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리 비외탕, 시대의 거장들이 극찬한 진정한 시대의 거장

COMPOSER OF THE MONTH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8년 4월 1일 12:00 오전

 

앙리 비외탕(Henri Vieuxtemps, 1820~1881)은 저명한 비평가였던 에두아르트 한슬리크로부터 요제프 요아힘과 함께 가장 뛰어난 바이올리니스트로 인정받았을 정도로 파가니니 다음 세대로서 19세기 중반의 가장 중요한 바이올리니스트였다. 또한 작곡가로서 일곱 개의 바이올린 협주곡 등을 발표하여 작곡으로도 파가니니를 뒤이었다. 베를리오즈는 작곡가로서의 비외탕에 대해 “뛰어난 비르투오소가 아니었다면 대작곡가로 칭송받았을 것”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어린 거장을 알아본 시대의 거장들

비외탕은 오늘날 음악축제로 유명한 벨기에 동쪽 베르비에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방직공이자 아마추어 바이올리니스트였으며, 손수 악기를 제작했을 정도로 음악을 사랑한 애호가였다. 비외탕은 이러한 아버지로부터 바이올린을 접했으며, 곧 정식으로 바이올린을 배웠다. 그의 실력은 빠르게 향상되어 6세 때에 가진 첫 공개 음악회에서 피에르 로드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했을 정도가 놀라운 재능을 보였다. 로드는 당시 프랑스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로, 바이올린의 기교를 최대한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곡을 다수 작곡했다. 여섯 살의 어린이가 이러한 고난도의 곡을 연주했다는 것은 대단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후 비외탕은 리에주·브뤼셀 등 여러 곳에서 연주하던 중 당시 벨기에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작곡가였던 샤를 오귀스트 드 베리오의 눈에 띄었다. 드 베리오는 즉시 비외탕을 제자로 맞아 브뤼셀에서 함께 지냈으며, 1829년에 파리 데뷔 무대를 마련해주었다. 역시 로드의 협주곡을 연주했던 파리 연주회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파리에서의 활동은 오래가지 못했다. 이듬해 7월에 발발한 프랑스 혁명으로 브뤼셀로 돌아와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비외탕은 대신 다른 방향으로 진출했다. 1833년에 가진 독일과 오스트리아 연주여행 중 라이프치히에서 만난 슈만은 10대 초반의 어린 비외탕을 파가니니에 버금가는 연주자로 추켜세웠으며, 1834년 런던 데뷔에는 파가니니가 연주회에 참석했다. 비외탕 역시 파가니니의 연주를 듣고 대화를 나누었다. 베를리오즈를 만난 것도 이즈음이었다.

 


바이올린 협주곡 시리즈의 시작

비외탕은 10대 초에 빈에서 슈베르트의 스승이었던 지몬 젝터로부터 작곡 수업을 받았으며, 1835~1836년 사이에 파리에서 리스트와 베를리오즈의 스승이었던 거장 안톤 라이하로부터 작곡 지도를 받았다. 그는 오케스트라 리허설에 총보를 들고 참석하여 오케스트레이션을 습득할 정도로 작곡에 열의를 갖고 있었다.

바로 이 시기인 1836년에 그의 위대한 바이올린 협주곡 시리즈 중 첫 곡이 탄생했다. 이 곡은 후에 1번이 아닌 2번으로 출판되었는데, 모차르트·베토벤 등의 고전음악을 중심으로 가르쳤던 라이하의 영향으로 고전에 가까운 인상을 준다. 비외탕의 제자이자 프랑스의 바이올리니스트인 에밀 소레가 연주하면서 유명세를 얻어 ‘소레’라는 별명으로도 불린다.

1837년과 1840년에는 두 차례에 걸쳐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방문했다. 두 번째 방문 때엔 바이올린 협주곡 1번(1840)을 초연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이 곡은 이듬해에 비외탕이 거주하고 있던 파리에서도 연주되었다. 분명히 4년 전에 작곡된 2번에 비해 비약적으로 발전해있었다.

1843년 비외탕은 명성 있는 음악가라면 한 번쯤은 다녀갔던 미국 투어를 불과 23세라는 젊은 나이에 떠났다. 이 투어는 보스턴에서 뉴올리언즈에 이르는, 6개월간의 대장정이었다. 하지만 클래식 음악에 익숙하지 않았던 청중 때문에 처음에는 반응이 그리 긍정적이지 못했다. 비외탕은 급히 미국 민요인 ‘양키 두들’ 선율을 바탕으로 밝고 가벼운 변주곡을 작곡했다. 그는 가는 곳마다 ‘미국의 기념품’(1843)이라고 이름 붙인 이 곡을 연주했으며, 청중들은 익숙한 선율과 화려한 변주에 환호를 보냈다. 이를 계기로 비외탕은 “나는 유명해졌고,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기회를 얻어 다른 곳으로 가는 길이 열렸다.”라고 술회하기도 했다. ‘미국에 인사’도 이 시기에 작곡된 곡으로, 역시 ‘양키 두들’과 미국 국가를 차용하였다.

두 번째 미국 투어는 14년 후에 있었다. 그동안 노르웨이의 스타 바이올리니스트 올레 불, 스웨덴의 오페라 가수 제니 린드 등 유명한 음악가들이 다녀가면서 클래식 음악이 어느 정도 보급되어 있던 때였다. 그래서 연주회의 분위기는 이전과 확연히 달랐고, 비외탕은 보다 적은 부담으로 음악회를 소화할 수 있었다. 물론 ‘미국의 기념품’은 두 번째 투어에서도 단골 레퍼토리였으며, 비외탕은 큰 성공을 거두었다.

 


현을 위한 최초의 심포닉 콘체르토

비외탕은 1846년부터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정착했다. 그곳에서 니콜라이 1세의 궁정음악가이자 왕립극장의 독주자로 활동했다. 그리고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서 가르치면서 유명한 ‘러시아 바이올린 악파’를 형성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러시아 체류 시절에 작곡된 작품 중 가장 눈여겨볼 만한 작품은 바이올린 협주곡 4번(1850)이다. 이 곡은 ‘심포닉 콘체르토’라는 점에서 무게감이 남다르다. 심포닉 콘체르토는 독주자의 기교에 집중하기보다는 독주와 관현악을 대등한 위치에 둔 교향곡 형식의 작품으로, 19세기 중반에 앙리 리톨프가 5개의 피아노를 위한 심포닉 콘체르토 시리즈를 발표하면서 유행이 되었다. 특히 리톨프가 1840년대에 발표한 3곡의 심포닉 콘체르토는 당시 작곡가들에게 큰 자극을 주었는데, 비외탕 또한 이 곡들을 듣고 네 번째 바이올린 협주곡을 교향곡과 같이 작곡하기로 마음먹었다. 1849년 10월 16일 가족에게 쓴 편지에서도 “이 곡은 거의 교향곡과 비슷하다.”라고 적었다. 1악장이 시작되면서 등장하는 서주는 교향곡의 첫 주제와 같이 장중하고 충분한 길이를 갖고 있으며, 2악장은 느린 악장, 3악장은 스케르초, 그리고 마지막 4악장은 피날레로서 교향곡과 같이 구성되어있다.

초연은 그해 12월 파리에서 가졌다. 이 시기는 대표적인 심포닉 콘체르토 작품인 리스트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의 초연(1855년)과 브람스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의 초연(1859년)보다도 훨씬 이르다. 즉, 비외탕의 바이올린 협주곡 4번은 심포닉 콘체르토의 선구적인 위치에 있으며, 최초의 바이올린을 위한 심포닉 콘체르토인 것이다. 파리 시민들은 이 새로운 심포닉 콘체르토의 탄생에 큰 갈채를 보냈다. 앙리 블랑샤르는 “누군가는 그를 우리 시대의 파가니니라고 부른다. 하지만 우리 시대의 비외탕이라고 부르는 것이 보다 옳은 표현”이라고 말하며 그의 독보적인 존재감을 확인시켜주었으며, 베를리오즈는 “비외탕은 놀라운 재능을 지녔다. … 이 협주곡은 바이올린 독주를 지닌 매우 뛰어난 교향곡”이라고 평했다.

 


화려한 기교와 낭만적 선율

비외탕은 브뤼셀·프랑크푸르트·파리 등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여러 작품을 완성했다. 특히 1850년대 중반부터 1860년대 초까지 비외탕은 기존 작품을 편곡하는 데에 관심을 가졌다. 모차르트 클라리넷 5중주를 ‘그랑 듀오’(1855)라는 이름으로 비올라와 피아노를 위해 편곡했으며, 타르티니 ‘악마의 트릴’의 통주저음 파트를 피아노로 편곡했다. 그리고 모니우스코의 오페라 ‘할카’의 음악 일부를 바이올린과 오케스트라를 위해 편곡하기도 했다.

비외탕이 작곡한 7곡의 바이올린 협주곡 중에서뿐만 아니라 그의 모든 작품 중에서 가장 유명한 바이올린 협주곡 5번(1859)은 그런 시기에 완성된 독보적인 작품이다. 두 번째 미국 투어를 다녀온 직후 파리에서 완성되어 1861년에 출판된 이 곡은, 화려한 기교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선율을 지녀 프랑스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바이올린 협주곡으로 인정받고 있다. 전체 3악장은 쉼 없이 연주되는데, 마치 코다처럼 짧게 붙어있는 것이 특이하다. 본래 두 악장으로 작곡되었다가 후에 극적인 마무리를 위해 3악장을 붙인 것이기 때문이다. 2악장이 그레트리의 오페라 ‘루실’의 아리아 ‘가족보다 더 좋은 곳이 있을까?’를 인용하여 ‘르 그레트리’라고 불리기도 한다.

기교적인 측면을 강조하면서 치밀한 작곡 능력을 잘 결합한 그의 특징은 비올라 소나타(1862)에도 잘 나타나 있다. 이 곡은 비올라의 음색과 연주적인 특징에 적합하게 작곡되었으며, 서정적인 선율과 기교적인 부분이 훌륭히 조화를 이루고 있어, 낭만 시대의 중요한 비올라 작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1악장 서주 후 이어지는 알레그로 부분의 스피카토와 더블 스톱 아르페지오 등은 당시 비올라보다는 바이올린에서 더 많이 사용되는 기술이었다. 당시 바이올린 곡에서 유행이었던 작은 카덴차도 보인다. 그는 이렇게 비올라에 바이올린 연주기법을 도입하여 비올라 문헌의 발전에 기여했다.

 


만년의 활동

1871년 비외탕은 고국인 벨기에로 돌아와 브뤼셀 음악원에서 교편을 잡고 위대한 제자들을 길러냈다. 외젠 이자이도 그중 하나였다. 이자이는 비외탕이 “달리기 위해 달리지 말고, 노래를 불러, 노래를!”이라 말하곤 했다고 언급했다. 음악에 대한 비외탕의 관점을 잘 말해주는 대목이다. 비외탕은 1873년에 갑작스러운 오른팔의 마비로 더 이상 바이올린을 연주할 수 없게 되자, 이후 지휘와 교수 활동에 전념했다. 2년 후엔 브뤼셀 음악원의 자리를 폴란드 출신의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작곡가인 헨리크 비에니아프스키에게 잠시 맡겨두고 교수 활동도 중단한 채 거처를 파리로 옮겼다. 오른팔의 병세는 호전되어갔음에도 불구하고 왼팔마저 마비 증상을 보이자, 결국 1879년에 정식으로 작곡을 제외한 모든 음악 활동에서 은퇴했다.

더 이상 바이올리니스트로서 삶을 살 수 없게 된 비외탕은 자신의 딸 부부가 살고 있던 알제리로 이주하여 요양원에서 여생을 보냈다. 그는 이곳에서 작곡을 계속했으며, 자신의 작품을 연주하는 다른 연주자들의 연주회에 참석하곤 했다.

1870년대 이후에 비외탕의 작품목록은 그가 바이올린이 아닌 다른 악기에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2개의 첼로 협주곡과 3개의 현악 4중주, 미완성 비올라 소나타가 이때 탄생한 작품들이다. 두 악장만 완성된 미완성 비올라 소나타는 사후 1884년에 ‘알레그로와 스케르초’라는 이름으로 출판되었다.

드 베리오를 따라 브뤼셀에 머문 이후 가지 못했던 고향 베르비에에는 세상을 떠난 후 에야 돌아가 오늘날 세계적인 음악제로 거듭난 베르비에 페스티벌 통해 훌륭한 음악가들을 맞이하고 있다.

 

 

글 송주호(음악 칼럼니스트)
기고와 해설, 강의 등 여러 활동으로 우리를 위한 음악으로서의 클래식을 나누고 있다. 화음쳄버오케스트라 자문위원, 현대음악앙상블 ‘소리’ 프로그래머로서 흥미로운 음악회도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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