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을 품은 독일가곡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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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8년 10월 9일 11:50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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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곡 ‘시인의 사랑’을 작곡하는 슈만. 괴테의 ‘파우스트’가 책상 위에 놓여 있고, 뮤즈들이 슈만의 주위를 맴돌며 영감을 주고 있다

노래란 태곳적부터 있어 온 익숙한 장르다. 그래서 별로 특별할 게 없어 보인다. 독일어의 리트 또한 ‘가곡’이라는 장르를 뜻하기 이전에 그저 ‘노래’를 뜻하는 일반 명사로 쓰인다. ‘노래’가 ‘가곡’으로 태어나려면 그러한 익숙함을 특별함으로 바꾸어야 했다. 무엇이 ‘리트’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해 주었는가. 그것이 이 글의 주제다.

‘가곡’을 지칭하는 독일어 리트(Lied)는 서정시 리릭(Lyrik)과 어원을 공유한다. 곧 고대 그리스의 탄주악기로서 아폴론과 오르페우스의 악기인 리라(Lyra)가 리트와 리릭의 뿌리이다. 그런데 이 리라는 아폴론의 악기인 까닭에 조화와 질서의 상징이고, 오르페우스의 악기인 까닭에 인간 심성의 진정성을 상징한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시와 노래의 생명이 ‘조화와 진정성’이라는 서양의 뿌리 깊은 생각과 만나게 된다.

하지만 조화와 진정성의 노래들은 늘 인류 문화의 일부였다. 저 옛날의 그레고리안 성가도, 트루바두르와 민네징어 등 음유시인의 연가도, 마르지 않는 생명력의 원천인 민요도 모두 제 나름으로 조화롭고 또한 진실했다. 게다가 뛰어난 시인과 음악가가 작품을 통해 만난 예는 리트 이전에도 얼마든지 있었다. 시인인 동시에 음악가였던 저 음유시인들을 제하더라도, 페트라르카의 소네트가 르네상스의 마드리갈로 재탄생한 것이나 루터의 성시가 바흐의 장엄한 칸타타가 되어 예배당을 울린 일이 그러하다. 셰익스피어의 먹물이 들지 않은 언어도 류트의 음률을 만나 가슴에서 가장 가까운 음악이 되었다. 이 작품들은 각기 자기 시대의 최상의 시와 음악이 결합된 탁월한 사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의 리트는 이전 시대의 노래들과 아주 달랐다.

 

시와 음악의 조화를 추구하는 진정성 있는 노래

리트를 하나의 예술장르로 도약시키는 전환은 민요를 ‘새로운 예술의 이상’으로 삼자는 생각에서 촉발되었다. 민요란 늘 새로이 만들어지는 노래요, 고귀한 단순성이 살아있는 일종의 ‘자연’이었다. 독일 전역에서 쉽게 따라 부를 수 있는 ‘민요풍의 가곡’이 작곡되기 시작하자 과거 엄격한 형식을 통해 구현되었던 조화로움의 이상이 보다 친근한 모습을 띠게 되었다. 민요를 모델로 삼은 새로운 노래들은 쉬웠고 생생한 감정을 전달했으므로 금세 확산되었다. 이는 곧 조화로움을 사랑하는 문화가 시민사회의 저변으로 퍼진 것이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예술가곡의 태동기에 일어난 이같은 변화는 노래 본연의 특성인 조화와 진정성에 새로운 차원을 부여했다. 형식적 조화의 차원이 넓어져 내용적, 감정적 차원을 포괄하게 되었고 진정성에는 개성이라는 새로운 가치가 부가되었다. 그리하여 리트는 개성을 갖춘 시인과 음악가의 진정성 있는 감정적·의미적 교류를 그 내용으로 삼게 되었다. 당연히 과거의 ‘노래’들에 비해 양식보다는 내용이, 전형적 타입보다는 개인적 특수성이 부각되기 시작했다.

거기에 낭만주의는 이 예술 장르에 또 하나의 결정적인 지향점을 선사했다. 낭만주의(Romantik)란, 흔한 오해대로 파도처럼 넘실대는 충만한 감정을 추구하려는 사조가 아니다. 그것은 ‘로만(Roman)’을 지향하는 운동이다. 그런데 ‘로만’이란 곧 라틴어가 아닌 모든 토박이말을 통칭하는 말이다. 결국 낭만주의란 라틴어를 모르는 보통 사람들의 말과 그 세계를 지향하는 운동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라틴어의 세계가 소수 엘리트들의 엄격한 논리로 되어 있다면 로만의 세계는 생생한 환상, 꿈, 비합리, 신비로 되어 있다. 낭만주의 예술이 종종 환상과 꿈, 풍성한 감정에 젖어 있는 것은 감정 그 자체를 중시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로만’의 세계를 지향하는 와중에 부차적으로 생겨난 특성인 것이다. 언어(논리)가 말하기를 그치는 곳에서 음악이 말하기 시작한다는 생각은 노래에 있어 음악의 역할을 놀라울 만큼 확대시켜 주었다. 여기에서 조화로움에 대한 개념이 다시금 확장된다. 그것은 단지 시와 음악 사이의 조화뿐 아니라 성악과 기악(피아노) 사이의 조화, 곧 대등한 관계를 뜻하게 된 것이다.

 

 

바흐와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까지

이 같은 변화는 개략적인 가곡의 역사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바로크 시대의 가곡은 베이스와 노래 선율만을 악보로 표시하고 화성은 특별한 기보 없이 숫자로만 표시한 것이 많아서 흔히 통주저음 가곡이라고 불린다. 멜로디 위에 코드 기호만 표시해 놓는 요즘 기타용 악보와 비슷하다. 이처럼 노래 선율과 코드만 고정되어 있기에 반주의 주법과 스타일은 연주자가 마음대로 변형하여 연주할 수 있다는 것이 바로크 시대 가곡의 특징이다.

C.P.E. 바흐

한편 계몽주의 시대에는 이후 시대를 예견케 하는 중대한 변화가 일어난다. C.P.E. 바흐는 가곡에 있어서 문학을 음악보다 앞세웠던 베를린 가곡악파의 대표자다. 가곡의 교육적 가치를 꿰뚫어 보았던 그는 당대의 지성 겔러트의 송가에 집중적으로 곡을 붙였는데 이들은 모두 쉽게 따라 부를 수 있는 유절가곡이었다. 한편 위대한 오페라 개혁자 글루크 역시 유절 형식의 가곡을 남겨서 오페라에서는 음악이, 가곡에서는 문학이 각각 중심을 이뤄야 한다는 당시의 통념을 확인시켜준다. 하지만 글루크는 지나치게 기교 중심으로 흐르던 당시 오페라에 반기를 들고 드라마(곧 문학)의 역할을 강조함으로써 간접적으로 가곡사에도 기여한다. 또한 괴테 이전의 최대 시인이라 할 수 있는 클롭슈토크의 송가에 곡을 붙여 이후 본격적으로 나타날 문학예술과 음악예술의불꽃 튀는 결합을 예감하게 해 준다.

빈 고전주의를 대표하는 작곡가 모차르트와 베토벤은 슈베르트의 예술가곡들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는 훌륭한 가곡들을 남겼다. 그러나 아직 그들의 가곡에는 시와 음악의 근원적 결합이라는 이상과 비전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즉 높은 음악성과 예술 장르로서의 정체성 결여가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모차르트는 그 천재적인 서정성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계몽적인 교훈시나 오락적인 사교시에 곡을 붙였고, 베토벤의 경우에도 가곡은 교향곡, 소나타 등에 비해 부차적인 장르일 뿐이었다. 그러나 모차르트는 타고난 서정적, 극적 재능으로 가사의 빈약함을 모두 극복하여 전체 독일가곡사에서도 가장 자유롭고 사랑스러운 작품들을 남겼고 베토벤의 경우 간헐적이기는 하지만 유절➊·통절➋·연가곡➌ 등 예술가곡의 주요 장르에서 선구적인 작품을 남겨 훗날 가곡 발전에 큰 영향을 끼친다. 한편 이 시기의 일반적인 기악 분야의 발전(특히 주제작곡법)은 이후 가곡 발전의 초석이 된다.

(➊ 유절가곡: 시의 모든 연에 동일한 음악을 붙인 가곡 / ➋ 통절가곡: 시의 각 연마다 새로운 음악을 붙인 가곡 / ➌ 연가곡: 일관된 주제의 시들에 곡을 붙인 가곡 모음)

 

낭만시대에 꽃피운 리트

프란츠 슈베르트

프란츠 슈베르트와 칼 뢰베는 초기 낭만주의의 가장 중요한 가곡 작곡가이다. 슈베르트는 ‘가곡의 왕’으로, 뢰베는 ‘발라드의 왕’으로 불릴 만큼 이 두 사람은 다양한 의미에서 이전 가곡들의 흐름을 종합, 집대성한 가곡의 대표자다. 슈베르트는 1814년 10월 19일 괴테의 ‘물레 감는 그레첸’을 작곡하여 예술가곡 시대의 막을 올린 장본인이다. 그는 이후 유절가곡 ‘그대는 나의 안식’, 통절가곡 ‘프로메테우스’, 발라드 ‘마왕’, 솔로 칸타타 ‘인질’, 오블리가토 악기를 위한 가곡 ‘바위 위의 목동’, 연가곡집 ‘겨울나그네’ 등 가곡의 거의 모든 세부 장르에서 문학과 음악의 창의적 융합을 선보였다. 그의 선율은 질적으로 전혀 새로운 음악적 서정을 열었고, 그의 피아노는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시어의 상징적 구현을 가능케 했다. 또한 그가 몸담았던 슈베르티아데와 같은 문화 살롱에서는 노래와 관계, 문화 저변의 확대라는 가곡의 사회사적 의미까지도 살려냈다.

한편 북독일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뢰베는 서정·서사·극의 일체인 발라데를 가장 심층적으로 표현해 낸 또 다른 종합자다. 그는 시적 진술의 심리성과 극화된 표현, 구조의 확장성에 있어서는 따라올 자가 없을 만큼의 뛰어난 작품을 여럿 남겼다. 특히 그는 명맥이 끊기다시피 한 거대한 규모의 솔로 칸타타 작곡에 있어서는 대체 불가능한 의의를 지닌 작곡가로서 최근 들어 새로운 조명을 받고 있다. 이어지는 낭만주의 예술가곡의 확장기에는 로베르트 슈만과 펠릭스 멘델스존, 프란츠 리스트의 삼인방이 장르를 계속해서 발전시킨다.

로베르트 슈만

슈만은 슈베르트처럼 가곡의 거의 모든 장르에서 주옥같은 명작을 남겼는데 특히 그는 문학적 해석력 측면에서 슈베르트를 뛰어넘는 발전을 이룩한다. 다시 말해 시인에 따라, 작품에 따라 놀라운 다양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반어적이고 신랄한 하이네나 고상하고 은둔자적인 아이헨도르프의 세계가 슈만의 작품에서는 선명히 대비된다. 특히 슈베르트와 괴테의 결합 이후 음악과 문학의 가장 격렬한 융합이라고 할 수 있는 슈만의 하이네 작곡은 예술가곡이 단순한 선율이나 외적 감각의 묘사를 뛰어넘어 반어, 희화화, 거리두기 등과 같은 문학적 형성 원리와 메시지 전달 기능까지도 일부 담당할 수 있음을 보여준 걸작들이다. 한편 서정적이고 정갈한 가곡을 주로 남긴 멘델스존과, 반대로 서사적이고 확장적인 가곡을 주로 남긴 리스트 역시 가곡사의 한 켠을 담당했다. 특히 멘델스존과 리스트는 각각 ‘가사 없는 가곡’인 ‘무언가’와 피아노 솔로를 위한 ‘가곡 편곡 작품’들을 통해 낭만주의 가곡 예술을 보다 널리 알리는 데 공헌했다.

 

 

 

가곡의 심화와 확장, 발전

요하네스 브람스

음악 문화의 융성이 두드러졌던 비더마이어 시기(1815~1848)의 가곡의 대표자는 브람스다. 비더마이어는 사실 정치적 의미에서 자유와 통일을 지향했던 낭만주의 예술이 독일 혁명 실패 이후 급격히 보수성을 띄게 되면서 나타난 체념적인 문학사조이다. 하지만 역으로 이러한 정치적 좌절이 오히려 예술에 대한 보편적 관심으로 이어졌다. 브람스는 스승 슈만의 가곡을 보다 응축시키는 방향으로 가곡 예술을 발전시킨다. 외적으로는 민요적 단순성을, 내적으로는 고도로 압축된 정밀한 구조를 지향했던 그의 가곡은 오랜 기간 독일가곡의 대표로 자리매김한다. 특히 브람스가 다른 작곡가들에 비해 앙상블 가곡을 많이 작곡한 사실은 독일 전역에 음악 저변이 확대되고 가곡이 더 이상 가정음악이 아닌 연주회용 음악으로 자리 잡게 된 이 시기의 변화를 대변한다. 또 그러한 변화 속에서 파니 멘델스존이나 클라라 슈만 같은 여성 작곡가들도 뛰어난 작품들을 남겼고, 질허 같은 음악 교육자들은 ‘로렐라이’나 ‘고요한 밤, 거룩한 밤’처럼 전 세계에서 사랑받는 쉽고 아름다운 노래들을 작곡했다. 한편 이 시기 독일가곡은 프랑스의 포레, 노르웨이의 그리그, 체코의 드보르자크, 러시아의 차이콥스키 등 비독일어권 작곡가들에게도 영향을 미쳐 독특한 민족적 정서를 담은 새로운 가곡의 탄생을 견인하기도 한다.

세기말에는 독일 낭만 가곡의 최고봉이자 현대 가곡으로의 분기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후고 볼프는 바그너적인 음악어법을 가곡에 접목시킴으로써, 전통적인 민요적 노래를 벗어나 자연스러운 언어적 표현을 극대화시킨 낭송조 가곡을 창조해낸다. 구스타프 말러는 황홀경과 고통이 공존하는 세상의 모순을 극단적인 대조를 통해 음악화함으로써 19세기 낭만 가곡에 면면히 흐르던 서정적 조화의 이상을 벗어나 보다 확장적인 가곡 세계를 만들어낸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자아의 성찰을 추구하는 시적 내면성의 전통을 탈피하여 가곡 예술을 화려하고 외향적인 연주회용 무대 작품으로 탈바꿈시킨다. 이처럼 세기말의 3대 작곡가들은 각각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동안의 가곡의 전통을 변형, 극복하고 있다.

 

가곡이 맞이한 새로운 시대

안톤 베베른

그러나 이어지는 20세기 초, 곧 세계대전의 시기는 그동안 존속해왔던 조화의 이상을 송두리째 날려버렸다. 음악학자 아도르노의 말대로 아우슈비츠 이후의 서정시(가곡)는 야만적이라 느껴졌는지도 모른다. 과거 낭만가곡의 유산은 이제 세 갈래로 분열을 일으킨다. 첫째는 신(新)낭만주의(Neoromantik)이다. 이들은 미학적으로 보수적인 그룹으로서 볼프·말러·R. 슈트라우스와 피츠너의 유산을 이어받았다고 할 수 있다. 이 흐름의 대표자로는 요제프 마르크스나 오트마 쇠크를 들 수 있다. 이들은 전반적으로 가곡의 전통적인 구조를 그대로 유지하되 화성적 확장의 기능적 가능성과 새로운 형식, 관현악 가곡의 틀을 소극적으로 활용한다.

두 번째는 신(新)빈악파(Wiener Schule)로서 음악 미학적인 측면에서만 진보적인 그룹이다. 이 그룹의 선구자 쇤베르크는 기존의 낭만주의 음악의 질서를 완전히 뒤집고 음렬에 의한 새로운 세계를 만든다. 작곡가는 완전한 무제한의 자유를 누리며 불협화와 이전까지는 없었던 소리를 통해 새로운 가능성을 만들어 낸다. 베르크는 쇤베르크보다 근본적으로 더 서정적인 가곡을 남겼지만 점차 극렬한 표현력을 지향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의 이러한 노력은 오페라 ‘보체크’에서 결실을 맺는다. 한편 신빈악파 중 가장 적극적으로 가곡 장르에 몰두한 베베른의 가곡은 극히 세심하고 간명한 음향적 미니어처다. 형식 및 표현상의 단순성은 민요적 이상에서 이어받은 개념이지만 현대적 추상화를 이미 거친 그의 음조는 역시 낭만주의적 근대적 서정성의 틀을 벗어나 있다. 베베른의 가곡은 감정미학, 혹은 정조가곡의 이상을 벗어난 새로운 종류의 서정적 가곡이라고 할 수 있다.

세 번째 흐름은 안티-리트라고 부를 만한 그룹이다. 이들은 음악적으로는 대중적 노선을 걸었으나 정치적으로는 가장 진보적이었던 그룹으로 한스 아이슬러, 파울 데사우, 쿠르트 바일 등의 작곡가가 여기에 속한다. 이들은 낭만주의 전통의 허위의식에 가차 없는 비판을 가할 뿐 아니라 바그너 이래의 독일 문화 이데올로기, 대중의 삶과 격리된 신빈악파의 엘리트주의적 음악에도 일침을 가하였다. 1920년대 이들이 만들어낸 소위 카바레 음악은 적나라한 사회 비판을 담고 있으며 노래 장르에서 이러한 비판 의식이 적극적으로 담긴 것은 아주 신선한 일이었다. 바로크 음악, 바그너의 경향, 12음 기법에 대한 패러디, 당시에는 천대받았던 재즈나 폭스트롯의 적극적 활용 등, 이들의 노래들은 하나의 사회적 텍스트로서의 면모를 보여준다.

지금까지 약술한 독일 리트의 역사는 곧 이 장르가 조화로움과 진정성의 밑바탕 아래 시와 음악이, 인간의 정신과 감각이, 성악과 기악이, 예술가와 문화저변이 끝없이 교류한 장이었음을 드러내 준다. 비록 현대에 이르러 시심의 실종과 함께 리트에 대한 관심이 약해진 것이 사실이지만 이 장르의 가치는 여전하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말과 서양음악을 보다 조화롭게 만들어 더 호소력 있는 예술작품을 만들고자 한다면, 어디에서 가장 많은 힌트를 얻을 수 있을까. 삼백여 년간 시와 음악의 관계를 실험한 리트의 역사에서가 아닐까.

글 나성인(음악 칼럼니스트, 독일가곡 문학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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