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스트 앤 퍼스트’ 시리즈의 연극 ‘돼지우리’ & ‘아라비안 나이트’

베스트가 무엇인지 증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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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8년 10월 6일 12:30 오전

‘객석’ 필자들이 꼽은 화제의 무대

‘돼지우리’

‘베스트 앤 퍼스트(Best & First)’라는 제목의 기획이 2005년 이후 13년 만에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주최로 연극과 무용 분야에서 야심 차게 진행되고 있다. 연극분야는 4명의 연출가(손진책·최용훈·전인철·민새롬)가 이름을 올렸는데, ‘베스트’와 ‘퍼스트’에 각각 원로와 신인이라는 세대 개념이 강했던 이전과 달리 이번에는 세대별 ‘베스트’에 해당하는 연출가들이 섭외되었다. 연출가들의 면면과 네 편의 공연 모두 초연되는 번역극이라는 점을 놓고 보면, 번역극을 선택한 것은 연출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효과적인 방법으로 제안되었을 것이고, 섭외된 연출가들은 오랜만에 다시 진행하는 기획의 성공을 위해 심사숙고한 결과였으리라 짐작된다. 다행스러운 것은 관객들과 먼저 만난 두 작품이 ‘베스트’의 만족감을 다양하게 충족시켰다는 점이다.
한 가지 짚고 갈 것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이미 폐기했던 기획을 다시 불러낸 의도이다. 올해 부활시킨 기획은 ‘베스트 앤 퍼스트’와 ‘봄 작가, 겨울 무대’로, 전자는 연출가 중심이고 후자는 신인작가 중심이다. 이것을 지금 부활시키는 것은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실추된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이미지를 쇄신하고 위원회 본연의 역할에 충실하고자 하는 의도이자 노력으로 읽힌다. 환영할 일이며, 나아가 ‘퍼스트’가 자연스레 ‘베스트’가 되지 않는다는 것, 가꾸고 돌보고 아껴야 하는 정성이 필요하다는 것을 꼭 기억했으면 한다.

 

 

소박하면서도 화려하게, ‘돼지우리’

‘돼지우리’

연극 ‘돼지우리’(아돌 후가드 작, 손진책 연출, 9월 8~22일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는 여러모로 소박하다. 우선, 작품의 내용이 단순하다. 탈영했다는 사실이 발각되면 총살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공포감 때문에 41년간 돼지우리에서 숨어 살던 탈영병 파벨이 아내 프라스코비야와 함께 돼지우리를 나서는 이야기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이 작품의 제목이다. ‘돼지우리’는 영어로 ‘pigsty’이다. 그런데 이 작품의 영어 제목은 ‘A place with the pigs’, 즉 ‘돼지와 함께 있는 공간’이다. 파벨이 머물던 곳이 단순한 명칭인 돼지우리가 아니라 돼지와 함께 있는 공간이 되면서 수많은 은유와 상징, 철학적 질문을 만들어 낸다. 역시 아돌 후가드답다.
파벨이 41년간의 은둔생활을 청산할 수 있었던 현실적 이유는 같은 공간에 머물던 돼지들을 밖으로 내쫓았기 때문이다. 아내와 함께 맘껏 웃으며 텅 빈 돼지우리를 나서는 파벨의 모습은 그가 끝없이 혐오했던 돼지가 그냥 돼지가 아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파벨이 돼지우리를 나가 세상과 대면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돼지들을 밖으로 내몰듯 자신 안의 공포와 불안을 몰아냈기 때문이다. 이것은 곧 그가 숨어 살게 된 것은 다른 무엇도 아닌 그의 내면에서 자발적으로 키워온 불안과 두려움이 원인이었다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일상을 영위하면서 비겁하고 나약하고 용기 내지 못하는 것은 스스로 만들어낸 공포 때문이라는 작품의 주제는 연출가 손진책과 베스트 스태프, 베스트 배우를 통해 선명하게 제시되었다. 무대 위 모든 요소들이 과함이나 군더더기 없이 균형을 잡고 있어서 높은 완성도를 유감없이 보여준 공연이었다. 아무리 연기의 달인이라고 해도 배우 단 두 명이 대극장 무대에 서는 것은 큰 부담이며, 의도하지 않은 공간의 여백이 생길 수 있는데, 박완규와 고수희는 이런 염려들을 완벽하게 쓸모없는 것으로 만들었다. 한 번도 퇴장하지 않은 채 말 그대로 온몸으로 열연을 펼친 박완규는 돼지우리 속에서 41년을 살면서 심신이 피폐해지는 파벨을 명민한 캐릭터 해석과 감각적 표현으로 구현했고, 이 덕분에 이해할 수 없는 인물이지만 이해되고 몰입되는 역설을 성취했다. 작품 속 폭주하는 파벨을 잡아주는 것이 아내이듯 고수희는 박완규를 조율했다. 저런 아내만 있다면 40년이 넘게 갇혀있어도 견딜 수 있겠다는 신뢰를 주는 것은 온전히 고수희 배우의 아우라 때문이다.
파벨이 딱 한 번 마을 어귀의 나무까지 나갔을 때, 무대가 회전하여 나무 한 그루만 있는 탁 트인 공간을 만들어 냈다. 돼지우리의 답답함을 틈 사이 비추는 조명으로 처리했듯 나무만 있는 공간엔 별이 총총해서 그대로 도망치고 싶은 파벨의 마음을 관객에게 고스란히 전달했다. 조명과 무대 스태프의 협업이 빛을 내는 장면이었다. 배우와 스태프도 이미 ‘베스트’이지만 그들을 조율하고 균형을 잡아간 것은 연출가 손진책이니, 연극 ‘돼지우리’의 충만함은 연출에게 공을 돌려야 할 것 같다.

 

감각적이면서도 깔끔하게, ‘아라비안 나이트’

‘아라비안 나이트’

연극 ‘아라비안 나이트’(롤란트 쉼멜페닉 작, 전인철 연출, 9월 4~16일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는 연출가로서는 쉽지 않은 도전이자 모험인 작품이다. 인물들이 3인칭 관찰자적 시점의 소설 같은 문장을 나열하면서 사건을 ‘서술’하고 있고 그 사이사이에 각자의 환상이 삽입되어 있어 현실과 환상, 대화와 해설 등 많은 것이 엉켜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구분하고 경계를 지으며 적절한 연기와 표현을 결정해야 하는 연출가의 역할이 절대적인 만큼 연출이 부각될 수도 있고 가라앉을 수도 있는데, 다행스럽게도 전인철은 나름의 방법으로 돌파구를 마련한 것으로 보인다.
셰에라자드가 떠오르는 제목과 달리 이 작품은 독일의 빈민가 작은 아파트에 살고 있는 이주노동자가 중심이다. 작가의 다른 작품인 ‘황금용’에서도 이주노동자들의 삶을 그려내고 있지만 그 양상이 다르다. ‘아라비안 나이트’는 엘리베이터가 고장 났다는 안내판을 붙이지 않았다거나, 열쇠를 놓고 나오는 바람에 집에 들어가지 못하는 등의 사소한 해프닝과 그 연쇄가 빚어낸 사건을 다룬다. 구조가 같은 아파트, 그 속에서 살아가는 모습도 비슷하지만 각자 다른 꿈을 꾸는 사람들이 퍼즐조각처럼 흩어져 있다가 하나의 그림으로 맞춰지는 양상이다. 전인철은 각각의 퍼즐과 그 조합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지 그 방법에 많은 시간을 들인 듯하다.

‘아라비안 나이트’

바닥 한가운데에 놓인 정사각형의 작고 얕은 단 이 무대장치의 전부이고, 그 단 위에 작은 책상과 의자, 큐브가 놓여 있다. 다섯 명의 배우들은 이 사각의 단 위에서, 책상 위에서, 의자에서 다양한 공간을 만들어낸다. 배우들이 단 위에서 서로 겹쳐지는 모습은 비좁고 협소한 공간 속에서 삶의 여유를 기대할 수 없는 인물들의 처지를 시각적으로 구현했다. 단의 바깥 공간은 아파트 밖이기도 하고 환상이 펼쳐지는 곳이기도 한데, 단의 안과 밖에 걸려있는 연극적 약속이 선명하지 않아서 현실과 환상, 안과 밖이 공간적으로 혼란스러웠던 것은 조금 아쉬운 부분이다.
‘노란 봉투’나 ‘연변엄마’처럼 전인철을 대표하는 기존의 작품과는 다른 방식으로 구성된 ‘아라비안 나이트’는 분명 연출가로서의 새로운 도전이자 모험이었는데, 전인철은 자신이 해결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파악하고, 깔끔한 무대와 숙련된 배우들을 통해 그것을 수행했다는 점에서 ‘베스트’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글 배선애(연극평론가) 사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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