즐길 거리라곤 남사당의 놀이가 유일했다. 4.19 혁명을 거치며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고, 윤보선 대통령을 거쳐 박정희 대통령으로 정권이 이동함에 따라 사회 전체에 근대화라는 변혁의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그 바람은 곧 전통문화예술 전반에 불어 닥쳤다. 유신정권이 산업화와 새마을운동을 앞세워 ‘허례허식 퇴폐풍조’를 명목으로 전통문화를 없애기 시작한 것이다. 미신타파를 이유로 마을마다 존재하던 서낭당을 부수는 일도 허다했다. 이윽고 서양문물이 빠른 속도로 수입되며 이 땅을 지키고 삶 속에 녹아있던 ‘우리 것’은 낡은 것, 천한 것으로 취급받았다. 전국 단위로 활동하던 예인집단의 수 역시 급격히 줄어들었고, 마당에서 놀이를 즐기던 사람들은 모습을 감췄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사람들의 생활양식도 빠르게 변화했고, 남사당패는 존립 기반을 잃은 채 존폐의 갈림길에 처했다.

게다가 군사 정권에 대한 반발로 시민들이 사물을 두드리며 시위에 나서자, 정부는 전통 타악기를 압수품목으로 지정하고 사람들로부터 빼앗았다. 관혼상제와 24절기마다 민중의 곁을 지키던 악기들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위기는 젊은 예인들의 가슴에 전통의 보존과 계승이라는 불꽃을 피웠다. 남사당의 마지막 후예들은 시대의 흐름을 살피며 기회를 엿보았다. 살아남기 위해선 변화를 받아들이고, 창조적 계승이 이뤄져야 했다. 사라지는 것만은 막아야 했다. 지켜야 할 것은 ‘정신’이었기에.

이러한 간절함에 신명이라도 내린 듯, 건축가 김수근(1931~1986)이 종로구 원서동에 소극장 ‘공간사랑’을 열었다. 현대무용, 재즈, 문학, 전통예술, 클래식 음악 등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와 학자들이 장르에 벽을 두지 않고 ‘공간사랑’에 모여 사장되어 가는 예술계에 생명력을 불어넣고, 다양한 실험과 시도를 꾀했다. 학문과 예술을 나누고,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토론하며 ‘공간사랑’은 진정한 문화예술의 산실이었다. 서른 평 남짓한 공간에서 공옥진의 ‘병신춤’이 태어났고 이매방·안애순·안은미·전미숙 등의 현대 무용가들이 거쳐 갔는가 하면 피아니스트 백건우·민속학자 심우성·건축가 승효상·미술가 이건용·기획자 강준혁 등이 모여 죽어가던 예술혼을 되살렸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보던 젊은 김덕수가 있었다.

어릴 때부터 남사당패를 통해 재주를 익히고, 해외로 나가 전통예술을 선보인 김덕수는 미국과 유럽 각지를 다니며 전통 타악의 가능성을 발견했다. 외국인들이 우리 민족의 장단에 엄청난 호응을 보내온 것이다. 흥과 신명으로 세계의 문을 일찍이 두드려본 그는, 문화예술의 산실인 ‘공간사랑’에서 보고 배운 소통과 교류를 동력 삼아 전통의 창조적 계승을 꾀했다. 그리고 매달 말에 열리던 ‘현대무용의 밤’ ‘프리재즈의 밤’ ‘시 낭송의 밤’과 함께 진행된 ‘전통음악의 밤’에 최태현·이종대·김용배와 함께 무대에 올랐다. 그들은 남사당을 통해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며 자연스레 터득한 각 지역의 풍물 가락들을 네 개의 타악기를 위한 가락으로 정리해 발표했다. 사물놀이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풍물의 볼거리보다 들을 거리를 극대화한 무대. ‘전통의 파괴’와 ‘전통의 계승’으로 나뉜 관객의 극단적인 반응 속에 민속학자 심우성은, 이들에게 ‘사물놀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1978년 2월 22일, ‘전통음악의 밤’에 사물놀이의 형태를 갖추고 태어나 1980년 9월 29일 ‘사물놀이’라는 이름으로 출생신고를 치른 건 김덕수·故김용배·이광수·최종실이였다.

 

글 정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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