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제전

망각에서 소환된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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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8년 8월 12일 12:00 오전

이 춤의 운명이라니_2 무용 작품의 탄생과 파장을 담은 인생 이야기

조프리 발레에서 복원한 니진스키의 ‘봄의 제전’ (1987)

야유와 비난이 시작되자 디아길레프는 박스석에서 일어나 “제발 부탁합니다. 공연을 끝까지 마치게 해주세요”라고 소리쳤고,
스트라빈스키는 격노하여 객석을 떠나 무대 뒤로 가서 남은 공연 시간 내내 니진스키의 코트 자락을 붙들고 있었다.
한편 니진스키는 쏟아지는 비난 속에서 진땀을 흘리며 러시아어로 큰소리로 소리 지르며 무용수들의 박자를 맞추어 주었다

 

초연 당시의 의상

1913년 5월 29일 파리 샹젤리제 극장에서 초연된 ‘봄의 제전’은 공연예술사상에서 유례없는 야유를 받은 작품이다. 거친 불협화음과 변화무쌍한 비트, 원시적인 발구르기는 관객을 극도로 불편하게 했다. 예술적 혁신에 열광하던 파리지앵들조차 역겹고 동물적이라고 비난했다. 성난 관객들이 고함을 지르고 욕설을 퍼붓고 의자를 던지자 결국 경찰이 출두했다. 평론가들은 이 춤을 “봄의 학살”이라고 깎아내렸다. 120회 이상의 리허설을 거쳐 완성된 ‘봄의 제전’은 파리와 런던에서 단 8회 공연된 후 사라져버렸다.

 

‘봄의 제전’은 니진스키의 안무작이다. ‘춤의 신’이라 불렸던 이. 한번 뛰어오르면 관객들이 두리번거릴 만큼 공중에서 머물렀다는 이. 금기를 깨뜨리고 관습을 부정한 이. 알 수 없는 말들을 휘갈긴 일기를 남기고 정신요양원에서 생을 마감한 이. 광기 어린 천재로서 니진스키에 대적할 만한 이는 평생 딱 한 점의 그림을 팔고 자기 귀를 자른 고흐밖에 없을 듯하다. 그런데 ‘봄의 제전’ 초연 당시의 무자비한 야유는 ‘천재 니진스키’라는 찬사에 비해 너무 가혹해 보인다.

사람들이 추앙했던 천재는 무용수 니진스키일 뿐 안무가 니진스키가 아니었다. 니진스키는 ‘봄의 제전’을 통해 안무가로서 각성했으나 이는 곧 스타 발레리노 니진스키의 몰락을 초래했다. ‘봄의 제전’은 그의 경력을 무너뜨렸고, 그의 인생마저 무너뜨렸다.

니진스키의 전기 작가 리처드 버클은 그의 생애를 “10년은 자라고 10년은 배우고 10년은 춤추고, 그리고 나머지 30년은 암묵 속에 가려진 육십 평생”이라 요약했다. 니진스키는 전성기 이후에도 30년을 더 살았지만, 정신요양원에 갇힌 땅딸막한 중년 남성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이는 없었다. 그리고 그가 죽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그에 관한 책과 영화가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왔다. 고흐가 죽은 후에 그림값이 천정부지로 올랐듯 또 하나의 ‘천재의 전설’이 그제야 완성된 것이다.

 

천재의 탄생

1890년 키예프의 폴란드 무용가 집안에서 출생한 니진스키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황실발레학교 시절부터 신동으로 소문났고, 졸업 후 발레단에 코리페(coryphèe: 군무의 리더) 등급으로 입단하자마자 프리마 발레리나였던 마틸다 크셰신스카의 파트너로 춤추었다. 한 마디로 무용수로서 탄탄대로가 보장된 것이다. 그런데 디아길레프와의 만남은 그의 인생을 우여곡절의 드라마로 이끌었다. 당시 러시아에는 발레무용수가 상류층의 성적 파트너로서 활동하는 사례가 빈번했고, 남자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니진스키는 파벨 류보프 공의 파트너가 되었으며, 전화 한 통으로 디아길레프에게 소개되어 그의 파트너가 되었다. 이때 니진스키가 열아홉, 디아길레프가 서른다섯이었다. 디아길레프의 지도하에 니진스키는 미술관·교회· 유적지를 방문하고 전 유럽의 음악가·화가·작가들을 만나며 예술가로 성장했다.

디아길레프(좌)와 스트라빈스키(우) ©Hulton Archive

세르게이 디아길레프는 러시아 문화예술계의 핵심인물로서 러시아의 오페라와 회화를 서유럽에 소개해왔다. 디아길레프가 1909년에 조직한 발레 뤼스는 서유럽에서 유입되어 발전한 고전발레의 전통 위에 예술적인 혁신과 러시아적인 정체성을 구현했던 발레단이다. 처음부터 서유럽을 겨냥했던 발레 뤼스는 화려하고 이국적인 시각 디자인과 대담하고 관능적인 움직임으로 돌풍을 일으켰고, 니진스키는 뛰어난 테크닉과 동물적인 감각, 그리고 양성애적인 섹시함으로 일약 스타가 되었다. 낭만발레 이후 발레가 쇠퇴해버린 서유럽에서 ‘춤의 신’이 발레를 문화예술의 최전선으로 끌어내고 발레리노의 무너진 지위를 재건했다.

 

예술적 각성이 불러온 파국

무용수로서의 명성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니진스키는 안무를 시작했다. 1912년과 1913년 사이에 디아길레프의 격려를 받으며 ‘목신의 오후(L’après-midi d’un Faune)’(1912), ‘유희(Jeux)’(1913), ‘봄의 제전(Le Sacre du Printemps)’(1913)을 잇달아 발표했다. 그러나 어느 하나 인정받지 못했다. 스타 발레리노는 예술가로 각성했으나, 그 결과는 대중들이 바라던 바가 아니었다.

니진스키의 동료들 역시 그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와 작업한 작곡가인 드뷔시나 스트라빈스키는 공개적으로 니진스키를 비판했으며, 이는 니진스키에게 큰 상처를 주었다(스트라빈스키는 한참 후에야 안무가 니진스키를 인정했다). 아카데믹 발레로 훈련된 무용수들은 비-발레적이고 불편한 동작을 강요하는 매우 어려운 리허설에 강한 거부감을 표출했다. 믿었던 디아길레프마저 잇단 흥행실패에 몸을 사리며 니진스키가 맡기로 약속된 작품을 다른 이에게 넘겼다.

‘봄의 제전’ 이후 스트라빈스키와 니진스키의 궤적은 대조적이다. 초연 이듬해의 ‘봄의 제전’ 연주회는 호평을 받았고, 스트라빈스키는 일찌감치 현대음악의 거장으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니진스키는 ‘봄의 제전’ 이후 디아길레프의 속박에서 벗어나고자 로몰라 드 풀츠키라는 무용수와 충동적으로 결혼했으며, 이에 즉각적으로 해고되었다. 이후 니진스키가 예술감독이나 기획자로 꾸린 공연은 비참할 정도로 실패했고, 아내의 모국을 방문했다가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는 바람에 전쟁포로로 억류되기도 했다. 예술적·육체적·재정적 위기가 그를 광기로 몰아넣었다. 1920년에 디아길레프가 ‘봄의 제전’ 재공연을 추진했을 때, 안무는 이미 소실되었고 니진스키는 정신요양원에 수용되었다.

 

 

‘봄의 제전’이 이룬 것들

‘봄의 제전’은 늙은 현자를 중심으로 둥글게 모여 앉은 이교도들이 젊은 처녀가 죽음에 이르도록 춤추는 모습을 지켜보는 이미지에서 탄생했다. 스트라빈스키와 고대 슬라브 문화에 정통했던 화가 니콜라이 레리히가 구상했는데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은 타악기가 불규칙하게 휘몰아치고 레리히의 무대장치는 황량하고 투박했다. 1부 ‘대지에의 찬양’에서 삼삼오오 모인 무용수들은 다양한 원시적 제의를 묘사했고, 2부 ‘희생’에서는 풍요와 다산을 위해 신에게 처녀를 제물로 바쳤다. 잠든 대지와 생명력을 깨우는 봄의 의식은 문명사회에서 잊힌 원초적 욕망을 드러냈다. 무용수들은 남녀 구분이 없는 의상을 입고 무표정한 얼굴에 구부정한 자세, 각진 팔과 안짱다리로 땅을 굴렀다. 선택된 자는 옥죄어오는 큰 원 속에서 한참을 우두커니 서 있다가 느닷없이 발작적으로 뛰어오르며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갔다.

‘봄의 제전’에서 니진스키는 자신을 천재로 등극시킨 발판을 모두 걷어차 버렸다. 고전발레의 아름답고 세련된 춤의 원리, 발레 뤼스의 관능적이고 이국적인 매력은 사라졌다. 무용수들은 상승하는 대신 대지를 찬양했고, 관객이 열광했던 스타 니진스키는 출연하지도 않았다. 개인의 매력과 개성은 억제되고 집단의 응축된 힘이 강조되었다. 니진스키는 인간의 집단적 본성을 차가운 시선으로 관찰했고, 이미 규정된 동작 어휘들을 재조합하는 대신 완전히 새로운 동작으로 이를 형상화했다.

안무가 니진스키를 몰락시켰던 바로 그 특질들로 인해 오늘날 이 작품이 모더니즘의 시초로 추앙된다는 점은 역설적이다. 무엇보다도 ‘봄의 제전’은 발레를 아름다움으로부터 해방시켰다. 발레는 거창하게는 대칭·조화·균형·비례와 같은 아름다움의 원리를 드러내고, 속물적으로는 여성의 아름다움을 과시해왔다. 어떤 순간에도 아름다움은 발레의 DNA에 깊이 새겨져 있었다. 그런데 ‘봄의 제전’은 발레가 아름답지 않아도 된다고 웅변하는 것과 같았다. 발레를 부정하며 탄생한 모던댄스도 이만큼 추(醜)를 전면에 내세우진 못했던 때였다. “우아함에 맞선 죄”를 범한 니진스키는 천동설을 뒤엎은 코페르니쿠스처럼 춤의 패러다임을 바꾸어놓았다.

 

 

망각에서 돌아온 자

‘봄의 제전’은 꼭 그 주인을 닮은 작품이다. 시끌벅적한 등장과 경멸 섞인 평가, 그리고 박제된 신화의 무한한 자가증식까지도. 다른 점이 있다면 정신요양원에서 서서히 잊혀 간 니진스키와는 달리 ‘봄의 제전’은 망각에서 깨어났다는 것이다. 흔히 춤은 사라짐의 예술이라고 하지만 전설을 소유하고픈 후대 사람들의 욕망이 사라져버린 춤을 다시 소환했다.

피나 바우슈 부퍼탈 탄츠테아터의 ‘봄의 제전’ ©Stephanie Berger

스트라빈스키의 격동하는 불협화음과 공동체를 위해 개인을 희생시킨다는 원시적 주제는 안무가들을 매혹했다. 세계적인 안무가 이름을 떠오르는 대로 대보자. 한스 반 마넨, 마사 그레이엄, 폴 테일러, 피나 바우슈, 모리스 베자르, 존 노이마이어, 제임스 쿠델카, 자비에 르 로이, 마리 쉬나르, 사부로 테시가와라, 앙줄랭 프렐조카주, 테로 사리넨 등 수많은 대가가 ‘봄의 제전’을 재해석하기 위해 경합을 벌였다. 지금껏 150편 이상의 재해석이 등장했다고 하니 이쯤 되면 ‘봄의 제전’은 ‘진지한’ 안무가의 통과의례라 할 수 있다.

한편 사라진 걸작에 관한 관심은 마침내 니진스키의 원작마저 부활시켰다. 1987년 미국의 무용학자 밀리센트 허드슨이 미술사가 케니스 아처와 함께 조프리 발레에서 니진스키의 ‘봄의 제전’을 복원한 것이다. 1971년 조프리 발레의 단장인 로버트 조프리와 허드슨의 대화에서 시작된 이 작업은 꼬박 16년이 걸렸다. 스트라빈스키가 악보 위에 휘갈긴 움직임 기록, 관객이 객석에서 연필로 그린 스케치, 리허설 감독이었던 마리 램버트의 악보 기록 등 다양한 사적 기록물과 인터뷰를 바탕으로, 수년간의 연구와 고증을 통해 근거 있는 유사품이 등장한 것이다. 학술적 인증과 비평적 인정 속에 ‘봄의 제전’은 죽음에서 돌아와 마린스키 발레 등 세계적인 발레단의 레퍼토리가 되었다.

 

조프리 발레 버전 ©Herb Migdoll

망각에서 소환된 ‘봄의 제전’은 무용학적 쾌거이고 무용계의 보물이다. 그런데 사라진 춤을 근사치에 가깝게 볼 수 있다는 것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 심지어 DVD와 유튜브를 통해 이를 언제 어디서든 볼 수 있게 되었으니 니진스키를 둘러싼 숭배와 몰이해는 해소될까. 먼지 더께를 걷어낸 시스틴 성당의 벽화처럼 유튜브 속 ‘봄의 제전’은 명징하다. 하지만 소멸한 작품의 귀환은 어쩐지 으스스하다. 고증의 충실성 문제는 제쳐두자. 허드슨이 초연의 불완전한 기록을 어떻게 형상화했는지에 대해서 책 한 권 분량으로 설명했으니 말이다. 오히려 작품의 운명과 자연의 섭리를 거슬러서까지 되살려내는 아카이브적 욕망이 어쩐지 죽은 자를 살려내는 흑마술을 연상케 한다.

커리어의 파멸 직전에 니진스키는 미친 듯이 일기를 썼다. 일기는 1919년 1월 19일에 시작하여 3월 4일에 끝난다. 일기가 끝난 지점에 그는 요양원에 보내졌고, 1950년에 사망했다. 인생의 반을 어둠 속에서 보내기 전 예술가가 필사적으로 써내려 간 글은 광기에 직면한 천재 예술가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니진스키 자신만큼이나 유명해졌다. 그러나 그의 일기 역시 있는 그대로 존재하지 못했다. 그의 아내 로몰라는 일기의 40퍼센트 이상을 걷어내고 난도질하여 1936년에 출간했다. 아내와의 갈등, 직설적인 성적 욕망, 그리고 혼란스러운 문장을 삭제하고 위대하고 천재의 엄숙한 선언으로 탈바꿈시켜버렸다. 가장 사적인 일기가 당사자가 죽기도 전에 공개되고 그마저도 왜곡된 것이다. 일기의 원본은 1979년에 로몰라가 사망한 후에야 재출간되었다. 니진스키의 모든 것이 공공재가 되어버렸다. 소멸하였으되 잊힐 수 없는 ‘봄의 제전’은 죽음 이후에도 끊임없이 소환되어야 하는 천재의 숙명을 닮았다.

마사 그레이엄 버전 ©Sinru Ku

워싱턴 케네디 센터 오페라하우스에서 공연한 마린스키 발레의 ‘봄의 제전’ ©Natasha Razina

 

 

 

 

 

 

 

 

정옥희(성균관대학교 무용학과 겸임교수)

강의·연구·번역과 집필을 통해 춤이 사회에 존재하는 방식에 대하여 사유한다. 유니버설발레단과 중국 광저우시립발레단의 정단원으로 활동한 바 있으며, 현재 성균관대학교 무용학과 겸임교수로 무용을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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